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 켄뽀 아왕상뽀
(북인도 둑 다르마까라 승가대학 교수사/ 서울 성북구 캄따시링 센터장)
번역 및 정리 : 자홍스님 (캄따시링 법회 통역)
교정 : 캄따시링 역경원(지성남, 김지아)

아상가 논사의 탱화
마치 못나고 지켜주는 이 없는 어떤 여인이
보호자 없는 곳에 머무는데
태(胎)로써 왕의 영광을 품고 있지만
스스로는 뱃속에 있는 군주를 알지 못하듯이 [1.121]
།ཇི་ལྟར་མི་མོ་གཟུགས་ངན་མགོན་མེད་འགའ། །མགོན་མེད་འདུག་གནས་སུ་ནི་འདུག་གྱུར་ལ།
།མངལ་གྱིས་རྒྱལ་པོའི་དཔལ་ནི་འཛིན་བྱེད་པས། །རང་ལྟོ་ན་ཡོད་མི་བདག་མི་ཤེས་ལྟར།
1.121에서는 여래장의 9가지 비유 중 8번째 비유를 언급한다. "마치 못나고 지켜주는 이 없는 어떤 여인이 보호자 없는 곳에 머무는데"라고 하였다. 여기 한 여인이 있다. 여인은 외형이 매우 추하고 자신을 지켜주는 사람도 없는데, 아무런 의지할 곳도, 보호해주는 것도 없는 곳에 혼자 머물고 있다.
그러나 "태(胎)로써 왕의 영광을 품고 있지만 스스로는 뱃속에 있는 군주를 알지 못하듯이"라고 하였다. 여인은 태(胎) 중에 아이를 품고 있었는데, 이 아이는 범상치 않다. 태어나자마자 다른 아이들과는 비할 수 없는 위대한 능력을 지닌, 장차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될 그런 아이이다. 그런데 이 여인은 자신의 태중에 이런 아이를 품고 있는 줄 전혀 알지 못한다. 만약 이 여인이 태중에 전륜왕이 될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 아마도 큰 용기와 희망을 가질 것이다.
마음속의 용기를 갖고 있느냐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용기가 없다면 세상을 살아가기도 힘들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행하고 공부하는 것도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속 용기는 외적인 것들, 즉 재산, 명예, 지위, 외모 등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이 잠시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만, 환경과 상황이 바뀌면 모두 원점으로 돌아가버리기 때문이다.
밖에서 타인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는 깊은 수준에서 진정한 마음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자기를 바로 알게 되면 마음속의 착란이 사라진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자기를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내 마음속의 심자성(心自性)을 아는 것이다. 심자성은 가난하든 부유하든, 외모가 아름답든 그렇지 못하든 모든 이에게 평등하게 존재한다. 이를 깨달아 당신의 심자성과 내 심자성이 같으며, 부처의 심자성과 나의 심자성 사이에 아무런 차별이 없음을 확신할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진정한 희망과 용기를 주는 것이다.
유(有)에 태어남은 보호자 없는 집과 같고
부정(不淨)한 유정은 회임한 여성과 같다.
거기에 그가 있으므로 보호자를 갖추니
무구계(無垢界)는 태중에 머물고 있는 그와 같다. [1.122]
།སྲིད་པར་སྐྱེ་བ་མགོན་མེད་ཁྱིམ་བཞིན་ཏེ། །མ་དག་སེམས་ཅན་མངལ་ལྡན་བུད་མེད་བཞིན།
།དེ་ལ་གང་ཞིག་ཡོད་པས་མགོན་བཅས་པ། །དྲི་མེད་ཁམས་ནི་དེ་ཡི་མངལ་གནས་བཞིན།
1.122에서는 비유의 의미를 설명한다. "유(有)에 태어남은 보호자 없는 집과 같고"라고 하였다. 유(有, Tib. srid pa, Skt. bhava), 즉 삼계윤회(三界輪廻)에 태어남은 마치 보호자 없는 집에 태어나는 것과 같다. "부정(不淨)한 유정은 회임한 여성과 같다."라고 하였다. 그 안에 태어나는 청정하지 못한 유정들은 1.121의 비유에서 언급한 태중에 아이가 있는 여인과 같다.
