蓮이를 위하여 15
(©장명확)
어쨌든 지금 생각해 보면, 임순이와 혼인을 앞둔 그때 그 봄날, 이미 경묵이와 임순이, 그리고 나, 우리 셋이 웃고 떠돌던 청리 사진관 위로, 아니면 샛말 밤나무 숲 밑으로, 남장사, 북장사, 갑장사, 백천사 하늘 위로 불행의 먹구름은 드리워져 있었다. 생이별과 처참한 죽음으로 끝막음할.
나는 청리산이 이룬 널따란 냇가, 그 둔덕에 서서 종국에는 낙동강으로 흘러가는 황금빛의 물결을 보았고, 그 황금빛 물결 속에서 어릴 때 보았던 외설리 늑대 못을 떠올렸다. 그리고 임순이가 보낸 짤막한 편지를 기억했다.
그때의 임순이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러나 그때 나는 임순이의 그 편지로 하여 오히려 고향에 일찍 돌아왔다. 결국 북쪽을 포기하고 내가 이곳으로 오게 된 것도 물론 임순이의 편지 때문이었다. 또한 이렇듯 빛나는 물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변하지 않았던 그 물결, 비록 마을에는 들어가지 못하지만.
불타던 물결, 어지럽게 날던 물벌레들과 물풀들의 합창, 이 청리산이 이룬 물결을 보고 나는 비로소 전부는 아니지만 아무리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옛날을 어느 정도 씻어낼 수 있었다. '죽을 때까지 씻어내는 거다‘ 그런 마음이었다.
이제는 머언 청리산의 정상은 구름에 가려 아예 보이지 않고, 백천 동굴은 어디에 붙었는지 알 길조차 없다. 저 휘어진 산맥들을 임순이도 보았을 테고, 나도 보았다. 그런데 지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청리역에서 콩나물시루 같은 경북선을 탔을 때는 어느새 정오가 가까울 무렵이었다. 무려 2시간 이상을 잡아먹은 열차는 마침내 김천역에 도착했다. 이제 서울은 멀지 않다. 그분이 계시는 충무로, 그녀가 있는 혜화동.
서울역까지 가는 그동안은 내가 살아온 삼십여 년보다 훨씬 긴 시간이었다. 열차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수상하게 보는 것 같다. 어떤 한 사람, 그분의 모습이 순간순간마다 떠오르지 않았다면 난 아마 결국 중간에서 서울행을 포기했을 것이다. 그분의 눈물이 없었다면 서울로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선생님.
당신의 함자를 제 일기장에 쓰지 못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경찰에 걸려도 좋다. 자는 척 눈을 감고 있었다. “그렇다면 기꺼이 서대문 형무소로 갈 것이다. 고향 청리산에서 끌려가는 것보다 몇 배나 행복한 일이다. 서대문 형무소로 끌려가면 아는 사람 아무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울면서 나왔던 세상을 웃으면서 하직하는 거다.” 그렇지만 다음날 새벽이 되어 서울역에 도착하는 그때까지 단 한순간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서울.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고는 들었는데, 서울역은 예전이나 별다름이 없다. 여전히 사람들이 많다. 그렇게 많이 죽고, 죽였는데……. 노파심에 모자를 더 눌러쓰고 플랫폼을 빠져나오는 순간 누가 내 허리를 부여잡았다. 그러나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녀의 특기였다. 해방되기 전에도 서울에 오면 그녀는 언제나 플랫폼에서 나를 기다렸다. 그렇게 변장을 했는데도…….
“스님이 전보를 하셨어요.”
어디서 전보를 치셨을까? 아마도 경묵이가 스님에게 눈치를 주었을 것이다. 새삼 목이 메인다. 나는 결혼을 하고 나서도 그녀를 계속 만났다. 양심의 가책은 조금도 갖지 않았다. 그녀와 나는 완전한 동지였고, 박헌영의 완전한 당원이었다. 그녀가 내게 왜 청혼을 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내가 왜 그녀에게 청혼을 하지 않았는지 까닭은 불분명하다. 마른하늘에 벼락을 맞을 소리지만 난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는 아내 임순이와는 또 다른 사람이다.
우리는 혜화동으로 오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에도 원체 말이 없는 그녀였다. 혜화동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진찰실로 나를 데려갔다. 병원은 문이 닫혀 있다. 흰 가운을 입은 그녀를 본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그녀가 일본 경찰의 남로당원 일제 검거를 피해 백천사로 피신했을 때 평양 의학 전문 2학년이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그녀는 뼈와 가죽만 남은 내 몸을 완전하게 벗긴 다음, 정성스럽게 목욕을 시켜주었고, 나는 어린아이가 되었다. 내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나는 그것이 우스워서 마음껏 웃었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웃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 병에 대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내 병에 대해서 물어보지 않았다.
“무수한 유성이 사자 별자리의 한구석으로부터 사방으로 흘러나가 틈새도 없을 만큼 빽빽했어요. 불덩어리 같은 밝은 유성이 머언 자취를 남기며 어디론가 날아가 폭발하고 사라졌어요. 목성이나 금성보다 밝은 것, 달 만한 크기의 것,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잠자리에서 모두 일어나 명멸하는 유성을 쳐다보았어요. 유성은 새벽까지 계속됐고 해가 뜨기 시작해도 밝은 유성을 볼 수 있었어요. 나도 그 유성을 보고 있다가 눈을 떴어요.”
나는 우선 무릎을 가리켰다.
“뻥 뚫린 것 같애.”
그제야 내 무릎을 이리저리 손으로 만져보던 그녀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매달려 있다. 그녀는 내 가슴을 파고들면서 흐느끼기 시작한다. 양손으로 벌거벗은 내 등짝을 한없이 쓸어내리면서.
“이제는 못 가요. 아무 데도!”
“그래, 난 갈 곳이 없는 사람이야.”
“여기서 나와 함께 있어요.”
“이 세상에 내가 있을 곳은 오직 그곳뿐이야.”
“더 이상 버티면…….”
“경묵이가 잘 돌보고 있어. 동봉 스님도.”
“당신은 내가 아니면 안 돼요. 내가 있는 곳에 있어야 돼요.”
“그곳엔 경묵이가 있어.”
전쟁 이후 그녀는 너무 변했다.
“경묵이라는 사람이 부인 오빠 되는 분인가요?”
그녀는 언제나 내 아내를 ‘부인’이라는 칭호로 불렀다.
“죽문에 살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어차피 숨어살기에는 이곳이 그 청리산 속보다 몇 배 더 좋아요.”
“나는 그곳이 편해.”
“당신이 일으킨 전쟁이 아니잖아요?”
“그렇게 따지면 그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사람들은 아무도 없겠구먼.”
“당신은 군인도 아니었어요.”
“내가 책임지고 있던 인민 위원회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사람들이 얼만 줄 알어?”
“당신이 한 일이 아니잖아요.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 당신은 그곳에 있지도 않았어요.”
“웃기는 소리!”
“당신도 부모형제는 물론이고, 부인도 죽었어요.”
“한 번만 더 그런 얘기 꺼내면 난 바로 청리산으로 갈 거야.”
그 후, 그녀는 일체 전쟁에 얽힌 이야기들을 하지 않았다. 나도 일부러 신문이나 라디오를 외면했다. 이제 나와 세상은 아무 상관이 없다. 세상과의 전쟁은 내가 청리산 동굴로 숨어들었을 때 벌써 끝났다. 이틀간 주사도 많이 맞고, 약도 많이 먹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이틀 동안 정작 서울에 간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