蓮이를 위하여11

  존재를 확인할 길이 없는 짐승들의 울음소리는 마치 앞으로 나를 데려갈 저승사자의 신호 같다. 전쟁 중, 혼자 있는 이런 공포의 시간에 사람들은 그들이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을 때보다 오히려 죽음에 관해서 생각을 덜 하게 된다. 어떤 시기, 이 지상에 죽음의 공포와 극도로 어려운 문제들의 압력이 전에 없이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날 때,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일반적인 의문들은 존재의 배경에까지 미치게 된다. 좀 이상한 발상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보다 완전한, 보다 극단적인 존재양식의 구체적인 언어로 그것을 논하는 편이 훨씬 더 빠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일반적인 노력보다는 우리들의 필사적인 삶의 집착 가운데에 보다 깊고 만족스러운 그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

 단순히 ‘산다’는 사실이 갖는 힘과 아름다움을 활발하게 깨닫게 되는 것은 본질적으로 모든 삶의 구조를 완전히 벗겨버리는 난폭한 과정이다. 그러한 힘과 아름다움은 최악의 격변과 가장 비참한 좌절을 겪는 삶을 통해서만 살아남는다. 가장 냉정하고도 관능적인 기쁨의 전율은 파멸을 가장 완전하게 이해하는 순간에 생성된다. 그리고 단호한 결단과 일관성 있는 행동, 간단히 말해서 보다 광범하며 보다 강력한 창조적 정열에 의해서만 얻어진다.

 그렇게 아끼던 불씨도 꺼지고 성냥도 모두 젖었다. 비를 맞아서가 아니다. 동굴 속에 스며든 습기 탓이다. 담배를 피우기 위해 일어났다. 불을 일으킬만한 아무것도 없다. 그렇지만 난 다행히도 산사람이다. 지금도 산사람이기는 하지만. 흐흐! 경묵이가 갖다 준 이불에서 솜을 꺼낸다. 그리고 그것을 느슨하게 풀어 부피가 커지게 한 다음 가늘게 늘인다. 그다음에 그것을 단단하게 서로 말아 일정한 굵기로 만든 뒤 나무판자 사이에 넣고 끈기 있게 문지른다. 처음에는 천천히 문지르다가 점점 속도를 빨리해서 얼마 동안 계속하면……, 이윽고 연기 냄새가 나고 타기 시작한다. 그러면 재빨리 이것을 꺼내 타기 시작한 부분에서 두 토막으로 끊어낸 뒤 입으로 바람을 분다. 불이 붙어 발갛게 달아오르면 손 안쪽으로 간신히 붙은 불씨를 꺼지지 않도록 보호하며 담배에 불을 붙인다.   

 담배연기가 폐 깊숙이까지 가슴이 터질 듯이 빨았다가 견딜 수 있는 한 오랫동안 연기를 가둔 채 그대로 있다. 그렇게 한 번 불씨를 일구고, 담배를 피우고 나면 한 시간 이상을 누워 있어야 한다. 한 모금 담배를 얻고 치르는 대가가 너무 크다. 그렇지만 담배만이 유일한 친구임을 어쩌랴.

 새벽녘 갑작스런 폭풍우 때문에 동굴 입구로부터 심한 흙냄새가 흘러 들어온다. 그럴 때면 이 냄새를 다시는 못 맡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 햇빛을 보면서도, 구름을 보면서도,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몸이 웬만만하면 위험을 무릅쓰고 동굴 바깥에 나가 마을을 보았다.

 동굴 입구에는 아름드리 굴참나무가 몇 그루 있다. 그것들은 비가 오면 항상 자신들만의 독특한 향기를 불어넣어 준다. 그러면 내 마음 맨 밑바닥이 나도 모르게 삶을 즐기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침상에 누워서 나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놀라울 만큼 기쁨이 넘쳐흐른다. 이제까지 내가 원래 비관적인 사람이며 삶을 대단치 않게 여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진정한 나는 누구보다도 삶이란 것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지금보다 훨씬 행복했던 시절, ‘산다는 것은 죽음의 한가운데 있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 ‘도처에 즐비한 죽음의 위협 속에 있을 때가 오히려 삶의 한가운데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러한 감정의 기복이 있는 것은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얘기다.

 우리들의 삶의 방식은 우리를 땅바닥에 굳게 뿌리박고 있게 했을지언정 심오한 진리 같은 것을 추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자살하려고 했을 때 경묵이는 이렇게 말했었다. “무엇 때문에 서두르는 거냐? 어느 곳에서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은 마찬가지일 텐데…….” 그 이후로 나는 자살을 시도하지 않았다. 사실 경묵이가 말리지 않았더라도 난 결코 자살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를 받아주었고, 나를 길러준 나의 마을 위에서 내가 내 목숨을 끊을 수는 없었다.

