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사지 쌍사자석등

보물 제353호
소재지 : 경남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연 대 : 통일신라시대

걸음걸음이 너무 아까웠다.

꿈에도 그리워하던 영암사지와 석등을 만나러 갔건만 단박에 보기에는 그리워한 나날과 설레던 마음이 너무 컸던 탓이다.

아름드리 느티나무의 옆길을 통해 곧바로 금당지에 가는 법을 마다하고, 정면의 진입부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었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눈을 내려뜬 채로….

이미 많은 답사객들의 글과 사진을 통해 각종 매체에 소개된 바 있고, 많은 이들에게 찬탄을 받는 곳이 폐사지 영암사터이고 쌍사자 석등이다.

으레 폐사지에 가면 스산한 들판의 바람을 음미하면서, 불에 그을렸거나 깨진 석편을 근거삼아 법향 충만했을 과거 사찰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전각이 위치했었을 자리에 가서 돌계단을 오르고 또 법당지에 들어서서 예를 갖추곤 한다. 그래야만 깨지고 묻혀서도 꿋꿋이 부처님이 계셨던 곳임을 알려주고 있는 그들의 은혜에, 약간이나마 보답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 영암사지에서 만큼은 왠지 그런 모습이 그려지지도 않거니와 굳이 그 옛날의 사격을 생각하고 싶지 않다. 자칫 흔적만 남은 절터지만 긴 침묵의 엄숙함 속에 다소곳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석등과 탑, 그리고 석계단의 숭고한 아름다움이 반감될 것 같아서이다.

기운찬 화강암 덩어리들이 하늘을 향해 불같이 치솟은 황매산의 신령스러움과, 까마득한 날부터 그 자리에 있었을 것 같은 쌍사자석등은 어쩌면 이렇게도 완벽하게 조화로울 수 있을까. 이들의 만들어내는 환상적 어우러짐에 나의 눈은 더없는 사치의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

황매산은 강렬한 기운의 바위산으로 봄이면 온 산에 붉은 철쭉꽃이 만발한다. 또 가을엔 억새의 하얀 백발이 눈부시다. 거기에 이름조차 신비로운 영암사가 자리하고 있고, 함께 깊은 숨을 들이켜서 힘을 보태고 싶도록, 두 마리 사자가 온 정성을 다 바쳐 부처님께 등 공양을 올리고 있다.

쌍사자석등은 석등 양식에서도 매우 이형적인 형태인데, 영암사지 석등과 아주 유사한 사례로 법주사의 석등과 광주박물관에 소재한 옥룡사석등이 있다. 다소 변형된 모습으로는 고달사지와 회암사지 및 청룡사지 정도에 보이고 있는데, 사찰 경내에서 밤에 불을 밝히는 본래의 용도보다는 부처님의 지혜광명을 상징하는 불빛, 즉 법공양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사학계의 1세대 전문가로 여겨지는 분들이 “국보 5호 법주사의 쌍사자석등이 영암사터의 그것과 유사한 석등 형태 중 최고의 걸작”이라고 밝힌 바 있고, 그런 주장이 활자화된 후부터는 그 의견에 감히 이의를 다는 사람은 미적 감각이 저급한 이가 되어버리는 관행이 있다. 그러나 나는 오직 나의 시력에 맞는 안경을 쓰고 있을 뿐이다. 법주사의 석등은 생동감 있는 품격이 있지만, 본래의 자리에서 옮겨져서 보호각 안에 갇힌 채 구경 온 꼬마들의 동전 받이신세로 전락하고 있다. 또 중흥산성에 있던 옥룡사 석등은 정교한 조각기법이 빼어나지만 불을 밝히기는커녕 되레 박물관의 전자조명에게 빛을 쪼이고 있는 신세이다.