"거기에 그가 있으므로 보호자를 갖추니"라고 하였다. 여기서 '거기'는 여인의 태(胎) 중을 말한다. 그가 있다는 것은, 태중에 전륜왕이 될 아이가 있다는 뜻이다. 특별한 아이를 품었으므로, 이 여인은 마치 보호자를 갖춘 것과 같다. 그리고 "무구계(無垢界)는 태중에 머물고 있는 그와 같다."라고 하였다. 무구계(無垢界)란 여래장(如來藏)•계(界)를 가리킨다. 여인의 태중에 있는 전륜왕이 될 아이는 중생 속에 있는 여래장과 같다.
잠곤꽁뚤석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윤회의 다양한 영역에 태어나는 것은 괴로움과 함께 하기 때문에, 보호자가 없고 구제자가 없는 집에 거주하는 것과 같다. 객진번뇌로 청정하지 못한 유정들은 보호•구제가 있음에도 알지 못하기에, 태중에 왕이 있는 여인과도 같다. 이 여인에게 왕이 있으므로 보호자와 함께하는 것과 같이, 유정에게 법성(法性)이 있음으로 최상의 보호와 함께 한다. 자성(自性)이 청정하고 더러움이 없는 계(界)•여래장(如來藏)이 나타나게 되니,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구제하므로, 여인의 태중에 머무는 왕과 같다."
마치 몸에 더러운 옷을 걸치고 추한 외모를 한 이가
군주가 태중에 있음에도 보호자 없는 집에서 엄청난 괴로움을 경험하듯이,
마찬가지로 자신 안에 보호자가 있음에도 보호자가 없다고 생각하여
중생은 번뇌에 의해 마음이 적정(寂靜)하지 못하여 고통의 토대에 머문다. [1.123]
།ཇི་ལྟར་བུད་མེད་ལུས་ལ་དྲི་བཅས་གོས་གྱོན་མི་སྡུག་གཟུགས་ལྡན་པ།
།ས་བདག་མངལ་ན་གནས་ཀྱང་མགོན་མེད་ཁང་པར་སྡུག་བསྔལ་མཆོག་མྱོང་ལྟར།
།དེ་བཞིན་བདག་རང་ནང་གནས་མགོན་ཡོད་གྱུར་ཀྱང་མགོན་མེད་བློ་ལྡན་པ།
།འགྲོ་བ་ཉོན་མོངས་དབང་གིས་ཡིད་མ་ཞི་བས་སྡུག་བསྔལ་གཞི་ལ་གནས།
1.123에서는 1.121의 비유와 1.122의 의미를 통합한다. "마치 몸에 더러운 옷을 걸치고 추한 외모를 한 이가 군주가 태중에 있음에도 보호자 없는 집에서 엄청난 괴로움을 경험하듯이"라고 하였다. 더러운 옷을 입고 추한 외모를 한 이는 앞의 비유에 나온 여인을 말한다. 태중의 군주(Tib. sa bdag, Skt. nṛpa)는 전륜왕을 가리킨다.
"마찬가지로 자신 안에 보호자가 있음에도 보호자가 없다고 생각하여 중생은 번뇌에 의해 마음이 적정(寂靜)하지 못하여 고통의 토대에 머문다."라고 하였다. 이 여인이 자신의 태중에 전륜왕이 될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 설사 환경이 가혹해서 춥고 배고프고 빈곤할지라도, 마음속에는 늘 희망과 용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몸과 마음의 엄청난 괴로움을 겪고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자신 안에 있는 '보호자'는 바로 여래장이다. 큰 병과 불행으로 괴로울지라도, 우리 마음속에 여래장이 있음을 알고 확신한다면, 늘 마음에 힘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알지 못하기에 늘 괴롭고 절망한다. '보호자'인 여래장이 있음을 모르기에, 이 마음은 늘 번뇌에 휘둘려 고요하고 평화롭지 못하다. 그리하여 늘 고통 속에 머물고 있다.
학생: 어떻게 해야 확신을 얻을 수 있을까요?
켄뽀: 계속해서, 반복해서 마음으로 수습(修習)해야 한다.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당장에는 아무 변화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래장이 존재함을 반복해서 사유하고 다시 사유해야 한다. 오래 반복하다 보면 마음이 조금씩 변화한다.
