蓮이를 위하여13
(©장명확)
“저 사람은 걱정이 없어.”
“저도 걱정 안 합니다.”
“그래, 지금 보고 있는 책은 다 봤나?”
“농사 책만 봤습니다.”
“부처님 책도 봐.”
“스님을 뵙는 것으로 족합니다.”
“자네 또 여기서 불 때고 밥하고 싶나?”
이 마을의 아이들은 누구나 이곳 백천사에서 물 기르고 밥 한 기억이 있다.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그래봤으면…….”
눈치로 봐서 스님은 내 안색을 살피고 있다. 살피지 않아도 표시가 나는 창백한 얼굴을 보고도 스님은 아무 말이 없다. 이야기가 잠시 중단되었다.
“자네 나한테 할 말 있어서 왔지?”
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스님이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얼른 얼굴을 돌렸다. 초라함, 그리고 부끄러움,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숨고 싶다.
“영훈이와 광수…….”
그러나 스님은 손을 흔들었다.
“그만.”
스님은 지금 그들이 어디 있는지조차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분명 동봉 스님의 그늘 밑에서 숨 쉬고 있을 것이다. 나는 나의 소굴로 돌아오는 길에 혼자 중얼거렸다.
스님.
영훈이와 광수를 지켜주십시오.
스님에게 『한산시』 한 권만을 받아왔다. 그녀가 내게 보낸 책인 줄 알지만 그것들을 읽고 싶지는 않다. 시와 논설의 무익함을 알고 있다. 지금 내 머릿속에는 오직 열아홉 살 먹은 영훈이와 갓 스무 살 먹은 광수밖에 없다. 그들은 지금 빨갱이 잔당으로 쫓기는 신세. 영훈이는 한쪽 다리가 없고, 광수는 한쪽 귀가 날아갔다. 동굴에서 함께 살자고 그렇게 얘기했지만, 그들은 대답 대신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의 마음을 알고 있다. 긴 지까다비에 키보다 큰 장총을 들었던 그들의 당당했던 처음 모습.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캄캄한 이른 새벽, 영훈이와 광수를 만나러 몰래 백천사에 갔다. 동봉 스님도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불 켜진 공양주 방, 터놓고 농골 보살에게 그들의 안부를 물어볼 수도 없다. 들쥐처럼 백천사 이곳저곳을 뒤지다가 다시 동굴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얼결에 잊고 있던 아이들 꿈 한번 꾼 것 가지고 호들갑을 떠는 자신이 우습다. 그렇지만 어차피 잠은 자지 못한다. 아침에 다시 갑장사로 갔다.
“어디 갔습니까?”
“보냈네.”
동봉 스님은 미소를 짓고 있다.
“걔들 집이 이곳인데 어디로 보내겠나?”
“그럼, 마을로 보냈단 말씀입니까?”
“아니면?”
“스님?”
“이 사람, 전쟁은 어차피 끝나지 않아.”
“스님도 전쟁을 하십니까?”
“태어날 때부터.”
“무사했습니까?”
“내가 갔다 왔네. 하나는 모란이고, 하나는 읍내였어.”
“가족들을 만나셨습니까?”
“마을 사람 전부를 만났네. 누구도 걔들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은 없었어. 광수 집은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지만……, 영훈이는 다행히 부모형제가 모두 예전 그대로 살고 있었어. 다리 한쪽 없고, 귀 한 짝 없는 아이들을 누가 어쩌겠나. 광수가 마을에 들어가자마자 마을 사람 모두가 광수를 붙잡고 울었어.”
“다행입니다.”
“그 시퍼렇게 젊은 것들을 언제까지 이곳에 숨겨둘 수 있겠나?”
“지서에서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마을 사람들을 먼저 만나고, 지서에도 다녀왔지.”
인근 마을은 물론이고, 지서 사람들도 동봉 스님의 말을 정면으로 거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동봉 스님은 70평생을 아이들만을 위해 살았다. 청리산을 끼고 사는 마을의 거의 모든 아이들 이름을 동봉 스님이 지었고, 스님의 침 한번 맞아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도 서에서는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모르겠어. 더 조사를 해봐야겠다고 했는데……, 마을 사람들하고 약속을 해놨으니까. 지서라고 사람 잡아먹는 데는 아니니까.”
