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랑대사 목상 이야기
희랑대사 목상
금강산의 보덕굴을 연상케 하는 해인사 희랑대는 희랑대사가 창건한 토굴이다.
당시 해인사에는 모기가 많아 수행자들이 고통을 하소연하였다. 희랑대의 희랑스님은 당신 가슴에 구멍을 뚫어 모기들을 불러 실컷 피를 빨게 하였다. 배가 부른 모기들은 큰절에 내려가지 않아도 되었다.
심장에 구멍을 내어 모기를 배불리 먹인 희랑대사의 목조각 가슴에는 큰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티벳과 일본 불교에는 스승들의 형상을 열반 후에 유골과 진흙을 섞어 소상으로 봉안하여 모신다. 돌아가신 것이 아니고 입정에 들어 계신다고 여기고 차와 향을 올리고 예배를 드린다.
삼국유사에 보면 원효대사 열반 후에 원효 소상을 모시고 설총이 아침마다 예배하였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면 고개를 돌려 아들을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의 쿄토 선림사에는 뒤돌아보는 아미타여래가 봉안되어 있다. 이 불상은 원효의 설화를 배경으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한국불교에서는 고승 입적 후에 진영을 제작하여 영각에 봉안하지만 조각으로 형상을 조성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희랑대사 조각상은 특이한 성보문화재에 속한다. 신라 말 고려초에 살았던 스님은 화엄학의 종주였다.
고려 건국 당시 해인사 승려들은 견훤을 지지하는 남악파와 왕건을 지지하는 북악파로 나뉘어 있었다. 희랑대사는 북악파의 종주였다. 학문과 신통이 뛰어난 희랑대사는 최치원과 시문 교류가 많았으며 고려의 균여대사도 희랑의 법통을 잇고 있다.
희랑대사 목상 부분
10세기에 조성된 희랑대사 목상은 사후에 제자들이 만들어 모신 게 아니고 화가들이 자화상 그리듯이 희랑스님 자신이 자신의 모습을 직접 조성하였다고 전해진다.
희랑스님은 학문뿐 아니라 조각예술에도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얼굴은 길고 이마에는 주름살이 깊게 파여있다. 자비로운 눈매. 우뚝 선 콧날 잔잔한 입가의 미소는 노스님의 인자한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여윈 몸에는 흰 바탕에 붉은색과 녹색점이 있는 장삼을 입고 그 위에 붉은 바탕에 녹색띠가 있는 가사를 걸치고 있다.
신라 때 가사 매듭고리도 스님의 뒷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다.
희랑대사의 형상을 통하여 신라 말 고승의 모습을 우리는 직접 친견할 수 있으며 그때 입은 가사와 장삼도 알 수 있다.
몇 조각의 나무를 이어 형상을 만들고 건칠 조각 기법으로 세밀한 모습을 다듬어 삼베를 입히고 도사한 다음에 석채 채색을 한 것이다.
해인사 성보박물관에 가면 가야산을 지키며 왕건의 스승 역할을 했던 희랑대사의 진신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