대수인(大手印)의 4가지 예비수행 중 귀의발심대배(歸依發心大拜) 의궤를 보면, 관상을 마치고 관했던 상(相)들을 다시 거두어들이는 차제(次第)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자내증(自內證, Tib. rang rig)이야말로 진정한 최상의 귀의라네." 자신의 심자성(心自性)을 스스로 아는 것이야말로 바로 진정한 귀의이다. 우리가 착란상, 괴로움, 번뇌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두려움과 아픔에서 자유롭고자 한다면, 자기 마음의 자성을 스스로 알아야 한다. 오직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안은 금을 녹여 형상이 장엄하고
고요한데, 바깥은 흙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고서, 그것을 아는 이들이 안의 금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외부의 덮개를 제거하듯이 [1.124]
།ཇི་ལྟར་ནང་གི་གསེར་ཞུན་གཟུགས་རྒྱས་པ། །ཞི་བ་ཕྱི་རོལ་ས་ཡི་རང་བཞིན་ཅན།
།མཐོང་ནས་དེ་ཤེས་པ་དག་ནང་གི་གསེར། །སྦྱང་ཕྱིར་ཕྱི་རོལ་སྒྲིབ་པ་སེལ་བྱེད་ལྟར།
"안은 금을 녹여 형상이 장엄하고 고요한데, 바깥은 흙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고서, 그것을 아는 이들이 안의 금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외부의 덮개를 제거하듯이"라고 하였다. 1.124는 9번째 비유를 제시한다. 이 비유에서는 내부에 있는 황금의 상(像)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외부에 있는 지저분한 진흙을 깨끗하게 제거한다.
잠곤꽁뚤석에서는 '마치 이러하다. 검은 진흙 안에 녹인 금을 부어 만든, 팔다리가 잘 뻗고 멋지고 평화롭고 아름다운 형상이, 그 바깥에 지(地) 속성인 진흙으로 덮여있는 것을 보고서, 내부에 금상(金像)이 있음을 알고 내부의 상(像)에 붙은 진흙을 정화하기 위해, 밖을 덮은 진흙을 제거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괴 로짜와 숀누뺄의 주석에서는 이렇게 설하였다. '비유하자면 이렇다. 마른 진흙을 덮은 내부에, 녹인 금을 채워서 만든 부처나 보살이나 생명체 등 장인(匠人)이 원하는, 팔다리를 잘 뻗어 갖춘 상(像)이 있다. 외부의 흙의 속성을 지닌 것의 뜨거움이 식고 차갑게 되었을 때, 그것을 알아보고서는, 그것을 아는 대장장이들이 외부가 흙으로 덮인 내부의 금을 정화하고 깨끗한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외부의 장애물을 제거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유정들의 조작되지 않은 심자성(心自性)은 빛나는 부처님의 형상과 같다. 탐욕 등의 오염은 조작된 객진(客塵)임을 여래께서 보시고서, 보배의 상(像)의 원천과 같은 유정들이 조작된 장애에 덮여 있으니, 그 장애로부터 정화하고 깨끗하게 하기 위해, 법을 설하신다. 이를 통해 최상의 보리의 몸이 구족되고, 그로부터 행위의 흐름이 무량하게 발생한다."
자성광명(自性光明)의 무구(無垢)함과
객진(客塵)을 관찰하고서
보석의 원천과 같은 중생들을
장애들로부터 정화하는 것이, 무상각(無上覺)이다. [1.125]
།རང་བཞིན་འོད་གསལ་དྲི་མེད་རྣམས་ཀྱང་ནི། །གློ་བུར་བར་ནི་རྣམ་པར་གཟིགས་གྱུར་ནས།
།རིན་ཆེན་འབྱུང་གནས་ལྟ་བུའི་འགྲོ་བ་རྣམས། །སྒྲིབ་པ་དག་ལས་སྦྱོང་མཛད་བྱང་ཆུབ་མཆོག
"자성광명(自性光明)의 무구(無垢)함과"라고 하였다. 1.124에서 흙으로 가려진 안에 금을 녹인 것이 있다고 하였는데, 흙 안의 금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빛나고 염오가 없이 무구(無垢)한 심자성(心自性)이다. 그러나 이 자성광명은 "객진(客塵)을 관찰하고서"라고 하였듯이, 객진(客塵)의 염오로 덮여 있다.