 다만 죽음은 삶보다 단순하게 보였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이승의 생명을 잠시나마 연장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혹시 다음날이라도 내 몸이 완전히 낫는다면……, 웃으면서 웃으면서 마을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현되지 않을 꿈을 꾸면서…….

 그러나 아침에 잠깐 눈을 붙이고 의식을 되찾자마자 처음 느낀 것은 아랫배의 통증이다. 심한 이질을 앓고 아직 혼수상태에서 채 깨어나기도 전에 극심한 내부의 통증이 온다. 또 담배를 꺼내든다. 

 팔다리가 마른나무 가지처럼 뒤틀린다. 어저께 삼킨 음식물들이 몽땅 밖으로 나온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돌봐줄 사람도 없다. 약도 없다. 그런데 정신이 이토록 맑아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어디서 이런 의지가 생기는 것일까? 인간의 육체 그 어느 구석에서, 그 많은 모습으로 덤벼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이길 만큼 힘차게 움트고 나오는 것은 무엇일까? 자신을 방어하는 수단을 끊임없이 발견하는 이 불멸의 의지력은 대체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일까? 나 혼자 살아남았다는 데에는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수행해야 할 임무를 갖게 되었다는 느낌이다. 

 이러한 임무는 30여 년 전 이 땅에 태어날 때부터 마련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감히 그 시기를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지는 못했지만, 나의 의지가 살아남기를 희망하면서 오늘도 가쁜 숨을 쉬고 있다. 그리하여 내가 살아남을 희망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그렇게 죽어갈 것이다. 나와 경험을 같이 했던, 그러나 이제 말 못하고 저승으로 간 수 많은 사람들을 대신하여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너무도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침상에 누워 고향으로 돌아가는 노래를 읊조린다. 

중도에서 공왕불 섬기지 말고

지팡이 짚고 본고향 돌아가라

운수(雲水) 조금 가려도 그대여 머무르지 말지니

설산 그 깊은 그곳 내 아니 허둥대리

생각노니 떠나는 날 옥 같던 나의 얼굴

애달파라 돌아오는 오늘에는 서리 인 귀밑머리 

손 떼고 집 이르니 아는 이란 없는 중

무엇 하나 어머님께 드릴 거란 없도다.

그러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노래를 읊조린다.

본고향 돌아가는 그 일 이미 어긋나니

본래 머무름 없는 바엔 집 임도 아니어라

만년의 솔밭 길은 눈에 깊이 덮이고

저 일대의 봉우리들 구름 다시 가렸어도

빈주(賓主) 화목할 때 그 모두 망경계요

군신 화합하는 곳 이 또한 정중(正中)의 사(邪)

귀향의 노래를 어떻게 불러야 하랴

명월당 앞 고목에 활짝 핀 때아닌 꽃  

『조선 초본록』을 뒤적인다. 그 책 속에 낯익은 이름이 보인다. 동자꽃. 동자화 등으로 불리는 석죽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조선 중부 지방의 산야 및 북부 지방의 산지에 자라는데 특히 강원도 북부의 산간에서 많이 자란다. 높이는 50~90센티미터까지 자라며 6월부터 8월 사이에 꽃이 피는데 꽃은 수레바퀴 모양으로 황색이 섞인 붉은색이다. 종자가 익는 9월에 씨앗을 채집하거나 봄에 옮겨 심는다. 꽃이 탐스러운 동자꽃에는 애달픈 전설이 깃들어 있다.

 어느 겨울, 깊은 산골짜기의 조그마한 암자, 한 스님이 어린 동자를 두고 잠시 하산하게 된다. 그러나 눈이 너무 많이 내려 그 겨울 암자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듬해 봄이 되어서야 스님은 산에 오를 수 있었다. 암자 가까이 왔을 때, 스님은 동자가 마을을 바라보고 앉아 그대로 얼어 죽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스님은 그 자리에 동자의 무덤을 만들었는데 그 무덤에서 이름 모를 풀이 자라나 여름에 꼭 동자가 웃는 것처럼 고운 꽃을 피웠다. 이 꽃은 항상 마을 쪽을 바라보고 있어 죽은 동자의 한이 꽃으로 피었다 하여 이때부터 동자꽃으로 불렸다.

 이 전설을 증명이라도 하듯 청리산의 동자꽃들도 모두 산 아래쪽을 향하여 꽃이 핀다. ‘기다림’이란 꽃말의 이 풀은 여름 산 녘의 멋진 야생화다. 내 동굴 앞에도 무수히 자라는 꽃, 내가 죽으면 내 무덤에서 동자꽃이 피어날 것이다. 오늘도 꽃잎이 떨어진 빈 동자꽃은 마을을 보고 있다. 나도 마을을 보고 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