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이 법사(사진=법보신문)
“人生七十 古來希”는 옛말이 되었습니다.
80代의 늙음을 향해 매진(?)해 오시는 나이의 후배님들께 나날이 다가오는 늙음의 증조와 그에 대한 대안(代案)의 성(聖)스러운 살핌의 글입니다. 더불어 특정인의 일이 아님도 말씀드립니다.
Buddha보다 오래 살고 있습니다.
3독의 번뇌와 괴로움만 키워가면서…
살아 있다는 사실을 몸의 생물학적 견해로만 대다수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마음의 변화는 놓지고 몸의 늙음만 얘기합니다.
24시간의 하루가 모여 365일이 되면 1년이라 하고 한 살을 더 하는 것이 우리 사람들의 나이 계산법입니다.
그 365일이란 것이 광활한 – 그야말로 광대무변한 우주법계 중 태양계의 일각일 뿐입니다. 지구가 24시간을 서에서 동으로 자전하면서 태양을 한 바퀴 돌았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지구라는 푸른 별에 얹혀 80번도 넘게 뜨거운 태양을 돌았습니다. 돌 때마다 봄,
여름, 가을, 겨울도 겪었습니다. 태어남과 자람과 늙음이 쉴 새 없이 진행되다가 이제는 늙음만이 지속되고 드디어는 죽음만을 향하는 나이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엇이 늙었다는 것인가?
정신과 물질로 형성된 “나”라고 하는 개체가 마음은 그대로인데(정신) 몸만(물질) 변해 늙었다고 합니다.
과연 무엇이 늙음의 현상인가?
ㅇ. 몸부터 살펴보면
하얘지는 터럭들 – 머리털부터 눈썹 등
바스러지는 뼈 무더기 – 이빨에서부터
주름진 피부 – 얼굴, 목, 몸통까지
구부러지고 – 등도 허리도.
2500년 전 붓다가 설하신 늙음 현상 외에도
굼뜨고, 무뎌지고, 걸음걸이가 후들거리고
신발이 땅에 끌리고, 금세 피곤해지고
헛소리도 들리고, 시야가 침침해지고 등등…
ㅇ. 마음의 늙음도 살펴봅시다.
어벙해지고, 생각들이 오락가락, 집중력도
무뎌지고, 깜빡깜빡, 오늘이 며칠 무슨 요일
인지도 가물가물, 친지들의 이름조차도
망각이나 건망이 아닌 희미해지는 기억들
그런대로 옛것은 오롯하나 방금 있었던 일
들은 가물거립니다.
이와 같이 몸과 마음의 늙음이라는 변화는 다 열거하기가 힘듭니다. 각자의 업에 따라 조금씩의 차이는 있겠지만…
처음 이 늙음이라는 증조를 인식해 갈 때
누구라도 늙음이라고 인정하기가 싫은 일입니다.
“어쩌다 이런 병에 걸리게 되냐”고 억울해 하고
많이들 의학적 처방을 받아 병명을 지어 받고,
그 치료 약으로 약봉지와 약병만 늘어납니다.
과연 현대 의학은 무엇을 위하여 연구하고
치료하는가도 생각게 합니다.
그러나 의학의 발전은 늙음을 지연시키고
나아가 수명 연장이라는 아이러니를 낳고 있습니다.
예부터 늙지 않고 오래 사는 비결을 찾아, 의학자가 아니더라도 자기의 권세와 부를 쏟아부으며 헤매었으나 그 답을 얻었는가?
의학은 그걸 위해 매진하며 또 다른 부작용으로
새로운 병을 만들고 처방과 치료를 하며 그것들이
도움이 되기는커녕 위협이 되는 것도 보고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의료도 – 그 어떤 부와 권세와 강한 것도, 이 늙음을 한 템포 늦출 수는 있어도 없앨 수도 피해 갈 수도 없음을 성聖()스럽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러한 늙음의 현상들이 몸과 마음의 관리 소홀도
아니요, 더욱이 어떤 절대자의 저주와 형벌도 아니
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러운 자연의 섭리요, 무상(無常)의 스테이지에서 일어나는 일일뿐입니다.
모든 존재가 생명이 있건 없건 겪어가는 자연 섭리의 한 과정이요, 모든 존재가 생명이 있건 없건 “영원불멸”은 하나도 없음을 밝히는 무상의 무대 위에 “항상함은 없다”는 진리를 증명할 뿐입니다.
Buddha라는 대성인은 이 “늙음이라는 것”을 고통의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4성제(四聖諦)에서 4고(苦) 중에
업에 의해 어쩔 수 없는 태어남(生) - 늙음(老) -
이어 병(病) 들고 – 죽어가는(死) 과정을 밝히셨습니다.
반론(反論)의 여지가 없는 성스러운 진리입니다.
그래서 4성제 중의 “늙음”을 성찰(省察)하기 때문에
이 글은 노(老)의 성찰(聖察) - 성스러운 살핌의 글입니다.
