다치하라 마사키의 소설 『겨울의 유산』이 재출간됐다. 한번 절판된, 그것도 20년전 절판된 소설이 다시 출간되는 일은 여간해선 보기 드물다. 노벨문학상이라도 받거나, 그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책들은 다른 신간에 밀려 잊혀져간다.

이 책은 상을 받지도, 영화로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대신 시절인연이 흐르면서, 일본과 한국을 잇고자 하는 눈밝은 이들의 눈에 띄어,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았다.

재출간의 어려운 과정을 어렴풋이 아는지라, 서평을 잘 써야 한다는 부담감이 심장을 누른다. 이 아름다운 소설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주인공의 아버지는 안동 무량사의 스님이다. 어머니는 일본인 혼혈이다. 동네 아이들은 그 소년을 ‘튀기’라고 부른다.

소년은 동네에 있는 묵계서원 대신 아버지의 뜻으로 무량사 선방에서 전통 학문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는 주로 『논어』와 같은 유학 서적을 읽었지만, 그에게 글공부를 가르쳐주던 무량사의 큰 스님과 젊고 기백 넘치는 청안 스님의 영향 속에서 임제선의 의미를 어렴풋이 배워나간다.

1주일에 한번 정도 마을로 내려와 집을 들르던 아버지, 언제나 세상에 한 발짝 떨어진 채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던 아버지는 어느 날 청산가리를 먹고 절에서 자살을 했다. 아버지가 죽은 후부터 소년은 한없는 무상함으로 세상을 마주한다.

“눈앞을 가로막는 자가 있으면 떠밀어 버렸으나 한편으로는 어딘가에 대상을 싸늘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생겨나고 있었다.”

1933년 안동 심상소학교에 입학한 뒤 어머니가 일본인과 재혼을 하게 된다. 어머니가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면서 구미의 외숙부에게로 잠시 가게 되지만 외숙부 또한 갑자기 규슈대학병원 연구원으로 가는 바람에 소년은 졸지에 고아 아닌 고아가 되고 만다.

이후 어머니가 있는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1년 8개월간 소년은 차갑고 외롭고 아무렇게나 버려진 존재감을 뼛속까지 느끼며 지낸다. 그 겨울에 배운 무상함은 그의 삶을 관통하는 하나의 큰 줄기가 되었다.

“그해 겨울이 나에게는 가장 그립다. 바람도 얼어붙을 것 같던 그 겨울은 나만의 세계가 되어 있었다. 훗날 어머니를 다시 만났을 때 나에게 아무 감동도 없었던 것은 내가 이 겨울을 경험해 왔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다시 만난 것을 기뻐하며 울었으나 그 눈물은 부담스러웠다. 어머니는 자기 좋을 대로 살아간 여인이었다. 어머니를 다시 만났을 때 내가 생각한 것은 그해 겨울이었고 큰 스님으로부터 새로운 공안을 배운 그해 여름이었다.”

이후 어머니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 주인공은 그곳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진학한다. 그리고 대불로 유명한 가마쿠라에서 한 살 연하의 일본인 여인과 결혼한다.

어느 날 그는 집에서 가까운 한 사찰에서 무량사의 풍경을 발견한다. 임제의 선이라는 공통분모를 안고 있는 한국의 무량사와 일본의 서천사. 같지만 다른 두 절, 다르지만 같은 종풍은 마치 한국인이면서 일본인으로서 살아가는 자신의 경계이기도 했다.

“임제의 가풍이 왜 나를 묶어두고 있는가. 나는 이것을 아내에게 잘 설명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곳은 내가 마음 놓고 돌아갈 수 있는 곳이었다. (중략) 안을 보든 밖을 보든 만나게 되면 곧 죽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죽여라.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먀 가족을 만나면 가족을 죽임으로써 비로소 해탈을 얻는다. 사물에 구애를 받지 않고 자유자재스러움, 이것이 임제의 가풍이었다.”

발 없는 새처럼 살아가던 그가 땅 위로 다시 내려온 것은 그의 첫 아들 때문이었다.

아들이 세상에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라 주변의 사찰들을 찾아간 그는 그곳에서 아버지를 만난다.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내버려두고 자신만의 세계를 찾아 떠난 아버지는 그에게 말한다.

“그래도 너는 살아라.”

작가는 스스로에게 던지는 독백처럼 말한다.

“모든 것이 언젠가는 무상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어린 생명과 그 생명을 만든 여인을 위해 나는 살지 않으면 안되었다. 과거는 떠난 일이 없고, 현재는 멈추는 일이 없고, 미래는 오는 일이 없다.”

