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망비와 칠층탑 

대웅전에서 볼 때 오른쪽에는 능해 월승 대종사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있습니다. 비석에는 대종사가 해방이 되던 해에 화엄사를 접수하여 해광사를 창설하고 개조 증수한 사항, 한국전쟁에서 전몰한 수천(數千) 영령을 봉안위령(奉安慰霛)한 사항, 1966년에 약사사를 본산으로 대한불교화엄종을 창종하여 종정에 취임한 행장 등을 새겼습니다. 

비석을 읽으면서 예전에 만월산 약사사를 탐방했었는데, 이렇게 해광사를 찾아온 것은 월승 스님과 전생에 어떤 인연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왼쪽에는 칠층 석탑이 서있는데, 이제까지 보아왔던 탑과 조금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탑을 세울 때 탑 재료인 무거운 돌의 무게를 받쳐줄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는 땅에서 올라오는 나쁜 영향을 피하면서 탑의 위엄을 높이려고 기단을 설치하고, 그 위에 몇 층의 탑을 세웁니다. 그런데 이 석탑은 흙에 묻혔는지 지대석은 보이지 않았고, 기단 위에 곧바로 1층 옥신이 올랐는데 옥개석의 윗면 넓이에 맞춘 다음 층의 옥신이 계속 올라앉았습니다. 또한 상륜부를 이루는 윗부분을 보륜이나 보주로 꾸미는 대신 맨 위층 옥개석을 다듬어낼 때 연꽃 봉오리를 붙여서 올렸습니다. 옥신 네 개의 면 모두 사각형의 액자 형태로 얕게 파낸 다음 부처님의 좌상을 새겼으니 석탑에는 부처님 28분을 모신 셈입니다.   

부처님의 수인은 모두 오른손이 가슴 중앙 부분에 이르렀고 왼손은 단전의 중앙에서 오른손을 떠받치는 자세여서 어떤 수인을 나타낸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강점기 때 절 이름이 화엄사였기에 혹시 비로자나불의 “지권인”이 있을 수도 있기에 열심히 둘러보았지만 이름을 화엄사로 지었을 뿐 비로자나부처님을 주존으로 모시는 화엄종파의 절이 아니었나 보다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일본에서 온 석공이 조각을 했을 것인데, 모두 같은 수인이 아니라 항마촉지인이며 전법륜인 선정인 등으로 다양하게 새겼더라면 탑을 보는 즐거움이 컸을 거라는 아쉬움이 일어났습니다.

탑을 세운 지 130년 정도가 되었으니 먼지와 빗물이 주는 때를 피할 수 없었을 터이고, 다른 석재보다 훨씬 더 단단하다는 화강암도 군데군데 얇은 층으로 벗겨지고 풍화되어서 ‘세월이 지나면 대천세계도 무너지고 수미산과 큰 바다도 달아 없어지고 말라버려서 남아나는 것이 없음(劫火洞燃 大天俱壞 須彌巨海 磨滅無餘)’을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대웅전 벽화

정면 3칸 측면 3칸의 아홉 칸 집 대웅전이, 강점기 때 세웠던 화엄사 대웅전이 있던 자리에 지어졌음은 충분히 짐작되는 일입니다. 

동국사 마당에는 일본 조동종 종무총장의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을 본받아야 한다며 일본 문화를 강요하여 민족적 자긍심과 존엄성을 훼손하는 행위를 사죄한다’는 “참회와 사죄의 글”을 비석으로 새겨 놓았습니다. 동국사의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기에 참회와 사과의 비석을 세울 마음이 일어났을 겁니다. 화엄사 대웅전이 사라졌든 남아있든 또 참회하는 비석을 세우고 안세우고를 떠나서 진정한 참회의 마음이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예불하려는 마음에 측면 쪽 문을 보니 코로나19 탓인지 자물쇠가 걸려있어 대웅전을 돌면서 벽화만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화려하게 단청된 공포 사이의 삼각형 모양의 포벽마다에는 부처님의 결가부좌를 한 모습을 그렸는데, 탑에서 보았던 것과 다르게 모두 다른 수인을 취한 자세입니다. 

평방 위쪽으로는 날짐승의 접근을 피할 목적으로 부시를 놓았습니다. 날짐승이 날아들면 뱀이 오고, 그로 말미암아 벌어지는 살생을 피할 목적으로 설치하지만 새들의 분뇨로 단청이 오염됨을 방지하기 위함이 맞을 겁니다.

해광사 대웅전에는 다른 절과 다르게 정면을 제외한 세 개의 벽 모두에다 비천이 하늘을 날며 젓대며 생황 그리고 비파를 연주함으로써 불국토를 장엄하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부처님께서 대중들에게 법문하시기에 앞서 삼매에 드실 때 기원정사는 스스로 홀연히 넓어지면서, 많은 보배들이 장엄되었고 꽃물결과 함께 불법의 소리가 울려났으며, 하늘에는 구름이 향기와 음악소리를 내리고, 천녀들이 부처님의 위신과 공덕을 나타내는 깃발을 들고 날아다녔습니다. 

대웅전을 기원정사로 삼은 이 벽화는 비천이 부처님을 공양하고 찬탄하며, 하늘에서 천상의 음악을 연주하는 광경을 그려낸 것입니다. 눈 감고 그 광경을 상상할 때 연주 소리가 들린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부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일 것입니다.

