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적사 (2)
수원사람 김성채 객원기자
자연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종무소
마당에 은행나무가 두 그루 서 있습니다. 좌우에서 마주한 두 그루 은행나무를 배경으로 삼고, 석탑이 주인공이 되는 한 장의 사진을 찍고자 했습니다. 그렇지만 마당의 깊이는 짧고, 나무의 키는 너무나 높아 찍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큰 나무 옆에 종무소가 있습니다.

종무소
몸통 여기저기에 붙은 곁가지를 쳐내고, 껍질만 벗겨내서 살아온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는 굵은 나무가 종무소의 기둥(도량주)이 되었습니다. 안쪽 기둥뿐만이 아니라 툇마루를 만들기 위해 세운 툇기둥도 도량주이고, 지붕의 무게를 받아내는 대들보와 도리도 도량주로 사용했습니다.
여기저기에 박힌 옹이는 크게 자라고 싶은 마음에, 햇빛을 더 많이 받아내려고 가지를 뻗어냈던 흔적입니다. 어떤 옹이는 “확”하니 드러났고, 어떤 옹이는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보입니다. 굵어지는 동안 힘들었음을 보여주는 옹이처럼, 우리가 사바세계를 살아가며 생긴 크고 작은 옹이가 업이 되어 어디엔가 쌓여있을 겁니다.
사각기둥으로 깎아낸 나무로 지은 집에 비해 둥글게 다듬은 나무로 지은 집을 더 예쁜 한옥으로 평가해 주는데, 하물며 도량주로 지은 집은 어떻겠습니까. 값을 떠나서 주변 환경에 딱 어울리고,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에 빠져들게 하는 아름다움에 종무소를 몇 번이나 보고 또 보았습니다.
묘적사를 찾은 날은 부처님 오신 날로부터 며칠 후이어서인지, 찾아온 불자가 드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반쯤 열린 문가에 앉은 삽살개가 ‘며칠 전에는 북적이더니 오늘은 왜 이리 조용한가?’하는 얼굴로 불자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주고 싶은
종무소 옆에는 무덤 앞에 세우는 문인석 2기가 서 있습니다.
문인석과 표지석 (양쪽 문인석 사이에 표지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4품 이상 문관으로 종사한 사람의 무덤에 세웠던 문인석을, 언제부터인가 품계가 낮았던 망인의 무덤에도 세웠습니다. 후손들이 자랑스러운 조상이 있음에 으쓱하고, 은근히 뽐내려는 마음이 담긴 장식물로 등장한 것입니다. 무덤에나 있어야 할 문인석이 절 마당에 보란 듯이 세워진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묘적사를 중창 불사하기 전부터 절터 어디엔가 세워져 있었거나, 후손이 끊겨 버려진 무연고 묘지에서 옮겨온 것으로 생각됩니다.
무덤 앞에서 망자를 받들어 주는 석상이 대웅전과 부처님의 사리나 가르침을 담은 경전을 모시는 탑을 향해 있는 것은 정상적이 아닌 듯싶습니다.
문인석의 주인(?)인 망자가 ‘나 이런 사람이었어!’라는 아상에 젖어서 근처를 맴돌고 있거나, 죽었으면서도 ‘이 문인석은 내 것이야’라는 욕심에 갇혀 있을 경우는 ‘어떻게 해주어야 망자가 편해지려나’라는 생각이 났습니다.
어떻게 이곳에 세워지게 됐든지 간에 사찰 마당과는 어울리지 않고, 있던 곳으로 스스로 걸어갈 수도 없으니 누구인가 옮겨 주어야겠습니다.
문인석 사이에 표지석 2개가 있습니다.
표지석에는 “묘음동지(妙音動地)”와 “법해만천(法海漫天)”이라는 글자가 각각 새겨졌습니다.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는 묘한 소리는 온 천지를 진동시키고, 진리의 바다는 하늘까지 넘쳐흐르게 하신다’라는 뜻이지요.

