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안, 고개를 숙이고 손바닥만 한 전화기를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더 이상 어색할 것 없는 흔한 지하철 풍경이다. 일반인들의 일상생활이 인터넷망에 빠르게 잠식당하고 있다. 불교평론은 9월 7일 오후 1시 한국불교역사기념관에서 추계 세미나를 열어 변천돼가는 문명사회를 불교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 논의했다.
“컴퓨터가 매개하는 가상적 실존은 현실 공간의 실존감을 약화시키지만, 다른 한편 그 실존감 자체의 범위를 확대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기도 하다. 이는 타자와의 의존성에 기반한 불교의 연기성과 무아론을 깨칠 가능성을 내재화하고 있다.”
박병기 교원대 교수는 ‘디지털 문명의 매트릭스적 실존과 불교적 대응’을 주제로 이같이 발표했다.
박 교수(왼쪽 사진)는 갈수록 첨예하게 발달하는 첨단통신기술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 영화 <매트릭스>에 나타나는 것처럼 ‘가상현실인간화’ 돼간다고 진단했다. 이어 “디지털 문명의 발달로 인한 가상적 실존이 연기성에 대한 교착상태에 빠진 자본주의적 인간에게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가상적 실존감이 우리 일상 속에 들어옴으로써 실존의 영역 자체가 확대된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이러한 가상적 실존감은 타자와의 관계망을 실존의 핵심 요소로 보는 불교적 존재론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가상적 실존은 실존의 연계망을 확대시킴으로써 자신의 연기성을 좀 더 수월하게 깨질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줄 수 있다”며 디지털 문명에 대한 불교적 대응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한편 디지털 문명의 약점으로 익명성과 신속한 관계 단절 가능성 등을 지적했다. 그는 “‘몸 없는 실존’ 또는 ‘몸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실존’의 경험이 ‘자비의 실천’이라는 실천적 요소를 얼마나 충족시킬 수 있는지는 아직 온전히 드러나지 않았다”며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였다.
박 교수는 “디지털 문명 속에서 우리의 실존은 새로운 지평을 맞고 있으며, 불교는 철학으로서의 속성을 충분히 발휘함으로써 그 지평을 여는 데 적극적인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도흠 한양대 교수도 디지털 문명을 불교적으로 해석했다. 이 교수는 “사이버 세계는 나와 남, 동일자와 타자, 현실과 환상, 원본과 모본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무수한 네트워킹 속에서 분별이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타자의 의식, 말, 행동과 몸짓, 댓글과 리트윗이 나에게 영향을 미쳐 나를 형성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동시에 이뤄진다”며 “이는 구슬 하나하나가 삼라만상을 비추고 있고 구슬끼리 서로 비추어 무한대의 삼라만상이 프락탈(차원 분열 도형)을 형성하는 인드라망 구조와 흡사하다”고 주장했다.
7일 열린 불교평론 추계 세미나에서 김형효 교수가 발제하고 있다.
이날 불교평론 세미나에는 박병기 교원대 교수를 비롯하여 김형효 서강대 석좌교수, 석길암 금강대 HK교수, 이도흠 한양대 교수, 박수호 덕성여대 교수, 명법 스님(서울대 강사), 허우성 경희대 교수 등이 참여해 디지털 시대의 불교의 태도와 역할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