蓮이를 위하여 8
(©장명확)
그러나 난 해방 전 전혀 그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녀도 내게 그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첫 만남, 그와 이야기를 나눈 것은 남로당의 제일 상층부 아지트에서였다. 핵심 간부들조차도 그 집은 알지 못하는 청주 큰 개울 옆에 있는 아담한 집이었다. 집 옆에 우물이 있었고, 건너편 대문 오른쪽 담 옆에 측간과 헛간이 있고 개울이 흘렀다.
그전에 그녀가 있다는 그 청주 집을 먼발치에서 확인해 둔 적이 있었다. 신의주에서 그녀는 서울로 왔고, 다시 청주로 내려왔던 것이다. 그곳에서 그녀는 7명으로 구성된 아지트의 키퍼 중 한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살림을 책임지는 역할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살림을 살지는 않았다. 그녀가 맡은 역할은 박헌영이나 김삼룡을 비롯한 남로당 핵심 간부들의 건강을 돌보는 일이었으며, 그녀는 그곳에서 두 달 이상 생활했었다.
그때 그녀는 윗방을 썼고, 박헌영은 아랫방을 썼다. 그녀를 찾아갔다가 본 사람은 살림을 사는 낯선 여자와 정태식, 김삼룡이었다. 그때 왜 그녀를 찾아갔는지 지금은 기억할 수가 없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서울을 다녀오다가 그녀가 있다는 청주로 무턱대고 찾아갔었다. 아니면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라기보다 박헌영을 만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그녀가 미리 각본을 짰는지도 모를 일이다.
“군은 고향이 어딘가?”
“경북 상주 산골짝입니다.”
“통일된 조국에서 뭘 하고 싶은가?”
“논을 갈고, 밭을 갈고 싶습니다.”
그를 만나면 할 이야기들을 밤새도록 준비했는데도 어째서 그렇게 어리석은 말이 그렇게 쉽게 나갔는지 모른다. 그와 얼굴을 맞닥뜨리자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를 볼 때면 매번 그랬지만 그저 숨이 차올랐다.
“농부?”
“다른 재주가 없습니다.”
그때 그의 손이 내게 살며시 다가왔다. 그리고 내 손을 힘차게 잡았다.
“우리 보경이가 좋은 동지 하나 얻었구먼.”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그녀는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선생님 고향 아시죠? 충남 예산, 그곳 신양리에요. 무사히 과업을 완수하시면 선생님은 그곳에 가셔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꿈입니다.”
약간 단발머리, 금테 안경을 쓴 그녀는 위험을 무릅쓰고 청주역까지 마중을 나왔었다. 그때 나는 그녀와 박헌영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묻지 않았고 그녀도 말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형숙의 소개로 그녀가 신의주에 있을 때 만났을 것이라고 짐작만 하고 있었다. 그 후로 나는 이름만 올라 있는 허명의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박헌영 선생의 정식 남로당원이 되었다.
그녀가 박헌영과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같이 하였는지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는 신의주에서 있을 때, 또 서울의 안국동 행림서원에 있을 때도, 그리고 광주에서 박헌영이 벽돌 공장을 할 때에도 같이 있었다. 다른 세포원에게 들은 얘기로는 박헌영이 그녀를 친딸보다 귀하게 여기고 있다고 했다.
그 당시 그녀는 정확하게 김삼룡이 위원장으로 있던 서울시 당 선전부 부부장이었다. ‘부’자가 붙은 직책은 이론이나 조직에 뛰어난 실권을 가진 사실상의 책임자들이다. 그들은 밑에 각 부장이나 구당 책임자를 두어 어떤 일이 있어도 전면에 나서지 않고 뒷전에서 지시만 하였다. 그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법이 없었다. 부장의 세포원이 각 블록을 돌아다니며 지시 사항을 전하고, 다시 그 블록의 장이 자신의 세포원을 통해 쪽지로 지시를 내리곤 하였다.
