蓮이를 위하여 19
(©장명확)
아들아!
나는 비탄에 잠기지도 않았으며 기운을 잃지도 않았다. 그러나 생명이란 우리의 육체 안에 있는 것이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한때 조국 해방을 떠들었던 난 진정으로 내 가족을 해방을 시키지 못했다. 네 외삼촌이 이야기하지 않지만 내게 아들이 있다는 것을 진즉 알고 있었다. 남편을 잘못 둔 죄로 마을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은 네 엄마가 너를 낳다가 죽었다는 걸 오래전에 알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에게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나로 하여 죽은 그 많은 사람들. 그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칼이 곤두선다. 마을 아낙들의 눈치 젖을 먹으며, 네가 내 아들로 자라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그들이 너를 어떻게 보고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나의 마을로 내려가고 싶지만…….
아들아!
난 앞으로 네가 자랄 미래를 조금도 예측할 수가 없다. 이 글을 네가 읽게 될지, 아니면 나라는 존재를 완전히 모르게 될지, 아니면 나에 대한 증오로 평생을 살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기억해 두어라. 너는 나의 아들이기 전에 이 땅의 아들이라는 것을, 어찌 보면 나는 너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지도 모른다. 단지 네가 나를 통해 나왔다는 것뿐, 너는 엄연히 나와 다르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너는 오로지 너 자신일 뿐이다.
나로 인하여 네가 고통을 받게 되면 분연히 이 애비를 부인해라. 열 번 해도 되지 않거든 스무 번을 부인해라. 그것은 너무도 정당한 일이다. 그리고 내가, 니 애비로 살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노라고 당당하게 외쳐라. 단 너의 외삼촌으로 하여 네가 고통을 겪게 되면, 넌 그것을 언제까지나 감수해야 한다. 그가 곧 너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정경묵……, 내게는 하나밖에 없는 동무인 네 외삼촌은 죽음을 무릅쓰고 양식을 나른다. 죽을 때까지 먹어도 다 먹지 못할 양이다. 그런데도 네 외삼촌은 오밤중에도 빈손으로 오는 법이 없다. 네 외삼촌이 만들어 오는 참나무 숯은 연기도 없다. 그 마음을 나는 알고 있다. 나와 너로 하여 너의 외삼촌이 겪을 고통을 생각하면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다. 네 외삼촌은 죽음을 눈앞에 둔 내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너의 엄연한 존재를 말하지 못한다.
요즈음 내 눈은 점점 안개가 짙어지고 있다. 그러나 단 한시도 마을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혹여라도 이불에 쌓인 너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 때문에……. 물론 이곳에서 그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인 줄 잘 알면서도……. 이것이 인간과 동물의 다른 점일지도 모른다. 되지도 않는 일을 바라 평생을 바치는 그런 어리석은 인간, 그러나 그것이 가장 인간다운 모습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매일 꿈을 꾼다. 너와 네 엄마가 손을 맞잡고 이 청리산으로 올라오는 꿈을. 색동저고리를 곱게 입은 너의 엄마는 여전히 얼마나 고운지, 네가 벌써 아장아장 걷고 있는 그런 꿈을……, 그런 꿈을 꾸는 날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하루 종일 잠을 청한다. 그렇지만 하늘은 내게 그렇게 복된 날을 자주 내려주지는 않는다.
아들아!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한 여인인 네 엄마, 네 엄마는 나로 인해, ‘빨갱이 마누라’란 죄를 쓰고 세상을 떠났다. 네 엄마가 묻힌 곳은 사람들 눈에 띌까봐 봉분도 없고 그 흔한 나무 표식도 없다. 그렇지만 난 매일 위험을 무릅쓰고 네 엄마의 무덤가에 겨울 꽃을 바친다. 흩어진 억새의 머리를 모아, 아니면 언제나 성성한 솔잎 가지를 꺾어 네 엄마에게 간다. 그리고 밤새도록 생각했던 너의 이름, 너의 이름을 네 엄마와 함께 의논한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아직 이름을 정하지 못했다. 아직 네 엄마와 내 입에 착 달라붙는 그런 이름이 없다.