위에서 거듭 설명하였듯이, 허공에 구름이 가득할 수 있으나 허공 자체는 구름에 가려지지 않는다. 물이 흙탕물이 될 수 있지만, 물의 자성 자체는 더러워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흙을 걸러내면 물을 정화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심자성은 염오가 덮을 수 있으나, 본질적으로 염오에 의해 덮여 있는 것은 아니다.
"보석의 원천과 같은 중생들을 장애들로부터 정화하는 것이, 무상각(無上覺)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중생들이 부처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기에 보석이 나오는 원천과도 같기 때문이다. 정등각 부처는 이러한 보석의 원천을 덮고 있는 염오가 단지 객진(客塵)일 뿐임을 알아보고, 중생들이 그것을 제거하여 마침내 부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도록 인도한다.
학생 : 부처님은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고 부처가 되셨다고 합니다. 지금 설명하는 심자성(心自性)을 깨달으셨다고 이해하면 될까요?
켄뽀 : 그렇다. 깨달음에 해당하는 티베트어는 똑(rtogs, 證得)이다. 이것은 어떠한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깨달음이란 모든 분별망상이 그친 상태를 뜻할 뿐, 깨달음의 대상과 깨닫는 주체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다만 설명할 때는 불가피하게 나누어서 설명할 수밖에 없다.
마치 무구(無垢)하고 빛나는 금으로 만든 상(像)이 흙 안에 있는데
적정(寂靜)한 그 자성을 전문가가 알고서 흙을 제거하듯이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은 맑은 금과 같은 적정(寂靜)한 마음을 아시고서
설법이라는 방식으로 타격함으로써 장애들을 제거한다. [1.126]
།ཇི་ལྟར་དྲི་མེད་གསེར་འབར་ལས་བྱས་ས་ཡི་ནང་དུ་ཆུད་གྱུར་གཟུགས།
།ཞི་དེ་རང་བཞིན་མཁས་པས་རིག་ནས་ས་དག་སེལ་བར་བྱེད་པར་ལྟར།
།དེ་བཞིན་ཀུན་མཁྱེན་དག་པའི་གསེར་འདྲ་ཞི་བའི་ཡིད་ནི་མཁྱེན་གྱུར་ནས།
།ཆོས་འཆད་ཚུལ་གྱིས་བརྡེག་སྤྱད་སྒྲུབ་པས་སྒྲིབ་པ་དག་ནི་སེལ་བར་མཛད།
산스크리트어본(E. H. Johnston, DSBC본)에는 티베트어본의 1.126의 2행에 있는 '적정한 그 자성(Tib, zhi de rang bzhing)'에 해당하는 구절은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는 티베트어본을 따른다.
1.126에서는 1.124의 비유와 1.125의 내용을 통합하여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마치 무구(無垢)하고 빛나는 금으로 만든 상(像)이 흙 안에 있는데, 적정(寂靜)한 그 자성을 전문가가 알고서 흙을 제거하듯이"라고 하였다. 이는 매우 맑고 찬란하게 빛나는 금의 상이 흙 덮개 안에 감춰져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상은 우리가 접하기만 해도 마음이 평화롭고 고요해지는 '적정(寂靜, Tib. zhi ba)'한 본성을 지닌 형상이다.
이러한 적정한 자성을 지닌 것이 내재해 있음을 전문가(智者, Tib. mkas pa) 또는 보석 전문가(Skt. ratna-kuśala, skillful jeweler)가 알아보고, 그것을 가리고 있는 외부의 흙을 제거한다.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은 맑은 금과 같은 적정(寂靜)한 마음을 아시고서"라고 하였다. 여기서 모든 것을 아시는 분(Tib. kun mkhyen, Skt. sarva-vid)이란 부처를 의미한다. 부처는 맑은 금과 같이 적정(寂靜)한 마음(Tib. zhi ba'i yid)이 모든 유정(有情)들의 심상속(心相續) 안에 본래부터 내재해 있음을 알아보신다.
"설법이라는 방식으로 타격함으로써 장애들을 제거한다."라고 하였다. 장인이 흙을 제거하고자 때리고 닦아내는 등의 여러 가지 행위를 하듯이, 부처께서는 법을 설하심으로써 중생의 마음 흐름에 있는 객진의 염오를 제거하신다.
