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무소유’, ‘암자로 가는 길’의 작가 정찬주의 시정(詩情)이 넘치는 여행기이자, 구도적 문체와 시적 감수성이 빛나는 명상의 절 순례기 『절은 절하는 곳이다』(이랑)가 출간됐다. 이번 순례기는 그가 ‘글집’ 화순 이불재에서 집필활동에 전념하면서 틈틈이 틈을 내어 찾아간 남도(南道)의 작은 절 43곳의 이야기다.
크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저마다 깊은 역사와 신비로운 이야기를 간직한 곳, 세속의 잡념을 털어내고 고요한 명상에 잠길 수 있으며 차 한 잔을 건네는 푸근한 마음이 있는 곳. 작은 절을 찾아가는 길은 우리 내면에 자리한 ‘참된 나’를 만나는 구도의 여정이기도 하다.
절이란 것이, 그냥 별 생각 없이 찾으면, 그냥 절에 갔다 왔다는 무덤덤한 생각으로 지나칠 경우가 많은 법이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절 순례기나 암자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이런 허탈함을 피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세상에 수많은 사찰 순례기가 나와 있지만, 작가 정찬주의 순례기처럼 맛있고 멋있고 품격과 깊이를 갖춘, 또 압정으로 꾹 찔리는 듯한 교훈과 감동으로 다가오는 순례기를 만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 책을 펴낸 출판사에서 ‘수십만 독자를 사로잡은 우리 시대 최고의 문장가 정찬주, 구도적 문체와 시적 감수성이 빛나는 명상의 절 순례기’라는 카피를 책 표지에 올린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세속의 잡사는 잊어버리고 고요함과 하나 되라”라는 식의 불교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천착, 그리고 수행의 체험이 바탕하지 않고는 터져 나올 수 없는 잠언적 울림은 오직 정찬주의 글에서만 만나볼 수 있는 특혜다.
저잣거리의 생활을 청산하고 남도 산중에 집을 지어 들어앉은 그가, 이번에는 깊고 고요한 곳에 자리한 남도의 작은 절을 찾아 마음을 비우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의 글을 읽노라면 부지불식간 독자에 대한 그의 무량한 자비심을 느끼게 된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동백이며, 매화며, 산수유가 터질듯 고개를 치밀어 세상으로 나오는 상춘의 철이기에 이 책에서 더 뜨거운 정감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범종각 앞에서 한동안 명상에 잠긴다. 짧은 순간이지만 범종소리에 온갖 잡념이 사라진다. 나와 범종소리가 하나 되니 한 생각조차 스며들 틈이 없다. 마치 범종소리에 나라고 고집하는 내가 사금파리처럼 산산이 깨져버린 듯하다. 내 육신과 의식은 비로소 청정한 시공(時空)에 머문다. 무아의 상태다. 찰나의 법열이지만 충만이 목에까지 차오른다. 범종소리는 계속해서 허공으로 울려 퍼진다.” -본문 중에서
선방산 지보사 배롱나무 꽃무더기 속에 자리한 석탑을 보며 무위(無爲)란 꽃피듯 자연스러운 마음가짐이란 것을 알게 되고, 고승들의 절창이 남아 있는 비슬산 유가사에서는 풍류란 바람으로 마음을 읽는 것임을 배운다. 모후산 유마사에서는 살아 있는 부처를 무서워하라는 단순한 깨달음을 얻게 되며, 16국사를 배출한 승보종찰 조계산 송광사와 같은 이름의 절, 종남산 송광사에서는 절의 위의나 품격은 도량의 크기가 아니라 주름살이 진 건물에서 찾아야 함을 알게 된다. 또한 호랑이 앞발 자리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월출산 도갑사에서는 나와 남이 둘이 아니며, 나무와 풀, 새와 짐승, 바람과 물 등 자연의 모든 존재에 깃들어 있는 부처님을 느낀다. 천년고찰 작은 절들과의 오랜 인연 앞에 작가는 숙연해진 발걸음을 조심스레 옮긴다.
