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죽어야 크게 산다.” 이 말은 선문(禪門)의 고구정녕(苦口丁寧)한 가르침이다. 그러나 이 말이 결코 선문에만 해당하는 말은 아니다. 생사를 걸고 수행하는 정통 선문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네 인생이란 것이 대부분 역설이다. 잊혀지고자 하면 드러나고 드러나고자 하면 잊혀지고, 비우려면 얻어지고 얻으려면 오히려 잃는 것이 인생사의 이치이다.

소설이든 수필이든, 기행문이든 늘 압정으로 꾹 눌리는 듯한 짜릿한 감동과 각성을 주는 정찬주 작가<<STRONG>사진>는 최근 펴낸 책 ‘영축산 도인 경봉 스님 이야기’ <크게 죽어야 크게 산다>(김영사)에서 바로 이 역설을 그려내고 있다. 경봉 스님(1892~1982)이 평생을 삶의 통해 보여준 역설을 지혜로 삼는다면 누구나 또 다른 깨달음의 길로 갈 수 있다는 것이라는 게 정찬주 작가의 신념이다.

경봉 스님의 수행처를 돌며 피부로 느낀 것은 바로 그런 역설이었으며, 그래서 책의 제목을 ‘크게 죽어야 크게 산다’로 정했다.

“멀리 갈 것도 없어요. 내가 이불재에 내려와서 글을 쓰며 은둔하며 살고 있는데요. 오히려 서울에서 살 때보다 더 많은 독자들이 이불재를 찾아옵니다. 이것도 역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어야 산다는 논리가 반드시 선가의 문법만이 아닌 것이죠.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진리. 경봉 스님의 구도일생을 통해 배우는 지혜는 따라서 저자거리 삶에서도 그대로 통하는 삶의 지혜라고 봅니다.”

정찬주 작가는 경봉 스님 수행처들을 돌아보면서 경봉 스님이 진정한 도인이었음을 온몸으로 느꼈다고 한다. 성철 스님에게서는 어떤 수행자상이 뚜렷하게 다가오는데 비해, 경봉 스님에게서는 그렇게 하나의 이미지로 특정할 수 없는 자유로움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경봉 스님은 그렇게 범위가 넓은 스님이었다. 원효의 후신 같은 분으로, 통불교를 지향한 것이 경봉의 독특한 가풍이었다.

1960년대, 오갈 데 없는 폐병환자들을 경봉 스님이 다 거둬서 돌봐주었던 일화가 있다. 당시 폐병환자들은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버림받은 사람들이었다. 극락암으로 찾아온 폐병 환자가 스님의 옷에 피를 토했을 때, 경봉 스님은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벽장에서 새 승복을 꺼내 환자에게 입히고 나중에 자신의 옷을 벗어 빨았던 것이다. 경봉 스님은 이렇게 세상의 눈물을 닦아준 보살 같은 스님이었다. 이런 예는 수도 없이 많다. 부산의 불자들이 아직도 경봉 스님을 스님의 법호 대신에 ‘도인 스님’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인이라는 말은 얼핏 듣기에는 곰팡이가 낀 듯한 느낌을 주지만 경봉 스님은 말 그대로 도인이었고, 도인이야말로 경봉에 가장 어울리는 호칭이었다.

경봉 스님은 근대 한국불교사의 산 증인 중의 증인이다. 한암, 전강, 향곡 등 당대의 고승들과 주고받은 서간집을 보면 경봉 스님이 왜 근현대 한국불교사의 중심을 관통한 산 증인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경봉 스님은 또 자신의 소리를 표현한 선시로 유명하다. 대부분의 고승들이 자신의 소리를 표현할 때 중국의 당송 선시를 빌어다 쓰는 것과는 분명한 차별을 드러낸다. 경봉의 즉흥선시는 그 유려함과 심오함에서 이미 정평이 나 있다.

정찬주 작가는 경봉이 남긴 선시 중에서 다시(茶詩)에 주목한다. “경봉 스님의 선시 중에는 유독 다시가 많습니다. 스님은 차를 좋아하신 스님이었습니다. 진각, 함허, 초의의 다시 전통을 이은 분이기도 하지요.”

재가불자들에게도 큰 존경을 받은 스님이었다. 장경호, 서경수, 박성배, 김충렬 등 이름난 재가불자와 학자들이 경봉 스님에게 가르침을 받고 교유했다. 장욱진 화백에게 비공(非空)이라는 법명을 지어준 것도 잘 알려진 이야기이고, 프랑스 출신의 저명한 문화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도 한국에 와서 경봉 스님을 만나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런 경봉 스님을 그린 <크게 죽어야 크게 산다>는 자신에게는 사자같이 엄격하고, 타인에게는 봄바람같이 자애로웠던 영축산 도인을, 머릿속에 불이 붙도록 치열하게 정진했던 스님의 법향을 따라간 경건한 족적이다. 경봉 스님의 수행처를 직접 순례하며 느낀 경봉 스님을 시공을 초월한 감응으로 써 내려간 또 다른 가르침의 기록이다. 우리나라 전국 곳곳의 암자와 절을 찾아다닌 암자 전문가이도 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스님이 남긴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영축산 도인이었던 경봉 스님의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가르침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경봉 스님이 출가발심한 통도사 안양암에서 야반삼경에 촛불 춤을 보고 대오한 통도사 극락암 삼소굴, 자결할 각오로 인간의 한계를 넘어 가행정진한 해인사 퇴설당 과 직지사 천불선원, 마음부처가 방광한 밀양 무봉사, 주장자 법문을 한 천성산 내원사까지. 스님의 수행처인 절과 암자, 선방 만행 끝에 참 나(我)를 발견한다. 버리고 또 버려야 얻을 수 있다는 촌철살인의 법어와 선문답까지, 스님은 눈앞의 주인공을 보고도 모르는 중생에게 ‘화엄의 바다’ 같은 사자후를 던진다.

이 책에는 선방의 문고리 하나, 절에 드리워진 산수유나무 열매 하나에서도 스님의 그림자를 찾고자 한 작가의 마음이 곳곳에 묻어있다. 경봉 스님이 정진에 정진을 거듭한 절이나 암자, 선방에 남은 덕화의 향기를 맡기도 하고, 때로 저자는 스님의 칼칼한 가사장삼 같은 통도사 극락암에서 잠을 자면서 스님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이처럼 정찬주 작가는 스님이 머물렀던 수행처를 경건하게 돌아보며, 영축산 도인 스님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그는 각 수행처에 남아 있는 스님의 흔적을 단어 하나 문장 한 줄 속에서 생생하게 구현해내어, 스님의 깊고 넓은 생애와 사상을 조명한다. 이 책에서는 수행자의 틀에 갇히지 않고 거침없이 도를 굴린 대자유인, 경봉 스님의 수행의 길은 집착하는 ‘거짓의 나’를 죽여야만 ‘참 나’로 살 수 있다는 가르침을 전한다.

정찬주 작가는 “한 번뿐인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사무치게 찾아보고, 서 있는 그 자리에서 바로 용기와 희망을 갖기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다”며 “독자들도 경봉 스님의 가르침을 받아 깨달음의 인연을 맺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