아들아!
그렇지만 네 외삼촌이 끝끝내 너의 존재를 내게 알려주지 않는다면, 네 이름을 만들기는 고사하고, 누군가 만들어 준 그 이름마저 알지 못하고 눈을 감을 것이다. 벌써 네가 태어난 지가 언젠데……. 네 외삼촌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또다시 텅 빈 네 외삼촌의 가슴을 보면 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네 외삼촌의 가슴에 네 엄마를 닮은, 아니면 내 뒤꼭지라도 닮은 네가 안겨 있다면……, 그러나 그것이 조금도 섭섭하지 않다. 나보다도 더 아픈 네 외삼촌의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내 머리가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일이 있더라도 심장이 남아 있고, 기억할 수 있는 살과 피가 남아 있는 한 너를 사랑하며 생각한다. 그리고 언제나 네 엄마 사진을 품속에 넣고 있다. 결국 이게 삶이 아닐까?
태양이 보인다.
시커먼 산 그림자가 청리산의 봉우리를 덮을 때쯤 ‘어둠의 무리’라고 불리는 늑대들은 그들의 소굴 백천 동굴에서 빠져나와 모두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들의 눈은 새파랗게 반짝이고 있다. 그들이 모두 그렇게 마을을 내려다본 것은 처음이다. 그들이 모두 함께 그렇게 울부짖은 것도 처음이다.
그렇지만 일곱 마리의 무리 중 여섯 마리는 영문을 알지 못한다. 왜 오늘은 이렇게 마을을 내려다보아도 좋은지, 그리고 암늑대의 얼굴에서 비치는 저 당당한 모습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암늑대는 자신에 찬 모습으로 자신들의 무리를 훑어보고 있다.
이 ‘어둠의 무리’는 다른 늑대 집단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다른 늑대들이야 두목이 수컷이었지만 ‘어둠의 무리’는 그 반대이다. 암늑대가 두목이고, 수늑대는 부두목격이다. 모든 중요한 명령은 암늑대의 몫이다. 새끼들을 안전하게 키우고, 뒷바라지를 하는 것은 오히려 수늑대였던 것이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저 아름다운 불빛이 반짝이는 인간의 마을, 암늑대는 모든 가솔들을 거느리고 처연하게 눈이 내리는 인간의 마을을 넋 나간 듯 한참 동안 내려다보고 있다. 너무도 조용한 마을, 반짝반짝! 등불 빛. 저 불빛 속의 인간이 되기 위해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그 수많은 세월을.
드디어 암늑대의 마지막 사냥 명령이 떨어졌다. 인간이 되기 전에 가솔들과 사냥을 하고 싶었다. 하늘로부터 받은 늑대의 마지막 본분을 다하고 싶었던 것이다. 암늑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송이들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이 사냥을 끝으로 자신은 인간의 마을로 내려가야 하는 것이다. 늑대의 모습이 아니라 엄연한 인간의 모습으로.
마을의 등잔불이 그립다.
나는 늑대 색시인가?
양반집 아들인가?
늑대 못에도 눈이 내리고 있다.
노랑 바위에도 눈이 내리고 있다.
굴참나무숲에도
오리나무숲에도 눈이 내린다.
바람이 점점 차가워지고 있다. 이파리 없는 겨울 나뭇가지 사이로 마을의 불빛이 보인다. 내가 아는 사람들, 그들의 불빛이다. 그 얼굴들을 하나하나 헤아린다. 그러면 마치 어제의 일처럼 나의 마을을 휩쓸고 지나간 전설이 떠오른다. 개가 짖지 않는 마을……. 이 마을에 대대로 내려오는 전설은 사실 인근의 다른 마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권선징악 전설과 별다름이 없다. 단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인간이 되기를 원했던 늑대에 관한 부분이 조금 더 이상하고도 상세하게 전해져 왔고, 그것이 직접적으로 마을 사람들의 생활에 아직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물론 많이 퇴색되기는 했지만.
우우웅!
눈 내리는 12월의 어두운 저녁.
굴참나무에도 눈이 내렸다.
오리나무에도 눈이 내렸다.(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