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사의한 복덕

(삽화 정윤경)
아난다는 휴식이 끝나자 다시 암송을 시작하려고 했다. 이미 많은 장로들이 칠엽굴로 들어와 자기 자리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어떤 장로들은 벌써 입정 중이었다. 그러나 그때 수부띠 장로가 손을 들었다. 아난다는 그에게 다가가 무슨 일인지를 물었다.
“수부띠 장로시여,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마하깟사빠 장로가 보이지 않소.”
“아, 제가 실수할 뻔했습니다. 마하깟사빠 장로가 계시지 않으니 암송을 할 수는 없습니다.”
5백 명 장로 중에서도 마하깟사빠는 암송하는 내용을 증명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장로들이 정한 규칙이 아니라 이미 붓다께서 생전에 당부한 것이었다. 붓다가 설법할 때 마하깟사빠를 불러 구족계를 받은 순서와 상관없이 승가를 이끌어가도록 당부했던 것이다.
장로들은 마하깟사빠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시간이 길어지자 뒷자리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났다. 마하깟사빠의 허물이므로 당연했다. 구족계를 받은 순서로 따지자면 마하깟사빠는 앗사지보다 한참 뒤였던 것이다. 이윽고 마하깟사빠가 땀을 뻘뻘 흘리며 허둥지둥 칠엽굴 안으로 들어왔다. 수부띠가 말했다.
“벗이여, 모두를 기다리게 하였으니 참회하십시오.”
“참회해야지요. 결집을 하자고 제안한 내가 늦었으니 참회해야지요.”
마하깟사빠가 무릎을 꿇고 엎드려 세 번 절했다. 그제야 수부띠가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참회는 됐습니다. 벗들이 암송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오.”
수부띠가 마하깟사빠의 일탈을 그 정도에서 마무리했다. 이에 아난다는 수부띠를 한 번 쳐다보고는 기원정사에서 스승 붓다가 설한 <금강경>을 다시 암송하기 시작했다.
<스승 붓다가 말했다.
“수부띠여, 이 법문은 불가사의하고, 비교할 바가 없다.
수부띠여, 여래는 이 법문은 으뜸수레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을 위하고,
가장 뛰어난 수레(大乘)를 향하는 사람들을 위해 설하였다.
어떤 사람들이 이 법문을 들어서 기억하고, 외우고,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들려주게 될 것이니라.”>
아난다는 스승 붓다가 왜 ‘불가사의하고, 비교할 바가 없다.’고 했는지 수다원 차원에서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강가 강의 모래알만큼 몸을 바치는 보시를 무량 겁 동안 했더라도, 왜 <금강경>의 가르침을 듣고 믿음을 내어 수지 독송 하는 복덕이 더 크고 뛰어나다고 하는지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아난다는 ‘으뜸수레’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적진을 돌파하려고 최전선에 포진한 기능이 탁월한 수레가 그것이었다. 그리고 수레란 아라한 입장에서 보살 차원으로 건너가려고 하는 방편이었다. 수레 중에서 탁월한 기능을 가진 ‘가장 뛰어난 수레’ 역시 마찬가지였다. 즉 그것도 소승에서 대승으로 건너가기 위한 방편의 수레였다.
따라서 <금강경>의 법문을 듣고 혼자만 믿음을 내는 것이 아니라 구도자인 ‘어떤 사람들’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전파해야 할 것이라는 말씀은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다른 말씀이자 보살의 행동 지침이 틀림없었다.
<“수부띠여, 여래는 깨달은 사람의 지혜로 그들을 보고 있다.
수부띠여, 여래는 깨달은 사람의 눈으로 그들을 보고 있다.
수부띠여, 그들은 여래에 의해 깨닫게 될 것이고,
측량할 수 없는 복덕을 쌓게 될 것이다.
불가사의하고, 비교할 바 없고, 한없이 무량한 복덕을 쌓게 될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불가사의하고, 비교할 바 없는 복덕 내지는 공덕일까. 강가 강의 모래알만큼 몸을 보시하는 것보다 더 큰 복덕은 무엇일까. 아난다는 장로들을 따라서 칠엽굴에 들어오려고 했을 때 마하깟사빠에게 출입을 거부당하고 나서, 마침내 스스로 아라한이 된 뒤에야 깨달았던 것이다. 불가사의한 복덕이란 모든 집착이 사라진 무아가 됐을 때만이 가질 수 있었다. 왜냐하면 복덕이란 복덕이 아니고, 이름만 복덕이기 때문이었다. 실체가 없는 복덕을 참된 복덕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아를 깨닫고 이룰 때만이 참된 복덕인 것이었다.