“수많은 절 가운데 지금 이 순간 왜 이곳에 서 있는지 새삼 묻는다. 내가 오려고 결심했던 것이 인(因)이라면 나를 오게 한 그 무엇은 연(緣)이 아니겠는가. 인연을 생각하면 한 발짝 옮기는 것도 조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천년고찰에 들러 귀 속의 귀가 열리고, 눈 속의 눈을 뜬 느낌이다.” -본문 중에서
작가에게 작은 절을 찾아가는 길은 내면에 자리한 미소 짓는 부처, 즉 ‘참된 나’를 만나는 구도의 여정이기도 했다. 청량산 문수사에서는 마치 극락으로 가는 배를 탄 듯, 녹음의 바다에서 무심과 적멸의 경계를 넘나들고, 천등산 봉정사에서는 행복과 무상함이 본래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알게 된다. 묵은 절의 주름진 기둥, 칠이 벗겨진 단청, 고승의 절창이 남아 있는 산 속 작은 절에서 그는 홀연히 깨닫는다. 불상이란 우상이 아니라 순간적이나마 욕망과 분노, 어리석음의 삼독(三毒)을 씻고 홀연히 만나 미소 짓는 우리 내면의 자화상이라는 것을, 그리고 ‘나’라는 교만을 버리게 하고, 절하게 하는 곳이 바로 작은 절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는 고백한다. 저잣거리나 산속의 깊은 암자, 작은 절이 다 무슨 소용이랴, 부처님은 바로 내 안에 있는데!
“자신이 탑이고 부처인 줄 모르고 천불과 천탑을 찾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운주사(雲住寺)의 이름대로 절에서 구름 한 조각을 찾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다. 자신의 인생이 바로 이 세상에 잠시 머물다 가는 한 조각의 구름이 아닌가. 운주사를 찾는 사람 모두가 운주사인 것이다.” -본문 중에서
정찬주의 책을 들고서 찾는 산사는 곧 우리 내면의 깊은 나, 참된 나와 만나는 행복 여정에 다름 아니다. 작은 절들을 순례하면서 자신을 맑히고 돌아보는 징검다리가 되기를 바란 작가는, 살아 있는 나를 위해 예수재(豫修齋)를 지내자는 생각으로 절 순례를 했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법당에 들어 절하는 것이 더욱 절절해졌다고 말한다.
그는 ‘절은 절하는 곳이다’라고 했지만, 이 글을 읽는 우리는 그곳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세속의 잡사는 잊어버리고 고요함과 하나 되는 순간, 사랑도 미움도 다 버린 무욕(無慾)의 얼굴을 그곳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어느 선사가 말한 바 있지 않던가. ‘도를 모르고서 발을 옮긴들 어찌 길을 알겠는가.’ 잡념의 먼지를 털어내고, 참된 나와 만나는 행복의 여정이 가까이 있다.
*지은이 정찬주는?
30여 년 동안 특유의 구도적 문체로 불교적 사유가 담긴 산문과 소설을 발표해온 정찬주는 1953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작가로 살아가던 그는 수행자가 진리를 구하듯 진정한 ‘나’로 돌아가기 위해 저잣거리의 생활을 청산하고 남도 산중에 집을 지어 들어앉았다. 솔바람으로 시비에 집착하는 귀를 씻어 불(佛)을 이룬다는 뜻의 이불재(耳佛齋)라는 집 이름에는 산중에서 자연의 섭리를 좇아 있는 듯 없는 듯 살고자 하는 그의 바람이 담겨 있다. 특히 그는 이 땅의 암자와 선방을 순례하며 삶의 지혜를 깨닫는 글로 깊은 울림을 주었는데, 이번에는 깊고 고요한 곳에 자리한 작은 절을 찾아 마음을 비우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동안 펴낸 책으로는 장편소설 ≪소설 무소유≫ ≪산은산 물은물≫ ≪인연≫ ≪하늘의 도≫ ≪백제대왕≫ ≪만행≫ 등이 있고, 산문집 ≪암자로 가는 길≫ ≪암자로 가는 길2≫ ≪자기를 속이지 말라≫ ≪선방 가는 길≫ ≪돈황 가는 길≫ ≪정찬주의 다인기행≫ ≪뜰 앞의 잣나무≫, 그리고 어른을 위한 동화 ≪눈부처≫가 있다. 1996년 행원문학상, 2010년 동국문학상을 받았다. 현재 이불재에서 농사일과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