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으로 살고 온몸으로 죽어라
정찬주(소설가)
삽화 정윤경
* *
내 장편소설 <아소까대왕>을 서울 출장길에 흥미롭게 읽었다고 알려온 광주고검 조종태 고검장이 이불재를 찾아와 차담을 나누고 갔다. 서울대 국문과 출신인 조 고검장은 내가 도안(道眼)이라고 호를 지어준 인연도 있는 불자이다.
고향이 함안인데, 부인이 초등학교 동창이라고 하니 순정파가 아닐까도 싶다. 부인이 조 고검장의 어머니께 "어머님, 아들을 잘 키우셨어요."하고 말하자, "내가 잘 키운 것이 아니라, 아들이 잘 커주었지."하고 아들을 무한히 신뢰하는 시어머니를 더 사랑하게 됐다는 부인의 이야기도 차담 중에 오갔다.
조 고검장은 7월 중순에 검찰직을 떠나겠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인사차 이불재를 찾아온 것 같다. 검찰의 속 사정은 잘 모르겠으나 균형감각이 있고, 소박한 인품에 비추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사직하기에는 아직 젊은 초로의 나이이기 때문이다. 나는 광주를 떠나는 그에게 <서른부터 다가온 반야심경의 행복>을 선물했다. 반야심경의 ‘집착하지 않기(空)’와 ‘허상을 놓아버리기(無)’가 그의 인생길에 신호등이 되었으면 좋겠다.
* *
초여름의 철학적인 꽃, 능소화가 이불재 사립문을 장엄하게 단장해 주고 있다. 내가 능소화를 철학적인 꽃이라고 화격(花格)을 높인 것은 그 특질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능소화는 폭염이 기승을 부릴수록 주눅이 들기는커녕 더욱더 붉어진다. 불퇴전의 기상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내 삶을 비교하면서 사색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능소화는 질 때도 아름답고 거룩한데, 미련 없이 온몸으로 낙화한다. 아쉬운 듯 멈칫멈칫 뒤돌아보지 않는 것이다. 얼마나 현재완료형의 통쾌한 낙화인가. 내 삶의 생사(生死)도 능소화 같기를 발원해 본다. 원오 극근선사는 온몸으로 살고 온몸으로 죽어라(生也全機現 死也全機現)는 말씀을 남겼다. 초여름에 느끼는 살얼음 같은 말씀이 아닐 수 없다.
* *
2023년 6월 30일 자로 33년의 공직생활을 마친 인담(仁潭) 박형우 선생에게 나는 개인 자격으로 기념패를 만들어 선물했다. 쌍봉사 증현 주지스님, 심안(心眼) 나상규 선생도 자리를 함께하여 덕담을 주고받았다. 기념패 문안은 다음과 같다.
님이 자랑스럽습니다
仁潭 박형우님
이순신 장군의 忠心이 서린 열선루 아래서 태어난 님은
7급 행정직에 합격한 뒤 1991년 1월 보성군청 공무원이 되어
보성군청 자치행정국장직을 끝으로 2023년 6월 30일
군민을 위해 헌신했던 33년 동안의 공직생활을 내려놓습니다.
맑은 물이 오가는 묵묵한 연못과도 같았던 님의 前半生은
가족과 군민을 위해 봉사한 희생과 爲民의 시간이었습니다.
대한민국지역혁신박람회에서 님이 발표한 보성녹차 혁신사례가
채택되어 보성녹차가 전국적인 브랜드로 도약했고, 열선루 중건,
태백산맥 테마파크와 율포 해양레저관광 조성사업 등의 예산을
확보하고자 다방면으로 진력한 것은 공직자의 본보기였습니다.
이제 님은 後半生의 길목에서 또 다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식지 않는 열정과 고향사랑은 님의 인생을 더욱 빛나게 하고,
仁潭의 깊고 너그러운 품은 모든 이들이 흠모하게 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어진 님의 德化가 더욱 널리 드리우기를 기원합니다.
2023년 7월 1일
벽록 무염 정찬주 합장
인담의 아내와 가족, 친인척, 지인들께서 '인담이 어떤 공직자'였는지 새삼 느끼면서 감동하고 존경하지 않을까 싶다. 장마철이어서 비가 오락가락하는데, 마침 금싸라기 같은 햇살이 반짝 비추고 있다. 하늘에서 구름장 사이로 내려온 밝은 빛기둥이 인담의 앞날을 축복해 주고 있는 것 같다.
* *
오전 10시쯤 이병욱 선생이 찾아와서 1시간 남짓 차담을 했다. 차담의 주제는 ‘어떤 글이 좋은 글인가?’였다. 서로 글을 쓰는 처지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런 대화를 했다. 나는 글을 쓸 때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하되 비판의식과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 같다. 중도적 입장을 회색으로 오해할 수도 있기 때문에 나는 중도적 입장을 '부부'란 단어로 비유했다. '부부'란 단어 속에는 男과 女(이념이나 도그마)가 있으되, 또 남과 여를 초월하고 있기 때문. 불교적으로 설명하자면 양극단을 여의되 양극단을 포용한다고 할까.
한편, 소설 <아소까대왕>을 연재할 때 경장과 율장에 이은 제3차 결집(논장 결집) 부분 집필에서 참고할 만한 자료를 보내준 이병욱 선생에게 소설 <아소까대왕>(전3권)을 서명해서 선물했다. 안양에서 이불재까지 승용차로 너댓 시간 달려와 방문했으니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해서 흔쾌하게 선물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소설이란 좌고우면 없이 영화를 보듯 속독하는 게 좋다고 조언(?) 했지만 꼼꼼한 선비형의 이병욱 선생은 평소의 습관대로 밑줄을 그어가며 정독할지, 어떨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