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의 누이,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왕비, 문무왕의 어머니
정진원(튀르키예 국립 에르지예스대학교 한국학과)
명랑소녀 문희 문명왕후의 노래
나는 말이지
둘째 딸이야
언니 보희는 아해라는 이름의 맏이답게 조신하고 우아했지만
결정적인 인생의 기회를 결국 나에게 내주었지
동생 아지로 자란 나는
망아지 송아지처럼 귀엽고 당찬 소녀였어
유신 오빠가 신라와 하나가 되겠다
청운의 푸른 꿈을 꾸며 짐짓 춘추의 옷고름을 밟던 그날이었어
언니 보희와 나의 운명은 뒤바뀌었지
이미 내 아끼는 비단치마를 언니에게 주고 산
보희의 신라를 집어삼킨 오줌 꿈은 이제 나의 것
그 꿈이 장차 신라의 왕이 될 춘추와 역사를 이루는 일이었음을
나는야 진작에 알아차렸지
내가 누구야
명랑하고 지혜로운 아지 아기씨 문희 낭자
연하게 화장하고 샤랄라 얼핏설핏 내 매력을 드러내는 차림새로
춘추와 마주 앉아 그의 옷고름 꿰매며 그의 마음도 꿰어버렸네
나의 향기와 매혹에
스며라! 배암
그렇게 화사한 역사 속에 잉태된 나의 아들 법민
쾌재라!
이제 신라 안에 가야 있고 가야 안에 신라 있네
유부남이었던 춘추 망설이는 모습을 보고
오빠 유신 연기 피워 우리 일 선덕여왕께 일러바쳤네
그렇게 맺어진 신라와 가야의 백년가약
아니 천년가약의 초석이 된 나의 낭군 김춘추
진지왕의 손자, 선덕여왕의 조카로 성골이 분명 하나
할아버지 폐위로 왕이 될 수 없는 신분
우리는 망국의 후예 무늬만 진골인 가야김씨
오빠 유신과 남편 춘추 의기투합에
나의 아들 문무왕이 드디어 삼국을 통일하네
언니는 땅을 치고 후회하며 독신으로 늙어 가네
내 비단치마에 눈이 멀었던 인고의 세월
언니 보희 계비로 맞아들이네
그러나 정식 왕후는 오직 나 문명왕후
훈제부인 김문희 어릴 적 명랑소녀 아지뿐이라네
그리하여 목숨 걸고 삼국을 통일한 두 사나이
나의 아들 김법민 신라가야의 합체로 태어나
고구려 백제 아우른 문무왕이 되었네
결정적 쐐기는
나의 딸 지소, 오빠 유신의 둘째 부인이 되어
신라가야 이중 삼중 겹사돈 혈연으로 매듭지어
죽어도 이 인연 풀지 못하리
나 아지, 문희, 문명왕후, 훈제부인
가야왕자 김서현과 신라공주 만명의 딸 아지로 태어나
오빠의 야심 찬 혼사프로젝트에 문희로 가담하고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왕비 문명왕후가 되었네
가야신라 왕자 법민 문무왕의 어머니로
가야신라 공주 지소, 오빠 유신에게 시집보내
천하를 내 손으로 거머쥐었네
(사진디자인=미디어붓다)
아지 시절의 문희(文姬)
우리나라 여성은 이름을 가진 지 얼마나 되었을까. 세상에 이름이 없는 사물이 있을까. 이름이 없어 보이는 길가의 풀꽃도 알고 보면 다 이름이 있고 무정물이라 생각되는 집이나 물건조차 이름이 있고 하다못해 바코드라는 정체성이 있다. 조선시대 족보에 여성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기록이 되어 있지 않을 뿐 그들도 누군가에게는 꽃이 되고 의미가 되는 이름이 있었다.
신라시대 우리가 살펴볼 주인공 통일신라 첫 왕비 문명황후 김문희도 또한 그러하였다.
자칫 오라버니 김유신, 남편 김춘추 태종 무열왕, 아들 김법민 문무왕에 가려 그 존재가 상대적으로 묻힐 수도 있었지만 눈 밝은 이들이라면 이 걸출한 통일신라의 주역 3인방을 물보다 진한 피로 묶었던 이는 바로 어린 시절의 이름 ‘아지’가 있었던 덕분이다.
