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고를 양약으로 삼으라

                                                              정찬주(소설가)

 목요일에 위내시경을 받으러 화순읍 모 병원에 갔는데 미열이 있었던 아내가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았다. 위내시경을 마치고 이불재에 돌아온 지 얼마 후 화순보건소에서 전화가 왔다. 부부이므로 나도 코로나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전화였다. 그래서 나는 이불재에서 가까운 보성군 복내면의 조그만 병원으로 갔다. 나 역시 코로나 양성 결과가 나왔다. 

 이때부터 이불재의 일상은 바뀌었다. 가장 먼저 토요일에 뵙기로 했던 해인사 방장스님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지인의 소개로 금요일에 점심을 함께 하려고 했던 마가스님과의 일정도 취소했다. 쌍봉사 회주스님, 주지스님과 보름 전에 약속했던 저녁 약속도 취소했다. 물론 이불재 방문객은 모두 사절했다.

하루 이틀 사이에 이불재는 적막강산이 돼버렸다. 아내와 나밖에 없는 고요한 공간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문득 ‘병고를 양약으로 삼으라’는 <보왕삼매론>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모든 일정과 약속들을 취소하고 보니 오롯이 나만의 시간만이 남은 것 같다. 내가 할 일들이 더 또렷하게 보인다.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분명하게 자각이 된다. 내 발밑을 되돌아보는 조고각하의 시간이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을 역설이라고 할 터이다. 코로나에 걸려 잔기침이 나오고 목이 불편하지만, 그런 상황이 오히려 나를 찾는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건강의 소중함까지 자각하고 있으니 일석이조다. 코로나 격리 기간은 일주일이고, 위내시경의 결과도 일주일 후에 나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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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부터 흰 제비꽃이 "나 여기 있어요!" 하고 수줍게 말하는 것 같아 눈길이 간다. 문득 돌아가신 박완서 작가님이 떠오른다. 어느 해 전라도 여행길에 이불재를 들렀던 것이다. 해마다 전라도를 한 번씩 여행해 왔는데, 굳이 이유를 대라면 자신이 반남 박가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했다. 반남면은 나주시에서 영암으로 가는 곳에 있는데, 삼한시대의 고분이 있는 유서 깊은 고장이다. 

 그때 박완서 선생님은 이불재 마당의 흰 제비꽃을 보시더니 내게 호미를 달라고 하셨다. 서울 아차산 자택 정원에 흰 제비꽃을 두어 송이 옮겨 심고 싶다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흰 제비꽃처럼 소박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박 선생님의 문학작품이 젊은 독자들에게 아직도 인기가 있는 것은 바로 선생님의 사춘기적 감성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짐작했다. 

 손톱만 한 흰 제비꽃을 보고 감동하는 감성이야말로 고산준봉 같은 박완서 선생님 문학을 싱싱하게 한 실뿌리가 아니었을까. 어떤 작가든 사춘기적 감성의 샘이 하나씩 있을 터. 그 오래된 샘이 메말랐는지, 여전히 감성의 샘물이 솟구치는지는 오늘 쓰고 있는 작가의 현재 문장이 증명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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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 바이러스가 어제부터  물러가고 있는 듯하다. 잔기침이 멎고 가래가 사라져가고 있다. 아내보다 이틀 먼저 감기 증상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만큼 빨리 회복되고 있다. 코로나도 회복하는 데 있어서 새치기나 급행료는 없는 듯하다.

방금 강진군 심송(心松) 김걸 선생께서 이곳 이양면 농협마트에서 딸기와 만두, 음료수를 시켜 배달이 왔다. 걱정하게 하여 미안하기도 하지만 정(情)을 통해 깊은 유대감을 느낀다. 경담(鏡潭) 이종만 선생한테서도 안부전화가 왔다. 나 혼자가 아닌 여러 사람의 힘으로 코로나 바이러스와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느낌이다. 고마운 분들에게 봄날의 절정 같은 이불재 영산홍 붉은 꽃을 보낸다. 붉은 마음을 단심(丹心)이라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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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 5시 기상. 평소 같으면 4시에 눈을 뜨는데 1시간 늦었다. 내 습관으로는 늦잠이지만 그래도 코로나 바이러스로 고생한 이후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신호이다. 일주일 만의 일이다. 아침에 느티나무를 한 그루 아내의 공방 초입으로 옮겨 심으려고 했는데 빗방울이 보인다.

 며칠 동안 자비가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자비는 타고난 천품인가, 아니면 수행으로 생기는 것인가. 둘 다 맞는 것 같다. 해인사 방장스님을 보면 타고난 천품 같다. 스님은 대학입시를 포기했다. 누군가가 자신 때문에 낙방할 것이라고 생각해서였다. 스님의 고등학교 동창인 하동군수와 중국 장가계를 여행한 적이 있는데, 그때 스님의 학생 시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반면에 일타스님은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손가락을 연비하는 고행 끝에 세상과 자신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사람들은 일타스님을 자비보살이라고 불렀다. 스님은 맏상좌가 사제를 비난하면 노래를 흥얼흥얼 불렀다. 비난을 제지하면 맏상좌가 상처받을 것이고, 그렇다고 맏상좌의 비난을 듣고만 있기가 거북하기 때문이었다. 이는 알려지지 않은 일타스님의 일화이다. 스님이 노래를 부를 때 비난을 멈추었다는 맏상좌의 고백을 나는 직접 들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일타스님의 경우처럼 자비는 호오(好惡)의 감정에서는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좋다, 싫다를 다 넘어서버린 것이 자비이기 때문이다. 또한 시비(是非)의 감정에서도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옳다. 그르다를 다 감싸버리는 것이 자비이기에 그렇다. 자비란 측은지심과 이복형제가 아닐까 싶다. 측은한 마음은 호오와 시비를 가리지 않고 그냥 드러내는 마음일 뿐이니까.

 일상으로 돌아왔으니 강진군 홈페이지에 연재하는 <깨달음의 빛, 청자> 9회분 원고를 검토한 뒤 송고해야겠다. 느티나무는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비가 오지 않는다는 예보가 있으니 그때 심으면 될 것 같다. 물론 산중마을의 두 젊은이가 굴삭기를 끌고 와서 수고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