“고맙습니다.”
“걔네들이 자네에게 전해달라고 준 편지가 있는데.”
“편지?”
“읽어보게.”
그 아이들의 편지를 들었다.
저희는 동봉 스님을 따라 마을로 돌아가기로 하였습니다. 선생님과 의논하려고 했으나……. 죽음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더 이상 숨어 다닐 수는 없습니다. 다행히 동봉 스님이 저희와 동행해 주신다니 조금은 마음이 놓입니다. 그렇지만 며칠을 뜬눈으로 새웠습니다. 앞일은 조금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죽어도 집에 가서 죽고 싶습니다.
“자네는 어떤가?”
동봉 스님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다.
“전 지금이 편합니다.”
“내가 영훈이 하고 광수한테 행여 이곳으로 올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고 했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꼭 한 번은 자네가 있는 이곳으로 올 것 같아서. 내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느냐고 몇 번 물었을 때도 그들이 바로 결심하지 못한 것은 자네 때문이었어.”
“알고 있습니다.”
동봉 스님의 말을 잘랐다. 스님이 말없이 표지가 해진『달마어록』한 권을 건넸다.
**
다음 날 맑은 아침. 경묵이가 와 있었다. 옷을 갈아입었다.
“왜?”
“서울.”
“잘못하면 서대문 형무소 가기도 전에 마을 사람들한테 맞아 죽어!”
경묵이가 같잖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르지.”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차라리 그렇게 죽고 싶다. 마을 사람들의 몽둥이에 갈가리 찢겨 처참하게 죽고 싶다. 그로 하여 내가 마을에 남긴 상처가 눈 녹듯 사라진다면, 열 번이 아니라 백 번이라도 그렇게 죽고 싶다. 그러나 이제 와서 죽은 사람들을 어떻게 살려내며, 멋모르고 북쪽으로 올라간 내 동무들을 어떻게 다시 되돌릴 수 있는가. 밤낮으로 나를 괴롭히고 있는 것, 그것은 방도가 없는 싸움이다. 언젠가는 군인이나 경찰에게 잡혀 총살을 당하거나, 마을 사람들에게 맞아 죽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결국 내가 나를 죽이고 말 것이다. 잘못하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서울행을 결심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다. 번연히 내게 닥칠 위험을 알고 있었기에, 마지막으로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물론 그녀는 아니다. 그녀는 언제라도 만날 수 있다.
가다가 죽어도 좋다. 경묵이는 더 이상 나를 말리지 않았다. 멍청하게 나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차양이 넓은 모자, 일부러 수염은 깍지 않았다. 그러나 산에 올라온 이후 한 번도 자르지 않았던 머리칼은 대충 잘랐다. 기분이 이상하다. 어쨌든 모든 준비가 끝났다. 나의 소굴을 다시 한번 둘러본다. 이번 외출로 붙잡히게 된다면 이 동굴의 원주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 집을 잃고 헤매는 놈들에게 복을 짓는 일이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밤이면 항상 소리 없이 찾아와 한 차례씩 서성거리다가 가는 놈들에게 미안함. 그래서 내 사물은 유사시 놈들이 생활하는데 조금도 지장이 되지 않도록 깨끗하게 정리했다. 혹여라도 내가 잘못되면 놈들은 행복할 것이다. 그 말 못 하는 것들은 이곳에서 대대로 새끼를 치고 번성할 것이다. 물론 궁극적으로 보면 놈들의 내일도 나처럼 단 하루도 장담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내가 동굴을 떠날 때면 항상 그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경묵이가 동행하여 준다는 것을 마다했다. 이제 더 이상 번거로운 것은 싫다. 경묵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이제 그것이 삶이든, 죽음이든 혼자 걸어가고 싶다. 그리고 처참하게 죽고 싶다. 길거리의 개처럼 방황하다가, 길거리의 개처럼 죽고 싶다. 아무도 나를 위해 울어주는 사람이 없도록.(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