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온 감성으로
정찬주(소설가)
삽화 정윤경
신발에 이슬을 묻히는 부지런한 농부의 눈에만 보인다는 자주달개비꽃. 이른 아침에 수줍게 피었다가 해가 뜨면 자주빛 꽃을 얼른 숨겨버리는 자주달개비. 사춘기 소녀가 웃는 모습 같은데 결코 그 웃음을 헤프게 팔지 않을 것 같은 자존심이 강한 꽃인 듯하다. 나는 오만할 정도로 꺾이지 않는 자주달개비의 고집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나 자기를 사랑하면 그러려니 싶다. 애기애타(愛己愛他). 진실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남도 사랑할 수 있다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말씀이 생각난다.
옥잠화는 꽃이 없는데도 널따란 이파리만으로도 위의(威儀)가 느껴진다. 자기를 정면으로 보란 듯이 당당하다. 어찌 보면 뻔뻔(?)하기도 하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는 결코 드러낼 수 없는 자태이다. 옥잠화 이파리 역시도 오만할 정도로 다른 푸나무들과 맞짱을 뜨고 있다. 그러나 터무니없다거나 허세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자주달개비나 옥잠화도 바라보는 나에게 삶의 훈수를 주는 선지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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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문 안쪽에 떨어진 태산목 이파리를 무심코 주웠네. 바람이 불어 떨어진 줄 알았네. 빗줄기를 견디지 못하고 가지를 떠난 줄 알았네. 낙엽이 된 이파리를 보는 대로 주워 태산목 둥치로 치웠네. 염치없이 꽃만 보려고 기다렸네.
오늘 태산목 가지를 보니 그게 아니네. 꽃을 피우려고 이파리가 스스로 삶을 접고 떨어져 왔네. 아, 태산목 이파리를 줍다가 문득 이타행을 깨닫네. 갈 때가 되면 작별할 줄 아는 이파리들 덕분에 꽃이 피어나고 있는 것을 보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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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재 마당가에 붉은 백합꽃이 올해 처음으로 피었다. 경기도에서 난(蘭)농원을 경영하는 항헌(香軒) 강경원 박사께서 몇 해 전에 보내준 백합꽃인데, 해마다 초여름을 알리는 전령처럼 피는 꽃이다.
붉은 백합꽃은 외국에서 온 것 같은데, 나는 외래종이니 토종이니 하고 분별하지 않는다. 꽃을 보면서 분별하는 것은 아름다움을 보시하는 꽃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아름다움이란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온 감성으로 온전히 감상해야지 머리에 머물러 분별한다면 그 아름다움은 결국 분해되고 해체될 듯 만 싶은 것이다.
어디 꽃의 아름다움만 그러하겠는가! 아무리 위대한 교조의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탁월한 석학의 주의 주장이라 하더라도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손발로 내려오지 않는다면 도대체 내 삶에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머리에만 머무른다면 관념적이므로 공허할 것이고, 가슴에만 머무른다면 감동은 있으나 자기화되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마침내 그것이 손발로 내려왔을 때만 내 것이 됐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백합꽃 한 송이를 보고 너무 무겁게 사색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꼭 한번 짚어보고 싶어서 순간적인 단상을 붙잡아 남긴다.
사족: 이 글을 본 강 박사가 문자를 보냈는데, 붉은 백합의 고향은 네덜란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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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내내 장마 같은 날씨였다. 어제부터 햇볕이 났다. 아내는 차실 카펫부터 빨아 빨랫줄에 널었다. 나는 오늘 이른 아침 사랑방인 무염산방에 군불을 지폈다. 물론 군불을 지피기 전에 아궁이 속의 재를 삽으로 한 박스나 치웠다. 재는 예상했던 대로 습기를 머금은 채 축축했다. 본격적인 장마가 오기 전에 젖은 아궁이와 구들을 말려두지 않으면 안 된다. 농부들은 비 온 뒤에 하는 이런 일들을 비설거지라고 한다.