표지석 〔묘음동지(妙音動地). 오른쪽 : 법해만천(法海漫天)〕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이루신 후 45년간 하늘과 땅을 오가며 법문을 펴셨습니다. 부처님의 법문은 묘한 소리로 이루어져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물론이고 근기가 약한 사람까지도 알아들을 수 있어서, 하늘에서 땅까지에 이르는 많은 중생이 생사 해탈의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우리나라의 땅이 좁고 좁아도 산맥과 강으로 나뉘어 사투리가 생겼고, 이런 이유로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함을 보면, 2500년 전에 넓디넓은 인도 땅에서 어려운 진리를 풀어내신 부처님의 음성은 얼마나 묘한 소리였을지 짐작도 되지 않습니다.
표지석의 높이가 1M뿐이 안 되지만 부처님의 무량한 공덕이 하늘까지도 넘쳐났음을 칭송하는 내용일진대, 문인석 옆에 세워놓은 것이 너무나 섭섭해졌습니다.
문인석이 하루라도 빨리 다른 곳으로 옮겨 가거나, 대웅전을 짓는 큰 불사가 끝난 뒤에 표지석이 목 좋은 자리로 옮겨져, 부처님의 자비를 되새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표지석을 지나면 보리수나무가 나옵니다. 보리수나무는 뜨거운 햇볕과 비바람을 막아 부처님을 보호하고, 깊은 선정에 들어 깨달음을 이룰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나무입니다.
수하항마도에는 마왕의 지시를 받은 딸들이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수행하는 싯다르타 태자를 꾀어내기 위해 춤을 추는 모습과 마왕의 군대를 제압하시고 오른손으로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불교를 상징하는 보리수나무가 묘적사에서는 석굴암으로 올라가는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 역할을 합니다.
석굴암을 향하는 짧은 계단 왼쪽에 높은 돌탑을 쌓고, 돌탑꼭대기에는 연화좌에 좌정한 불상을 봉안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바로 아래의 묘적사를 내려다보는 형태로 조성되었지만, 중생들이 살아가고 있는 참고 견디어 내야만 하는 이 세계를 내려다보시는 것입니다.

깊은 선정을 통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신 부처님
마왕의 유혹과 무력의 협박을 이겨내고, 진리를 깨달은 부처님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높은 선정에 들어가십니다. 위로 높아질수록 좁아지는 돌탑은 부처님 선정 수행의 초선에서부터 제4선까지 높아지는 단계를 나타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별이 떠오를 무렵 부처님께서는 일체중생들이 ‘나고 죽는 것이 업보에 따라 일어난 것’을 알지 못함을 살펴 내시고, 어떻게 하면 가엾은 저들에게 생로병사가 인연에 따라 일어남을 알게 할 것인가를 염려하십니다.
미묘한 법을 깨닫기 어려워할 중생들을 향해 ‘내가 본래 중생들을 위해 법륜을 굴리려고 세상에 나왔느니라.’라는 말씀하실 때까지의 많은 갈등을 겪으신 모습이 저렇지 않았을까를 생각했습니다.
또 하나의 산문
살짝 휘 돌아가는 계단 옆으로 조릿대가 우거져서 많이 걸어 올라야 할 것처럼 길어 보입니다. 계단 오름이 끝난 곳에서 낮고 좁은 문이 반겨줍니다.

문은 아무나 쉽게 드나들지 못하게 함인데, 이 문은 문짝을 달지 않아서 드나듦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문이라고 보일 뿐이지, 야단법석이 아니어도 어느 중생이든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활짝 열려있는 문입니다.
문을 맨 돌담도 낮아서 있는 둥 없는 둥 한 것은, 인간과 천인의 공양을 응당히 받을만한 부처님이 계신 불국토임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돌담이 낮기는 하지만 기와지붕을 올리고, 그 위에 적새와 숫마루장을 놓고 용마루를 얹었습니다. 이것도 넓은 사찰 경내에 큰 분을 모실 안채 터를 또다시 구획하여 그분의 품위를 높여드리려 한 것입니다.
석굴암
그 문을 들어서면 석굴암이 보입니다. 안내판이나 현판이 없어 이곳을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지 알 수 없는데, 석굴에 불상을 봉안하였으니 석굴암이 맞을 듯합니다. 석굴이 자연적으로 생성된 동굴에 부처님을 모신 것인지, 부처님을 모시려고 암반을 파내 조성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석굴암에 들어가는 문은 화강암으로 홍예를 틀었고, 비바람을 막아낼 수 있도록 막돌로 벽을 쳤습니다.

불상은 결가부좌에 항마촉지인을 취하신 석가모니부처님으로, 경주 석굴암 본존불상을 본떠 조상하였음을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불상 뒷벽은 화강암을 벽돌처럼 잘라내어 쌓았고, 반원의 테두리에 16개의 감실을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감실마다 화강암으로 조성한 나한상을 봉안하였습니다.
나한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아라한과를 이루어 낸 부처님의 제자입니다. 나고 죽는 윤회에서 벗어났고,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무학(無學)으로 불리는 데, 아라한과를 이루어 낸 이후에는 순회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였습니다.

미루어 생각하건대 부처님과 나한이 한자리에 모인 광경은 각처로 돌아다니던 나한이 부처님의 법문을 듣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을 때의 모양입니다. 이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경전의 시작이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왕사성의 기사굴산 가운데서 큰 비구 대중 1만 2천 인과 함께 계셨다. 이들은 다 아라한으로서‥‥’라고 쓰였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나한에게 ‘수명을 늘여 살면서 무상정등각을 잘 보호해서 끊어짐이 없게 할 것’을 부촉하시며, 복전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석굴암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도록 우리 곁에 머물고 계신 나한님에게 복을 빌고, 큰 과보를 얻게 하려고 조성한 곳입니다.〈다음 회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