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함과 아라한
(삽화 정윤경)
5백 장로들의 공양이 일제히 끝날 즈음 마하셋티 까란따 가족들이 짜이를 한 잔씩 돌렸다. 홍차에 우유와 사탕수수즙이 섞인 짜이는 달달하고 따뜻했다. 식은 짜이는 목을 넘어갈 때 부드럽지 않았으므로 5백 장로들은 더운 날씨였지만 따뜻한 짜이를 원했다. 수부띠가 짜이를 마시는 아난다를 보고 웃었다. 아난다는 짜이를 마시다가 말고 수부띠에게 다가갔다. 수부띠가 말했다.
“좀 전에 마하깟사빠 벗과 나눈 이야기를 들었소.”
“예, 사형이 마하셋티 까란따 가족이 올리는 공양물을 보고 동굴 안으로 들어가셨는데 제가 오해를 좀 했습니다.”
“마하깟사빠 사형이 동굴로 들어온 것은 내가 상의할 것이 있어서 불렀기 때문이었소.”
“저는 그것도 모르고 오해했습니다.”
아난다는 그때 마하깟사빠와 대화하면서 오해가 해소되었지만 왜 수부띠가 그를 불렀는지는 알지 못했다.
“수부띠 사형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요?”
“기원정사 시절에 들었던 스승님의 말씀 중에 아나함의 경지를 마하깟사빠 사형께 물었지요.”
“그 부분은 공양이 끝나고 나면 제가 암송하려고 했던 스승님의 말씀이지요.”
“벗이여, 맞아요. 그런데 나는 참을 수 없었소. 왜 그 순간 그 부분을 확인하고 싶었는지 말이오. 아마도 사다함과 아나함의 경계가 모호해서 그랬는지 모르겠소.”
“사실 저도 확실하게는 몰랐습니다. 깨달음의 길에 들어선 뒤 깨달음이 깊어지고 있는데, 왜 다시 한번 인간 세상에 태어나야 사다함 경지에 이른다는 것인지 말입니다.”
“벗이여, 다시 한번 인간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깨달음이 더 깊어진 삶’이 되어야 한다는, 자신이 세상과 다른 개체라는 족쇄에서 벗어난 자비가 충만한 삶으로 이해가 되기도 하오만.”
“사형이시여, 짜이를 마시고 나면 스승님이 말씀하신 아나함과 아라한의 경지를 암송할 차례입니다. 제 암송이 끝나고 나서 이의가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지요.”
“좋소.”
잠시 후. 5백 장로들이 짜이를 다 마시고 나자, 아난다는 다시 암송을 시작했다. 어느새 5백 장로들도 언제 공양을 하고 짜이를 마셨는가 싶게 오전의 자세 그대로 아난다의 입을 주시했다.
<스승 붓다께서 물으셨다.
“수부띠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제 결코 다시 태어나 오지 않는 자(아나함)’가
‘나는 이제 다시 태어나 오지 않는 자라는 성과에 도달했다’라고 생각할까?”
수부띠가 대답했다.
“스승이시여, 그러한 일은 없습니다.
이제는 결코 다시 태어나 돌아오지 않는 자가
‘나는 이제 결코 다시 태어나 돌아오지 않는 자라는 성과에 도달했다’라고
생각할 까닭이 없습니다.
스승이시여, 실로 이제 결코 다시 태어나 돌아오지 않는 자가 있다고
할지언정 그 어떤 법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결코 다시 태어나 돌아오지 않는 자’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기원정사 시절 아난다는 두 가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는 ‘이제 결코 다시 태어나 돌아오지 않는 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어서 장로들에게 물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수부띠는 ‘다시는 욕계에 태어나지 않는 경지’라고 답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난다는 이제 수부띠의 말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사다함에서 아나함이 된 자는 윤회하면서 욕계로 생을 받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내생에 욕심으로 휘둘리는 물질세계인 욕계(欲界)에는 결코 환생하지 않고, 지혜로 보고 듣는 지각세계인 색계(色界)나 속박을 벗어난 천상세계인 무색계(無色界)에 태어날 뿐이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 돌아오지 않는 자’라고 붓다께서 설했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이제 결코 돌아오지 않는 자’가 왜 ‘나는 이제 결코 돌아오지 않는 자라는 성과에 도달했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일까 하는 점이었다. 이 역시 수부띠가 자애롭게 설명해 주었다. ‘이제 결코 다시 태어나 돌아오지 않는 자’에게 ‘나’가 있는 것과 무아의 차이였다. ‘나’가 있다고 생각하면 아나함의 경지가 아니고, 무아가 되어야만 아나함의 경지인 것이었다. 무아의 경지여야만 그는 ‘이제 결코 다시 태어나 돌아오지 않는 자’라고 불릴 수 있음이었다.
따라서 누군가가 스스로 ‘나는 이제 결코 다시 태어나 돌아오지 않는 자’라고 생각을 일으킨다면 그는 ‘나’라는 존재에 집착하고 있으므로, 무아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아나함이라고 할 수 없는 이치였다.
<스승 붓다께서 물으셨다.
“수부띠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존경받을 만한 사람(아라한)’이
‘나는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할까?”
수부띠가 대답했다.
“스승이시여, 그러한 일은 없습니다.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
‘나는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 되었다’라고 생각할 까닭이 없습니다.
스승이시여, 실로 ‘존경받을 만하다’라고
불리어질 그 어떤 법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스승이시여, 만약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
‘나는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에게는 자아에 대한 집착,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집착,
개체에 대한 집착, 개인에 대한 집착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원정사 시절, 집착의 문제 역시 수부띠는 아난다에게 명쾌하게 이해시켜 준 적이 있었다. ‘나는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한다면, 모든 현실존재가 본질적으로 공(空)한 것인데도 자아가 있는 것처럼 집착하고, 생명이란 존재 상태에 집착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성(空性)을 통찰해서 ‘나’가 사라져 버렸다면, 무아가 되었다면 아라한 즉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불릴 수밖에 없음이었다.
역시 기원정사 시절, 수부띠가 아난다에게 말해준 아라한은 아나함과 또 달랐다. 아라한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은 색계와 무색계의 환생을 영원히 끊었으므로 다시는 윤회하지 않는 지위에 오른 상태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아라한은 ‘나’라는 허상이 완벽하게 사라져 버린 해탈의 깨달은 상태를 뜻했다.
아난다는 5백 장로들이 합송 하기를 기다렸다. 모두가 합송 할 뿐 아난다의 기억이 틀렸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장로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 칠엽굴 안으로 청량한 바람 한 줄기가 불어왔다. 아난다는 텅 빈 충만을 느꼈다. ‘나’가 사라져 버린 내면에 청량한 바람처럼 온전한 평안이 들어찼다. 온전한 평안 속에는 한 점 욕망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난다는 수부띠의 눈에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자’로 보였다. 그러니 아난다도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 분명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