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경봉 큰스님을 다 아실 것이다. 경봉 큰스님은 통도사에 주석하면서 큰 덕화와 법력으로 만 중생을 제도하였으며, 불자는 물론 일반 국민들로부터도 큰 존경을 받았던 큰 어른이셨다.

경봉 스님은 이미 궁극의 경계를 이루어 무애자재의 열반락을 누리고 계셨으나, 늘 동체대비의 구세원력을 놓지 않으셨다. 앉으나 서나 중생을 향한 연민심으로 충만해 있었다. 스님께서는 그러나 언제까지나 중생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지니는 데에 만족하지 않으셨다. 스님께서는 중생을 향한 당신의 마음을 담은 취지서를 직접 작성하시고 이를 구체화했다. 이름하여 ‘호국수도원 취지서’이다.

호국수도원 취지서에서 밝힌 것처럼 “깊이 현금(現今)의 세상을 살피건대 중생의 도탄(塗炭)이 이에 더 심함이 없나니 무릇 창생(蒼生)을 제도(濟度)하고 국가를 수호하는 양책(良策)이 무엇이리오!”라는 고민과 함께 그 해결책은 오직 성인의 출현이라고 생각하셨다. “옛말에 성인이 나면 천지에서 기운이 돌고 산중 수도하는 도인 없는 나라에 천하를 경륜하는 치가(治家)도 또한 없다한 말도 한 가지 뜻이로다. 어찌 수양치 않으리오!”라는 경봉 큰스님의 안타까움은 곧 호국수도원 설립의 발원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오직 고상원만(高尙圓滿)한 인격자를 대망(待望)하는 수밖에 없나니 대체 그 누구를 가리켜 고상원만한 인격자라 하리오. 오직 수양으로 인하여 인생관과 세계관을 확립하여 오직 중생을 제도코저 하는 자비의 일편단심으로 용왕매진(勇往邁進)하여 진흙 속에서 피어오르는 백련(白蓮)같이 홍진(紅塵) 중에 골몰(汨沒)하되 자성의 진면목을 의연히 들어내어 여하한 번뇌와 역경 속에 있을지라도 태연부동(泰然不動)하고 안심입명(安心立命)하는 그 사람일 것이니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이 성도(聖道)를 수행케 함이 어찌 민족정신을 진흥하는 감로문(甘露門)이 아니며 국가융창(國家隆昌)의 원동력이 아니며 세계평화와 인류행복의 나침반이 아니랴! 여기에 뜻하는 바 있어 삼가 호국수도원을 창립하고자 하는도다.”

구구절절 수행자가 행해야할 지향을 강조한 경봉 큰스님의 대자비심을 살펴볼 수 있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깨달음을 이루어 중생을 구원하고자 하는 원력을 내기는커녕, 또 홍진의 연꽃이기는커녕 외려 수행자가 중생계를 오염시키는 홍진이 되어버린 오늘날의 비참한 상황에 놓이고 보니, 경봉 큰스님의 이 구세원력이 참으로 그립고, 돋보이지 않을 수 없다.

도덕과 양심이 펄펄 살아 꿈틀거려야 할 승가에, 도덕과 양심은 그 그림자조차 희미해지고, 마치 범죄자가 검사에게 요구하듯이 비승가적 행태를 저질렀다는 구설에 휩싸인 사람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물질적 증거를 요구하는 딱한 시절에 옛 도인의 절절한 발원이 왠지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서글픈 시절인연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통도사의 여명. 사진=맑은소리 맑은나라 제공

통도사 적멸보궁

“호국선원의 종지(宗旨)는 참선으로 수심(修心)으로 하되 구세불타(求世佛陀)의 성도(聖道)를 생활화하도록 하고, 수행인은 승속을 분별치 아니하며, 수행기한은 작정(作定)치 아니하고, 종래 선원수도에 불합리한 모든 제도는 단연 쇄신하고, 본원을 재단법인으로 하여 우선 본부를 통도사에 두고 순차로 각 지방의 촌락까지 보급하기로 한다”는 호국수도원의 세부적인 지침까지 손수 작성한 60년 전 경봉 큰스님의 큰마음이 생각할수록 망극하다.

승가의 자정능력이 온전하게 상실되어 더 이상 희망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던 차에 경봉 노스님의 이 구세원력을 오늘에 재현하겠다고 나선 후학들, 즉 이름하여 ‘경봉선풍 중진불사회(鏡峰禪風 重振佛事會)’가 있으니, 썩어가는 연못으로 스며드는 한 줄기 맑은 샘물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은 다름 아닌 경봉 큰스님의 문손들이다. 이들은 경봉 스님께서 발원하신 ‘호국수도원 불사’를 오늘에 맞게 ‘통도선문화재단’으로 이름을 바꿔 재단을 설립하겠다고 나섰다. 경봉 큰스님의 구세원력이 담긴 취지서를 후학인 학승 지안 스님이 ‘통도선문화재단 설립취지서(通度禪文化財團 設立 趣旨文)’라는 이름으로 새로이 고쳐 썼다.

“불지종가(佛之宗家)요 국지대찰(國之大刹)이란 사격(寺格)을 표방하고 있는 통도사에서 선대의 큰스님들의 유지를 받들어 선풍(禪風)을 선양(宣揚)하고 자비를 실천하는 보살도를 구현하고자 통도선문화재단 설립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통도사 스님들은 이 선문화재단을 통해 ▲불교의 본래 수행목적에 부합하는 선풍을 선양하며 선수행을 지원하고 각지에 수행센터를 개원하여 인간의 정신이 피폐(疲弊)되어 나타나는 현대사회의 병리현상(病理現象)을 치료하고 예방하는 수행공간을 마련할 것이며 ▲선학술연구 선문화예술에 종사하는 학자나 예술인을 지원하는 사업을 해나갈 것이고 ▲선문화 대중화를 위해 학술행사, 예술행사, 문화축제 등 여러 가지 콘텐츠를 활용, 선문화전파의 폭을 넓혀 갈 것임을 밝혔다.

실낱같은 양이라도 맑은 샘물이 흘러드는 한 연못은 썩지 않는다고 한다. 21세기 한국불교의 참담한 현실을 지켜보며 작은 샘물의 유입마저 끊기고 만 것은 아닌가 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지내던 차에 저 멀리 영축산에서 들려온 경봉 선사 후학들의 움직임이 칠흑 같이 어두운 밤을 물리는 여명처럼 반갑다.

부디 보현행원( 賢行願)에 부합하는 이 뜻 깊은 불사를 간단없이 진행해 불법중흥의 초석이 되어주시기를 간곡히 바라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