연꽃, 꿀벌 벌레와
껍질 그리고 부정한 것, 땅 속,
씨앗껍질, 더러운 천, 여인의
태(胎), 흙으로 된 덮개와 같고 [1.127]
།པདྨ་སྲོག་ཆགས་བུང་བ་དང་། །སྦུན་པ་དང་ནི་མི་གཙང་ས།
།འབྲས་ཤུན་གོས་ཧྲུལ་བུད་མེད་ཀྱི། །མངལ་དང་ས་ཡི་སྦུབས་ན་ཡང་།
부처, 꿀, 낟알과 같고
금과 보고(寶庫)와 보물나무와 같고
보석상, 전륜왕과 같으며
금상(金像)과 같다. [1.128]
།སངས་རྒྱས་སྦྲང་རྩི་སྙིང་པོ་བཞིན། །གསེར་བཞིན་གཏེར་བཞིན་ལྗོན་པ་བཞིན།
།རིན་ཆེན་སྐུ་དང་འཁོར་ལོ་ཡིས། །བསྒྱུར་བ་བཞིན་དང་གསེར་གཟུགས་བཞིན།
1.127과 1.128에서는 이때까지 제시했던 9가지 비유를 요약하여 다시 설명한다. 1.127의 9가지 비유는 유정(有情)들의 마음의 흐름에 있는 객진(客塵)의 업과 번뇌의 장애와 같다. 그리고 1.128에 나오는 9가지 비유는 내재하는 여래장(如來藏)·심자성(心自性)을 가리킨다.
유정계(有情界)의 번뇌의 고치는
연결되어 있지 않으며 시작이 없지만
심자성(心自性)은 무구(無垢)하기에
시작이 없다고 말해진다. [1.129]
།སེམས་ཅན་ཁམས་ཀྱི་ཉོན་མོངས་སྦུབས། །མ་འབྲེལ་ཐོག་མ་མེད་པ་ན།
།སེམས་ཀྱི་རང་བཞིན་དྲི་མེད་ནི། །ཐོག་མ་མེད་པ་ཡིན་པར་བརྗོད།
"유정계(有情界)의 번뇌의 고치는 연결되어 있지 않으며 무시(無始)이지만"라고 하였다. 유정(有情)의 계(界) 즉 여래장(如來藏)은 어디에 있는가? 번뇌의 고치(Tib. sbubs, Skt. kośa) 안에 머물고 있다. 비록 번뇌의 안에 머물지만, 중생의 심자성(心自性)•여래장은 번뇌와는 연결되어 있지 않다.(Tib. ma 'brel, Skt. asaṃbaddha) 즉 번뇌와는 무관하다. 만약 연결되어있고 관련이 있다면, 하나가 있으면 나머지 하나도 반드시 있을 것이고, 하나가 없으면 나머지 하나도 없어야 한다.
티베트어본 데게판의 1.129의 2행은 thog ma med pa na로 되어있고, 미팜 린뽀체의 주석에도 이렇게 인용되어 있다. 미팜 린뽀체의 주석에서는 티베트어 'na'를 '그럼에도 불구하고(Tib. de lta ying na yang)'의 의미로 생각하여, '번뇌의 고치들도 시작이 없지만'이라는 뉘앙스로 해석하였다. 그런데 잠곤꽁뚤 석에는 thog ma med pa nas라고 되어있고, 괴 로짜와 숀누뺄의 주석에도 'thog ma med pa nas'로 인용되어 있다. 여기서는 데게판 원문과 미팜 린뽀체의 인용을 따랐다.
잠곤꽁뚤석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유정계(有情界, Tib. sems can khams)의 진여(眞如)를 장애하는 번뇌의 고치는 자성적인 존재와 무관하므로 객진(客塵)이다. 그러나 법계(法界)와 동시에 '무시이래로(thog ma med pa nas)' 가까이 있어왔던 것이기도 하다. 그것들이 있는 그곳에, 유정(有情)의 심자성(心自性)인 여래장(如來藏)이 무시이래로 무구(無垢)하며, 구생지(俱生智, Tib. lhan cig skyes pa'i ye shes)가 무시이래로 가깝게 있다고 한다." 해석에는 큰 차이가 없다.
이어서 본송에서 "심자성(心自性)은 무구(無垢)하기에 시작이 없다고 말해진다."라고 하였다. 심자성이 언제 시작되었느냐고 묻는다면 시작은 없다. 염오(染汚)는 객진(客塵)으로 생겨난 것이므로 제거할 수 있지만, 심자성은 변화됨도 없어짐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