그러나 영암사지 쌍사자석등이 주는 감동은 다르다. 살아있는 듯 팽팽한 긴장감이 어려 있는 석사자의 허벅지에서 뿜어 나오기도 하지만, 폐사지의 고요 속에서 그윽한 아름다움을 품은 채 언제나 바로 거기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황매산의 기상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석등의 위치도 그러려니와 몇 년 새 유행처럼 치러지는 산사음악회를 이미 천 년 전에 미리 대비한 듯, 금당 앞에 무대처럼 돌출된 석축이라니! 앙증맞으면서도 부처님 전에 오르는 이에게 몸가짐을 다잡아 주는 계단이며, 외롭지 않도록 석등을 외호하는 묵직한 탑, 돌못을 사용하여 그 누구보다 굳건함을 보여주는 외벽까지…. 이 모두들 감싸 안았을 회랑터에 이르고 나면, 인간의 솜씨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참으로 아름다우면서도 치밀한 설계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다.

석등은 1933년 일본인들이 자국으로 유출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사례가 있다. 그 후 1959년까지 면사무소에 보관하였는데, 이를 동네주민들의 노력으로 다시 제자리에 모셨다.

일본인이라도 미의식이야 비슷할 테니 석등의 매력에 탐심을 내었다면 십분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그들이 석등을 훔쳐 그 나라의 어느 부자에게 팔아넘겨서 그의 집 정원에 이 석등을 모셔 놓았다면 그보다 더 큰 비극이 어디 있으랴. 현장에서 절절히 가슴에 와 닿았을 찬란한 아름다움이야 언감생심 가당키나 할 것이며, 석등이 없는 영암사지의 모습 또한 얼마나 황량했겠는가.

이 석등의 아름다움은 역시 두 마리의 사자모습이다. 갈기와 꼬리의 움직임에서 살아있는 듯한 생동감을 느끼지만 사력을 다하는 듯한 탐스러운 ‘꿀벅지’는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석등은 보는 위치에 따라 숭고한 자세가 되기도 하고, 앙증맞은 자세가 되기도 하고, 또한 쓸쓸해 보이기도 하는 천의 얼굴을 가졌지만, 그건 보는 이의 마음일 뿐이다. 다만 화사석을 떠안은 지극히 정성스런 모습은 그 앞에 당당히 서 있기조차 불경스러울만큼 성스러운 것이다.

이곳 영암사지는 경상지역의 오지였지만 교통망의 발전으로 내왕객이 많아지고, 바로 옆에는 영암사의 프리미엄을 얻고 들어선 신생 사찰이 있어서 과거의 고즈넉함이 훼손되었다고 안타까워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이곳이 아직도 찾기 어려운 오지이고 인근에 사찰이 생기지 않았다면, 나만의 비장처라고 자랑하는 이에게는 뿌듯할 지 모르겠지만 2000년대를 사는 우리의 인식은 일제강점기보다도 성보에 대한 애착과 보존의 마음이 더 확고하다고 보기에 어려우니, 사찰 탓을 할 일도 아니다. 그나마 절이 들어섰기에 영암사지는 제 때에 향내음도 맡고 목탁소리도 듣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만 하루하루 공해에 찌들고 비바람에 무뎌지는 석등이나 금당기단의 아름다운 조각들을 보노라면, 후손들은 이 아름다운 모습을 사진으로 비교해가며 친견해야 할 것 같아 못내 마음이 무겁다. 비록 절터에 있으나 보다 여법하게 보존하고 전승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일이다.

영암사지는 금당과 탑 그리고 승방의 삼단계 권역으로 나뉜 가람배치이지만, 마치 보너스처럼 서쪽에 서금당지가 숲에 둘러싸여 잔잔하고 포근한 기운을 머금고 있다.

서금당지앞에는 하대석만 남은 석등이 허리가 부러진 채 처연하게 참배객을 맞이한다. 하대석만으로 옛 모습을 상상할 수는 없지만 쌍사자석등에 비교해 이 석등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궁금하다. 옛 모습을 알 수 없다는 안타까움에 하대석을 쓰다듬고 어루만지니, 몸체 잃은 석편은 싸늘하고 차디찰 뿐이다.

한 번에 보기가 너무 아까워서 걸음걸음 조금씩 만났던 영암사지, 그리고 쌍사자석등! 참배를 마치고 돌아서 가는 길에 필자는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돌아볼 때마다 잘가라며 미소 짓는 석등을 보니 하염없는 미안함과 안쓰러움으로 눈물이 핑 돈다. “그래, 거기 그렇게 있어줘서 너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