개괄적인 삼국유사의 간략 스토리부터 살펴보자.
<김유신>조에서는 서현과 만명 사이에 유신, 흠순, 보희, 문희 사남매를 두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언니 보희의 아명이 ‘아해’이고 동생 문희의 아명이 ‘아지’로 불리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최근까지도 우리 어머니 세대나 할머니 세대 이름 중 ‘아기, 간난, 아지’ 등이 드물지 않았다. 언니 보희는 ‘아지’보다 큰 ‘아해’ 곧 아이의 뜻으로, 동생은 어린 아기의 이칭인 ‘아지’로 오랜 이름 역사의 화석을 보여 주고 있는 것 같다. 지금도 ‘아지’는 그 흔적으로 ‘송아지, 강아지’ 등 갓 태어나 어릴 때 작은 모습을 지칭하는 동물의 접사로 남아있는 것이다.
무력(虎力) 이간(伊干)의 아들 서현각간(舒玄角干) 김(金)씨의 맏아들이 유신(庾信)이고 그 아우는 흠순(欽純)이다. 맏누이는 보희(寶姬)로서 소명(小名)은 아해(阿海)이며, 누이동생은 문희(文姬)로서 소명이 아지(阿之)이다.
자연스러운 화장과 가벼운 옷차림, 빛나고 자태가 눈부셨던 처녀 문희
그리고 <29대 태종 춘추공>조에 김유신의 야심찬 프로젝트 ‘춘추와 문희’의 결혼 전말기가 실려 있다.
정월 오기일(午忌日)에 유신(庾信)이 춘추공과 함께 유신의 집 앞에서 공을 찼다. 이때 유신은 일부러 춘추의 옷을 밟아서 옷고름을 떨어뜨리게 하고 말하기를 "내 집에 들어가서 꿰매도록 합시다"하니 춘추공은 그 말을 따랐다.
유신이 아해(보희)를 보고 옷을 꿰매 드리라 하니 아해는 말한다. "어찌 그런 사소한 일로 해서 가벼이 귀공자와 가까이한단 말입니까"하고 사양했다(古本에는 병 때문에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이에 유신은 아지(阿之)에게 이것을 명했다.
이에 대하여 ‘삼국사기’에는 이때의 정황을 좀 더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보희의 꿈에 나오는 ‘서악(西岳)’을 ‘서형산(西兄山)’으로 구체적으로 이름을 밝히고, 역사적 사실을 간략하게 서술하는 것과 달리 삼국사기에서는 관련 정황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두 텍스트는 이와 같이 상보적 관계를 이룬다. 특히 문희의 용모와 맵시에 치중하여 표현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유신은 주연을 베풀고 조용히 보희를 불러 바늘과 실을 가지고 와서 옷을 꿰매도록 하였다. 그러나 맏누이 보희는 일이 있어 나오지 못하고, 동생이 앞에 나와 옷고름을 달았다. 그녀의 자연스러운 화장과 가벼운 옷차림, 빛나는 자태가 눈부셨다(淡粧輕服, 光艶炤人).
문무왕을 혼전 임신한 문희와 오빠 유신의 멋진 한 판 승부
가야 왕실의 후손인 유신과 문희, 그리고 할아버지 진지왕의 폐위로 성골에서 진골로 강등된 김춘추는 같은 ‘진골’이었다. 그러나 신라 김씨 진골 김춘추와 가야 김씨 진골 김춘추는 격이 달랐다. 유신의 아버지 김서현과 신라 왕족 어머니 만명부인의 결혼을 성골인 만명의 부모는 인정하지 않았고 결사반대하여 유신은 결국 충청북도 진천에서 태어나게 되는 히스토리가 전하기 때문이다. 신라 시대의 골품은 이렇게나 중요한 것이었다.
신라에 복속된 가야계 김유신 일가는 신라 주류 편입이 절실하였다. 그 배포가 맞았던 게 유신과 둘째 여동생 문희였던 것이다.
선덕여왕이 허락한 김춘추와 문희의 결혼
‘삼국유사’에는 유신의 계획대로 벌어진 사건에 대하여 짐짓 문희의 임신 사실을 꾸짖고 문희를 화형대까지 오르게 해 선덕여왕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그리고 춘추를 다그쳐 결혼에 이르게 하는 극단적인 퍼포먼스를 실행하고 있다.
