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를 위하여 32
(©장명확)
보살이 계속 코를 훌쩍거렸다. 잔뜩 내려앉아 눈을 덮어버린 주름살, 겉으로 보기에 칠팔십 살은 족히 되어 보였다.
“그래요. 할머니는 조금도 늙지 않았어요.”
“우리 보살님은 백수도 더하실걸.”
정안 스님이 거들었다.
“집안이 그렇게 돼서…….”
그녀가 노 보살의 말을 막았다.
“할머니 전 괜찮아요. 그러니 저보다 더 오래오래 사세요.”
“그래, 알았다. 내 자네보다 더어 오래 살마. 참 내 정신 좀 봐. 차 다 식겠네.”
“이미 차는 다 식었어요.”
“할머니 인사하세요. 제 신랑이에요.”
“오호, 그래.”
내가 겸연쩍은 얼굴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선을 보이려면 수염이나 깎고 오질 않구. 어쨌든 우리 보경이 잘 돌봐주고, 편히 쉬어요. 할 얘기도 있을 테니 난 그만!”
노 보살은 내 행색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할머니 좀 더 있다 가세요.”
“아니야, 내일 아침에 다시 니 신랑 얼굴 똑똑히 봐두어야지. 편히 쉬어. 참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부르고, 난 잠이 없어.”
“알았어요. 할머니.”
정안 스님 말대로 차는 몽땅 식어 있었다.
“아까는 애인이었다가 지금은 신랑, 속도 빨라서 좋구먼.”
정안 스님이 또 웃고 있다.
“어이구, 남장 할머니한테 애인이라고 소개를 해봐요. 어떻게 되나?”
“뭘 어떻게 돼. 오늘 밤으로 혼례 치르라고 하겠지. 흐흐흐!”
등잔은 자꾸 타 들어가고. 따뜻한 아랫목, 눕고 싶었다. 마음과 다르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보살님 말씀대로 오늘은 너무 늦은 것 같으니 우리 내일 얘기함세.”
“밤을 새도 좋아요.”
“보경 아가씨, 당신은 좋은데, 당신의 애인이고 신랑인 저분은 그렇지가 않은 것 같아요. 편이들 쉬게.”
정안 스님이 가고 난 다음 그녀가 재빨리 이불을 폈다.
“신랑님, 여기 누우세요.”
“흐흐흐, 건 버짐 아낙네.”
“놀리지 마세요.”
그녀가 장난기 가득한 눈을 흘겼다.
“피곤하지 않아요?”
“아니, 조금도.”
“보기에는 곧 쓰러질 것 같은데…….”
“쓰러지면 되지. 이렇게, 흐흐!”
벌렁 이부자리 위로 몸을 눕혔다. 처음이다. 옳은 방바닥에 등을 누인 적은, 난리가 나고 한 번도 없었다. 그녀의 혜화동 병원도 모두 침대 방뿐이었다. 편안함, 그러나 그녀는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등잔불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래?”
“이러고 싶었어요. 당신은 편안히 눕고, 난 누운 당신의 얼굴을 보고, 그러면 바깥은 한없이 세월이 흐르고, 그러면 당신도 늙고, 나도 늙고……, 절에서.”
“절에서?”
그녀는 청승을 떨었다.
“또 그러면?”
“그러면 죽어서 당신은 지옥, 난 극락.”
“어이구, 난 웬 지옥?”
“한 여자를 죽도록 사랑하지 않은 죄로.”
그녀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얼른 그녀의 얼굴을 외면했다. 다른 말을 찾았다.
“하필이면 그때 왜 백천사로 왔어?”
그녀의 개인적인 신상에 대해서 물어본 것은 처음이다.
“……?”
“말하기 싫으면 그만두고.”
“동봉 스님이 숙부님이세요.”
“……?”
아! 무서운 동봉스님.
“집은?”
“여기.”
그녀가 쓸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장사 밑이에요. 오시다가 오른쪽 산 밑에 집 한 채 있는 거 보셨지요?”
“감나무 밭 위에?”
“내가 그 감나무 밭에서 났어요.”
“어떻게 해서 남로당에 가입하게 되었지?”