한 살이의 4고(四苦)를 성찰해 봅시다.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자연의 섭리를 사람들은 많이도 부정 아닌 부정 속에서 투쟁해 왔습니다.
위의 네 가지의 본질을 살펴봅시다.
ㅇ. 왜 죽지? - 아! 병 때문에 죽는구나!
ㅇ. 왜 병드는가? - 늙음이 병인(病因)입니다.
ㅇ. 왜 늙는가? - 태어났기 때문이다.
ㅇ. 왜 태어났는가? - 모른다.
태어남의 생물학적 견해는 미완의 과학이라는
학문으로 분석 규정하는 바는 –부모로부터
라고-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불자(佛子)들의 인식과
답은 또 다른 맞는 말을 증명합니다. -업생(業生)-
태어나는 이의 전생, 선업에 의해서 사람으로 태어났다.
가설이 아니고 사실입니다.
과학의 규정이나 불자들의 견해 앞에서 우리는
늙음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하며 살아가야 되는가?
우·비·고·뇌와 비탄과 아쉬움에 묻혀야만 하는가?
아니다. 본질을 알고 나면, 그 답은 환히 드러나는 것.
비탄과 아쉬움의 뒤안에 있는 우리들 삶의 3독(三毒)을
살펴 가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알아가지 않겠습니까?
탐진치를 버리고 관용과 자애와 지혜의 무탐,
무진, 무치의 정신(마음) 세계가 우리 불자님께는
Buddha의 최고 선물로 주어져 있습니다.
육신을 선행하는 마음 작용을 살피며 살아갑시다.
이와 같은 업의 덩어리인 육신은 선행하는 마음
작용으로 늘 잊지 말고 “몸”과 “마음”을 살펴
가는 – 수행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늙음에 노추만 있는 것일까?
늙음의 미학(美學)도 살펴보는 것도 그 답임을 압니다.
늙어 보니 좋은 것도 많음을 살펴 갑니다.
매달려온 지난 세월들은 끝없는 다툼으로 무진장의
업을 지으며 살아왔습니다. 선업도 더러 있는 것 같으나
불선업이 더 많았음을 보게 되는 나이이다 보니,
왜 그랬을까?를 반복하며 되돌아봅니다.
근원은 탐·진·치 3독이었습니다.
그러나 늙어 보니 그 3독도 부질없음을 알게 되었고 무엇이 옳고, 그름인가도 알게 돼갑니다. 나잇값이죠.
3독이 환영같이 희미해짐을 보아 가는 늙음의 나이
그래서 평안해져 가는 나이.
어떤“ISM”이나 “IST”에도 물들일 없는 나이
그래서 정신과 물질 – 마음과 몸의 노쇠까지
더하여 굼떠짐이 오히려 Sati(사띠-알아차림)
하기에 좋은 조건, 여유롭고 굼뜨니 의도와 마음과
행위의 인터벌이 길어지니 여유롭게 매 순간을 놓치지
않아 좋습니다. 젊었을 적 번뇌 망상의 자리를
Sati가 자리해 갑니다.
“늙음 + 수행”이 필수의 관계여야 합니다.
명상 중이나 일상생활 중의 알아차림 중의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보는 것이 젊었을 적 보다
성성합니다. 그래서 무상, 고, 무아를 직관하기
좋습니다. 모든 지혜의 숙성과 지속이 유지되는
현상들이 체험을 통해 체감됩니다.
그래, 늙음의 미학(美學)들이 이뿐입니까? 세속(世俗)에서의 도움도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ㅇ. 모든 일에 감사하게 되고
ㅇ. 늙음과 질병도 친구로 알아 같이 가며
ㅇ. 매일 적당량의 운동과 섭생이 더불어 필수임을 알고
ㅇ. 관혼상제에 불참해도 결례가 아닌 나이
ㅇ. 이런저런 얽매임에서 자유로운 나이
ㅇ. 해가 바뀔 때면 유언장을 써둡니다.
거창한 성공의 신화나 무용담이 아닌 참회의 글로…
어떻게 사는 것이 선업이냐 하는 것을 위주로…
ㅇ. 그 많은 술친구, 노는 친구 다 없어가고, 왕래하는
친구가 한 손으로 헤아려집니다.
ㅇ. 무독지정으로 키웠던 자손(子孫)들도 도의적 상봉
외에는 뜸해져 갑니다.
그래서 외롭다 하고 괴롭다만 할 것인가.
이와 같은 깊은 성찰(聖察)은 명상뿐입니다. 수행뿐입니다. 혼자서 즐기고 선업공덕 쌓는 일은 명상수행뿐입니다. 명상의 생활화 습관화가 지상의 일입니다.
매월 5~6회의 병원 출입과 7-8가지 치료제와 영양제를 먹으며 적당량의 운동 후엔 매일 3회 이상 1시간의 명상이 생활화 습관화하고 보니, 그 어떤 통증이나 번뇌 망상에서 오는 온갖 질병들이 사라지고, 평온을 유지해온 체험을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