지구당의 각 부서는 부서별로 아지트를 두고 일정한 간격으로 또는 부정기적으로 이동했다. 어느 곳이나 낮에 모여 사무를 보는 아지트와 저녁에 침식을 하는 아지트는 엄격히 분리되어 있었다. 아지트에서는 정기적으로 세포 회의가 열렸다. 당원이 7명 정도 모이면 조직 지도원은 이들을 묶어 떨어져 나간다. 야체이카, 세포의 책임자를 우리는 이렇게 불렀다. 서울 종로구 안국동의 행림서원과 꼭 같이 경운동의 우리서원 또한 그녀가 활동하던 주요 아지트였다.
……광주 벽돌 공장 벽돌 속에서
아-우리네 그리워 부르다가 쓰러질
이름이여 모습이여 박헌영 선생이 오셨다
목만 쳐들고 아우성만 치는
눈물이 먼저 솟아나는 인민들
당신이 가장 사랑하시는 띠끼우고 억눌리운
사람들 가슴 옆에 당신은 오셨다
당신은 벌써 우리 아우성 소리의 숨결이며
눈물이며 피여져……
아니 당신은 조선의 흙이오 바람이리라
1947년 한 좌익 신문에는 이렇게 박혀 있었다. 그녀는 격앙된 음성으로 그 시를 내게 읽어 주었다. 큰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신의주, 그녀가 가장 행복한 얼굴을 하였을 때가 바로 그때였다. 그녀는 그 시를 읽으면서 입에 거품을 물었다.
“이형숙 선생님이 며칠 있으면 선생님 한 분이 오시는데 그분은 세상에서 너무 소중하고 훌륭한 선생님이기 때문에 부모처럼 소중히 모셔야 한다고 수없이 많이 말을 해 줬어요. 며칠 후에 머리는 밤송이처럼 새카맣고 키는 나보다 그리 크지 않은 사람이 얼굴 넓은 김삼룡 동지하고 청주로 오셨어요. 그분이 선생님이셨어요.”
그녀는 박헌영을 이야기할 때면 늘 얼굴에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녀의 유일한 자랑은 박헌영이었다. 그러나 박헌영이 서울을 버리고 평양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난 그녀가 문경 새재 밑의 느티나무를 붙잡고 혼자 우는 것을 보았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녀도 박헌영이 북으로 올라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앞으로의 일을 짐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녀만큼 실망하지는 않았지만, 나 또한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배신감에서가 아니라 박헌영의 앞날을 염려해서였다. 그녀에게 박헌영은 신이었다. 그 당시 한 신문사에서 남한만의 대통령 후보자 여론 조사를 했는데, 이승만이 무려 29%의 표가 나왔는데 비해 박헌영은 겨우 1%의 지지밖에 나오지 않았다며 통곡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북으로 올라간 박헌영의 옆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는 철저하게 남조선 사람이다. 북에는 조그만 연고도 없다. 더구나 충실하게 따르던 이주하와 김삼룡도 없다. 이현상 또한 죽었다는 소문이 분분하다. 그렇다면 김일성이 그를 어떻게 대할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박헌영이 북조선의 부수상이 되고 외상이 되었을 때, 그녀는 그런 기사가 실린 신문을 보다가 찢어버린 일이 있었다. 박헌영이 북조선의 수상이 되어야 한다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김삼룡, 이주하, 정태식이 붙잡혔을 때 박헌영은 이미 식물인간이었다.
그 후로 그녀는 항상 청수를 준비했다. 그것은 그녀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졌다. 아침저녁으로 맑은 물을 윗목에 떠놓고 치성을 올렸다. 물론 흰 치마저고리를 단정하게 입고. 나는 그 제례 행사에 참여할 의사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골수 남로당원인 그녀가 날마다 치성을 올린 것은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다. 하기야 그녀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어찌 그뿐이랴. 어떻든 그녀가 양장 대신 흰 치마저고리를 입고 절을 하는 모습은 보기 좋았다.
난 동굴 속에 누워서 그녀를 생각할 때면 항상 그때 그녀의 모습을 떠올린다. 약간 풀 냄새가 나던 그 흰옷. 그녀는 그 의식의 의미를 한 번도 설명하지 않았고, 감추려고 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당시에 퍼져 있던 민중 종교의 영향을 받고 있지 않았나, 짐작할 뿐이었다. 입속으로 무어라고 중얼거리며 주문을 외우는 것도 여러 번 보았다. 지금 나는 누워서 그녀가 외운 주문을 외운다. 그러면 주문 때문인지,(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