“오늘 순경이 되셨어요.”
“마지막으로, 처음이지만.”
“마지막이라는 말은 쓰지 마세요.”
또 눈물. 바람은 들창을 때리고 있다.
“정말, 우리 처음이지요?”
“딴 나라에 내가 와 있어.”
“동굴 나라로는 가지 마세요.”
“흐흐흐!”
“호호호!”
그녀도 따라 웃었다.
“그럼, 또 시작해야지.”
“할 말이 없어요.”
“거짓말, 할 말이 많으면서.”
“그래 보여요?”
“그래서 나를 여기로 끌고 온 거 아니야?”
“아니오. 아니에요.”
“혁명 투사 선배님이 왜 이러실까? 그 무서운 결의는 다 어디다 두고.”
내가 담배 하나를 물자,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담배 피워?”
“당신보다 더 골초.”
‘골초’라는 말보다 ‘당신’이라는 말이 목에 걸렸다.
“산 생활하면서 배웠어요. 구역질 지우려고.”
불을 붙여 건넸다. 그녀가 웃으면서 담배를 받아 한 모금을 들이켰다. 아니나 다를까 삼키기도 전에 캑캑거렸다.
“아직 산사람이 아니구먼.”
“너무 오랫동안 손을 놔서.”
그녀가 웃으면서 다시 한 모금을 빨았다. 가녀린 손, 그러나 온전한 데가 없이 흠집 투성이의 손. 연거푸 천장으로 연기를 밀어 올렸다.
“빈집 같던데?”
“모두 처형되었어요.”
“모두?”
심문은 거기서 중단되었다. 그녀는 백지 위에 담배를 비벼 껐다. 텅 빈 눈동자,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몸매……, 여전히 들창을 후리는 바람. 후두득이며 발버둥 치는 뒷산 나무들의 아우성. 알아들을 수 없는 산짐승들의 울음. 활짝 방문을 열어젖히고 싶다.
“이렇게 더운 방에서는 못 자.”
“저도 그래요.”
아랫목에 깔린 이부자리를 걷어내면서 그녀가 방문을 열었다. 때를 기다렸다는 듯 찬바람이 사정없이 들이쳤다.
“그것 때문에 숙부님도 고생 많이 했어요.”
백천사에 경찰들이 들락거리던 생각이 났다.
“내가 알기로, 스님은 어릴 때부터 백천사에 계셨는데…….”
“자혜 스님이 할아버지예요.”
이제는 더 놀랄 일도 없다. 자혜 스님은 내 할아버지 친구다.
“…….”
“우리 아버지는 종갓집 장손이니까 못 데리고 가시고, 대신 숙부님이 수발을 들었지요. 원래는 백련사에 계셨어요. 가족들이 자꾸 찾아오니까 이 산골짝으로 터를 잡았어요.”
“평양에는?”
“숙부님이 시켰어요.”
“동봉스님?”
“박헌영 선생님 선배.”
이야기는 끝났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아직도 이형숙과 박헌영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그렇게 끝날 일이었어요. 그렇지만 난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그녀가 울고 있다.
“무슨 소리?”
“그분들이 내게 남겨준 것이 있어요.”
“전쟁과 죽음?”
“그분들이 한 게 아니에요. 그분들은 폭력을 가장 싫어했어요.”
“귀신도 웃을 노릇! 그들이 한 일은 무장 투쟁 한 가지였어.”
“난 그런 거 몰라요. 단지 피죽도 못 먹고 시달리는 고향 사람들을 걱정하던 그 첫 모습들!”
“김일성에게 전쟁을 부추긴 것은 중국도 소련도 아닌 바로 박헌영이야.”
이상한 일이다. 지난 얘기에 열을 올리는 내가 우습다. 그런데도 이야기를 놓지 않았다.
“온몸에 버짐이 노랗게 앉은 유년을 생각했어요. 약 한 번 쓰지 못하고 나뒹구는 마을 사람들을 생각했어요. 그래서 의학을 지원했어요.”
이제 더 이상 지나간 덧없는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래도 용하군. 병원까지 내고.”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남편이 하는 병원이에요.”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