무염산방이 연기에 휩싸여 제법 선경(仙景)처럼 보이지만 산중생활도 크든 작든 할 일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황사나 미세먼지가 덜한 산중에 살려면 나름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산중에서 할 일이란 틈틈이 이런저런 데에 손발을 써야 하는 작업이다.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이란 자연 속에서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작위적(作爲的)인 일을 경계하라는 말이 아닐까. 자연처럼 무위적(無爲的)으로 살라는 말일 터. 그러고 보니 무위는 순리와 동의어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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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일 내내 비가 오락가락한다. 이런 날이 씨앗을 파종한 데는 적기다. 지난 월요일 해가 반짝 났을 때(이런 때를 오스트리아에서는 천사가 소풍 가는 날이라고 한다) 강진에 사는 심송 김걸 선생이 영랑생가에서 구한 모란 씨 31개를 가져와 주었고, 나는 그분에게 나의 산문집 <서른부터 다가온 반야심경의 행복>을 선물했다. 이를테면 물물교환을 한 셈이다.
다음날, 그러니까 화요일에 비설거지하듯 반찬 그릇만 한 포트 12개에다 흙을 담은 뒤 모란 씨를 골고루 나누어 심었다. 이미 자리 잡은 상추와 어린 아욱 사이의 빈자리를 채웠던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싹을 틔우는 노동이야말로 우주와 교감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하늘에서 내려온 햇볕과 바람과 비, 그리고 땅의 흙과 사람의 수고를 만나야만 씨앗이 싹을 틔우기 때문이다.
언젠가 어느 지면에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시(詩)가 동체대비 사상이 담긴 불교시라고 주장한 바 있는데, 이불재 뜰에도 김영랑 생가의 모란꽃이 피어난다면 더욱더 감흥과 깨달음이 솟구칠 것 같다. 모란꽃은 김영랑의 심장과 가슴을 넘어 나의 심장과 가슴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족보가 분명한 모란꽃은 김영랑 생가와 이불재를 잇는 시혼(詩魂)의 오작교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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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후 2시쯤 범희승 원장님과 쌍봉사 주지 증현스님께서 방문하시어 차담을 했다. 범 원장은 작고하신 전남대 영문과 교수였던 범대순 시인님의 아들로 전남대 화순병원장을 역임했고, 현재 군립 화순요양병원 원장으로 있는 핵의학 전문가이다. 지금도 전남대 화순병원 암센터에서 판독하는 일은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서른부터 다가온 반야심경>을 서명해서 선물했다. 그랬더니 즉석에서 가지고 온 바이올린으로 넬라판타지아 등 세 곡을 연주해 준다. 현재도 광주권 무대에서 바이올린 독주회를 열고 있으며, 오케스트라 지휘도 한다고 한다.
증현스님과 아내가 무척 부러워한다. 클래식 마니아인 아내는 도자기 수업 수료식 때 연주를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자 그러겠다고 약속한다. 지난 초파일 행사를 원만하게 성료한 증현스님께 나는 다시 한번 더 축하를 드렸고, 스님은 입정(入定)에 든 것처럼 집중해서 바이올린 선율을 감상했다. 이불재 차실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한 것은 23년 전에 집이 들어선 이후 최초의 일인 것 같다. 특별하고 정겨운 초미니 바이올린 연주회였다고 나 할까. 아직도 바이올린의 산들바람 같은 부드러운 선율이 차실에 남아 날갯짓하면서 날아다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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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광주 5.18민중항쟁 소설 <광주아리랑>(전2권)이 전두환 일가 중에서 유일하게 참회하고 있는 손자 전우원 씨의 손에 들릴 줄이야! 오죽 괴로웠으면 아무 죄도 없는 어린 손자가 전 씨 일가를 대신하여 참회하게 됐을까 싶어 측은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육조 혜능대사는 말했다.
'참(懺)이란 지나간 허물을 뉘우침이니,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를 뉘우쳐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회(懷)란 이후에 짓기 쉬운 허물을 조심하여 다음부터 있을 모든 죄를 미리 깨닫고 영원히 끊어서 다시는 짓지 않도록 하는 것이니, 이것을 합하여 참회라고 부르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