<“수부띠여, 그런 모든 사람들은 육신을 지닌 채 깨달음을 이룰 것이니라.
왜냐하면 이 법문이란 얕은 믿음을 지닌 사람들은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에 대해 집착하는 견해를 가진 사람,
살아 있는 것에 대해 집착하는 견해를 지닌 사람,
개인에 대해 집착하는 견해를 지닌 사람들은 들을 수가 없는 까닭이다.
구도자가 되겠다고 서원을 세우지 않은 사람들은
이 법문을 듣고, 받아들이고, 기억하고 외우고,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 경우는 있을 수 없느니라.”>
실체가 없는 ‘자아’ ‘살아 있는 것’ ‘개아(個我; 윤회하는 인격주체)’ 등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깨달음을 이루지 못할 것이 자명했다. 구도자(보살)가 되겠다고 서원을 세우지 않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아가 있다는 아상(我相)에 집착하는 사람, 개아가 있다는 인상(人相)에 집착하는 사람, 유무정 중생이 있다는 중생상(衆生相)에 집착하는 사람, 영혼이 있다는 수자상(壽者相)에 집착하는 사람 등은 결코 <금강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보살이 될 수 없을 터였다.
<“그러나 다시 수부띠여,
실로 어떠한 지방에서든 이 경전이 설해지는 지방은
천상의 존재와 인간과 아수라를 포함하는 세계가 공양하게 될 것이다.
그 지방은 오른쪽으로 돌면서 예배받는 지방이 될 것이며,
그 지방은 탑묘가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이 대목에서 아난다는 오른쪽 옆구리가 붓다를 향한 채 그 주위를 세 번 돌곤 했던 일이 떠올랐다. 이는 군대가 적을 이기고 돌아왔을 때는 반드시 성벽 주위를 오른쪽에서 세 번을 돌고 성 안으로 들어왔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군대의 전통은 그대로 승가에도 전해져 존경의 뜻을 표하는 예법이 되었던 것이다.
아난다는 5백 명 장로들이 추인해 주는 합송을 듣고 나서 다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 마하깟사빠를 찾아가 물었다.
“깟사빠 장로시여, 라자가하를 다녀오신 것입니까?”
“맞소. 붓다를 처음 만났던 곳을 다녀왔소.”
“그랬군요.”
“그 니그로다나무 그늘에 지금도 붓다께서 앉아 계실 것만 같았소.”
“아, 그러셨군요. 스승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스승께서 니그로다나무 그늘에 계실 때 눈부신 빛이 났소. 나는 그 빛을 잊을 수가 없소. 지나가는 사람들도 그 빛을 보고 모두 놀랐다오.”
그것은 사실이었다. 마하깟사빠는 그 빛에 이끌려 “당신은 저의 스승이십니다.” 하고 말하며 붓다 앞에 바로 엎드렸던 것이다. 그러자 붓다는 마하깟사빠를 “가까이 오라. 니그로다나무 아래에서 그대가 오기를 기다렸느니라.” 하면서 놀랍게도 제자로 받아주었는데, 그때 한 붓다의 말은 마하깟사빠 이마에 내리치는 벼락같았던 것이다.
“아는 척하거나 본 척하는 거짓된 스승이 그대처럼 진실한 마음을 가진 사람의 예배를 받는다면 그의 머리는 일곱 조각으로 깨어질 것이다. 나는 모르면서 아는 척하거나 보지 못했으면서 본 척하는 사람이 아니다. 보아라, 그대의 예배를 받고도 터럭 하나조차 움직이지 않는다. 사실대로 알고 사실대로 보았기에 알고 본다고 말하는 나는 그대의 예배를 받을 자격이 있다. 그렇다. 나는 그대의 스승이고 그대는 나의 제자다.”
아난다는 마하깟사빠가 왜 그 니그로다나무를 찾아갔는지 이해했다. 입장이 바뀐다면 자신이라도 그럴 것 같았다. 마하깟사빠는 붓다를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처음 만나는 마하깟사빠에게 했다는 “나는 그대의 스승이고 그대는 나의 제자다”라는 붓다의 말은 여여(如如)한 진실일 뿐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