* *

나오키상 수상작가 이자 재일교포인 다치하라 마사키의 소설 『겨울의 유산』은 작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쓴 자전적 소설이다. 그의 한국이름은 김윤규이다. 실제 그는 안동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는 안동 봉정사의 스님이었다. 스님이 아니라 그냥 절에서 일하는 거사였다는 설도 있지만 어쨌든 안동과 봉정사가 작가의 어린 시절 성장배경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도쿄의 하층민 지역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결혼을 한 이후에는 북가마쿠라 지역에서 살아간다.

가마쿠라 신불교가 발생한 가마쿠라 지역은 수천여개의 절이 밀집해 있는 곳이다. 그 가운데 북가마쿠라역 부근에는 아주 커다란 절이 두 개가 있는데 한 절은 원각사(圓覺寺), 또 하나는 건장사(建長寺)이다. 작가는 이 두 절의 이름을 합쳐서 건각사(建覺寺)라는 절이 집 주변이 있다고 묘사한다.

그는 이 커다란 절 대신 가마쿠라 서쪽 끝에 위치한 서천사(瑞泉寺)를 종종 다니는데, 이곳은 임제선풍을 이어가고 있는 절이었다. 한국불교 또한 임제의 선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봉정사와 서천사는 형제와 같은 관계라 할 수 있다. 이 절을 너무도 사랑한 다치하라는 죽은 후에도 이 절에 묻혔다. 서천사 뒷편 사찰묘지에는 다치하라의 유골이 안치돼 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스스로를 한국과 일본의 혼혈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다치하라 스스로 작성한 자신의 연보에서도 부모 양쪽이 모두 한일 혼혈이라고 쓰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부모는 모두 순수 한국인이었다.

소설이 작가의 의식의 흐름임을 감안해볼 때, 그는 한국에서도 이방인이고 일본에서도 이방인이었지만, 임제의 선이 흐르고 있는 선방에서는 고향에 온 기분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또한 선승의 아내로서의 고고함을 잃어버린 어머니를 부정하고, 오히려 선의 완전한 세계 속으로 다가가기 위해 자살한 아버지에게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일본과 한국의 경계, 선의 세계와 현실세계의 경계, 무한함과 무상함, 나와 타자의 경계를 아주 잘 드러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섬세한 예술가들에 의해 표현된 모호하고 묘연한 경계는 우리들로 하여금 인간의 본질을 엿보게 해준다. 그런 측면에서 『겨울의 유산』은 작가의 마음을 통해 나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거울이 돼준다.

* *

이 소설이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동국대 김호성 교수의 노력 덕분이다. 일찍이 김 교수는 『겨울의 유산』이 20여년전 한국에서 번역 출판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그의 작품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여러 편의 서평을 통해 이 책을 소개해왔다. 지난해 발간한 『불교, 소설과 영화를 말하다』에서는 무려 다섯 편의 글이 『겨울의 유산』과 다치하라에 관한 글이다. 이 글들의 말미에는 습관처럼 “이 책이 다시 출판되었으면 좋겠다”는 독백을 담고 있다.

김 교수는 지난 겨울 그의 바람을 알게 된 한 지인의 도움을 받아 일본에서 소설의 판권을 샀고, 20년전 『구름꽃』이라는 제목으로 소설을 번역한 번역가 김형숙 씨를 수소문했다. 김호성 교수의 간곡한 설득 끝에 김형숙 씨는 『겨울의 유산』을 새롭게 재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재탄생한 소설이 바로 『겨울의 유산』이다. 김 교수는 왜 그토록 『겨울의 유산』 재출간을 위해 노력한 것일까.

사실 김호성 교수는 일본불교 전도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일본불교에 매료돼 있다.

2002년 교토 불교대학 연구생으로 지내면서 일본불교에 눈을 뜬 그는 이후 단행본『일본불교의 빛과 그림자』, 잡지「일본불교사 공부방」1〜6집 등을 펴내면서 한국과 일본의 교두보 역할을 하는데 주력해왔다. 또한 매년 여름․겨울마다 일본불교 순례단을 꾸려 일본사찰들을 탐방해오고 있다.

그는 일본의 불교를 통해 한국을 재인식하게 되었고, 한일간의 크나큰 벽을 넘을 수 있었다. 일본과 한국의 깊고 깊은 골을 넘을 수 있는 방법은 불교밖에는 없음을 알게 되었다고 술회한다. 김 교수에게 이 소설은 그가 발견한 한국불교와 일본불교의 공감대를 가장 잘 그린 작품이다.

“참 아름답지 않은가! 나도 『겨울의 유산』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작가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내 정신의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으며, 『겨울의 유산』 속에는 그 고향이 있기 때문이다.”

김 교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은 일본불교의 불모지다. 그 황폐한 토양에 물을 뿌리는 심정으로 아마 김 교수는 이 소설의 재출간을 위해 고군분투했을 것이다.

거친 황야에 비가 내리면 수년전 날아온 홀씨들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 수천수만 송이의 꽃을 피우듯이, 일본불교의 황무지 한국에도 그 꽃이 피어나길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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