어느 날 선덕왕(善德王)이 남산(南山)에 거동한 틈을 타서 유신은 마당 가운데 나무를 쌓아 놓고 불을 질렀다. 연기가 일어나자 왕이 바라보고 무슨 연기냐고 물으니, 좌우에서 아뢰기를, "유신이 누이동생을 불태워 죽이는 것인가 봅니다" 했다.
왕이 그 까닭을 물으니, 그 누이동생이 남편도 없이 임신한 때문이라고 했다. 왕이 "그게 누구의 소행이냐"라고 물었다.
이때 춘추공은 왕을 모시고 앞에 있다가 얼굴빛이 몹시 변했다. 왕은 말한다. "그것은 네가 한 짓이니 빨리 가서 구하도록 하라."
춘추공은 명령을 받고 말을 달려 왕명(王命)을 전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고 그 후에 혼례를 올렸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화랑세기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른 상황이 나타난다. ‘삼국사기’의 내용을 보자. 여기서는 이러한 급박했던 전후좌우 상황이 모두 빠져있고 곧바로 순탄하게 결혼을 해 문무왕이 되는 태자 법민을 낳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화랑세기’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여기서는 김춘추가 문희를 사랑하고 임신까지 하게 되었으나 곧바로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는 연유가 실려 있다. 김춘추는 이미 유부남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신라의 세 왕을 모신 막강 권력자 미실의 손녀 보라궁주와 결혼을 한 상황이었다. 또 그 사이에 지극히 사랑하는 딸 고타소가 있었기 때문에 비밀로 했다는 사실까지 기록하고 있다. ‘화랑세기’에는 결혼을 했으나 보라궁주가 아이를 낳다 죽고 나서야 정궁이 된 문희의 스토리가 실려 있다.
가야김씨 진골과 신라김씨 진골의 결합으로 이룬 통일신라 문명황후가 된 문희
이렇게 김춘추 태종무열왕의 정식 황후가 된 김문희로 인하여 신라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이제 이들은 가장 훌륭한 파트너십을 처남과 매부라는 혈연으로 공고히 하였다. 김춘추가 고구려에 군사를 청하러 가면 김유신이 그 배후를 지키고 백제를 함께 멸망시키고 나당연합군을 성사시켜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통일 신라를 이룩한 일심동체가 되었다.
이 두 사람을 사돈으로 묶은 ‘가야 신라 동맹’을 성공시킨 문명황후는 이것으로 임무를 마쳤을까. 문희와 춘추에게는 두 아들 법민과 인문, 고타소와 지소라는 딸이 있었다.
법민은 아버지 무열왕이 못 다 이룬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하였으며 김인문 또한 외삼촌 유신과 형을 도와 당나라 사신과 볼모 역할을 하며 아들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고타소는 품석과 결혼하였으나 백제와의 대야성 전투에서 목숨을 잃자 아버지 춘추가 백제를 멸망시키는 직접적인 전기를 마련한다. 지소는 외삼촌 김유신의 두 번째 부인으로 원술랑을 낳았다.
21세기형 우바이 문명황후, 훈제부인
어린 아기 ‘아지’에서 ‘문희(文姬)’라는 이름으로 언니 보희의 꿈을 사서 통일신라의 왕비에 오르는 전략가 문명황후.
우바이의 뜻을 살펴보면 산스크리트 우파시카(upasika)를 음역한 것으로 청신녀(淸信女)라는 뜻이다. 《우바이정행법문》에는 우바이가 지켜야 할 덕목으로 착한 벗을 따르고 잘 섬길 것, 부모와 남편에게 잘하고 자식을 잘 돌볼 것, 고통스러운 이에게 자비심을 베풀 것 등의 생활윤리가 나온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자기의 재능을 잘 활용하고 그 대의를 위해 인생을 걸어가는 일 이것이 우바이가 할 일이다. 선한 벗(善友)이기도 한 오빠 김유신의 뜻을 따르고 남편과 아들이 통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전심전력한 문희가 있었기에 가야와 신라의 통합에서 나아가 백제, 고구려, 당나라를 물리친 우바새들의 통일신라를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