지장전 

대웅전을 돌면서 벽화를 보던 중 오래된 붉은 벽돌집을 보았습니다. 한눈에도 제국주의 일본이 우리나라를 점령하면서 싼값으로 지은 벽돌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면 어간에 출입구를 냈는데 출입구가 눈비에 맞지 않도록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씌웠습니다. 출입문은 한때 유행하였던 알루미늄의 미닫이문이 있고, 밖에는 벽체에 돌쩌귀를 꽂고 철제 여닫이문을 달았습니다. 영락없는 창고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양 측면 창문은 철판으로 막았는데, 창문 양쪽에 돌쩌귀가 달린 것으로 철제 창문이 설치됐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분명 집 안에서 벌리는 나쁜 행위를 감추려는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처음 화엄사를 지을 때 이렇게 흉하게 하지는 않았을 터이고, 이렇게나 우악스러운 모습이 된 것은 6․25전쟁 중 인천이 북괴에 점령당했을 때였을 것입니다. 말을 못 해서 그렇지, 흉한 모습으로 철거되지 않으면서 70여 년을 모질게 버티면서 감당한 벽돌집의 아픔에 가슴이 저려집니다.

벽돌집은 용마루가 짧아 맞배지붕 집처럼 보입니다. 기와는 수키와와 암기와가 한 몸체인 일본 기와를 올렸습니다. 출입문 지붕에도 일본 기와를 올렸지만 처마를 이루는 곳에는 전통 한옥 지붕에 쓰이는 무궁화와 태극무늬의 수막새 암막새로 마감을 해서 부조화가 연출되었습니다.    

붉은 벽돌집은 지장전입니다. 벽돌집을 지을 때 이 건물을 법당의 목적으로 짓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동국사에서 본 일본식 법당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문을 들어서서 지장보살을 협시하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보고서야 이곳이 지장전임을 알게 합니다. 바깥에 왜 현판을 걸지 않았을까? 하는 의아심이 들었습니다. 건물의 생김이 현판을 걸 자리가 마땅치 않으니, 출입구 양쪽 기둥에 지장보살의 위신력을 칭송하는 주련을 걸었으면 하는 생각이 불현듯 일어났습니다.

지장보살 좌우에는 각각 다섯 명씩 명부를 다스리는 시왕이 자리하였습니다. 시왕의 끄트머리에는 시왕의 재판을 보조하는 판관과 녹사 그리고 명부를 지키는 인왕이 위압적인 자세의 섰습니다.  

시왕의 뒤편에는 각 대왕이 망자를 재판하는 모습을 그린 탱화가 걸렸습니다. 탱화에는 시왕 앞에 오랏줄로 묶인 망자와 생전에 쌓은 망자의 죄와 업장을 보고하는 녹사,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두 손을 싹싹 비는 망자, 생전의 업을 보여주는 업경대 등이 그려졌습니다. 

지옥 열 곳의 모습을 담은 시왕탱화 곳곳에는 ‘지옥이 모두 텅 비게 되는 날까지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큰 서원을 세운 지장보살이 육환장을 든 모습으로 등장하였습니다. 이것은 영화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름난 변호사가 명쾌한 변론으로 피고인의 무죄를 밝히고 감형을 이끌어내는 것처럼 망자가 겪을 지옥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구원의 손길을 뻗치고 계신 지장보살을 나타낸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시왕탱화를 볼 때마다 중생을 구제하시고, 또 고통을 같이 하시려는 큰 서원으로 보살도를 이루어낸  '대원본존지장보살(大願本尊地藏菩薩)'을 칭송하게 됩니다.

천정은 나무반자로 바둑판같이 가지런한 우물천정을 만들었습니다. 반자 칸칸마다 연꽃을 가득하게 그려서 하늘에서 연꽃이 떨어지는 듯합니다. 벽에는 대웅전 외벽의 벽화처럼 하늘을 나는 천녀와 두 명의 동자가 꽃을 공양하는 그림이 그려졌습니다. 

지장전을 나와서는 불에 타서 무너지던 숭례문이 떠올랐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붉은 벽돌로 건축된 많은 시설물이 해방 후 푸대접을 받다가 철거당하는 일이 예사였으니, 이렇게 흉한 모습이나마 남아있음이 다행이라 생각하지만 가슴에 응어리인지 뭔지 모르는 묵직한 것이 들어차 답답해졌습니다. 

그냥 살아가면 되는 걸까요?

해광사를 나서는 출입문 옆에 석등과 함께 특이한 형태의 석조물이 보였습니다. 어떤 목적으로 세워진 석보물일까 하는 궁금증이 컸지만, 생명력이 왕성해지는 시기를 앞두고 속아내 쌓아둔 나뭇가지 묶음에 가려 다가설 수 없었습니다. 

석조물을 자세히 볼 수 없는 대신 쌓여있는 나뭇가지에서 새순이 돋고 싹을 틔운 것을 보았습니다. 동물의 목숨도 아니건만 딱하고 애처로운 모습에 이 나뭇가지도 땅에 꽂으면 살아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간, 법당 벽화에 많이 그려지는 절벽에 늘어진 등나무 덩굴에 매달린 사나이가 떠올랐습니다. 험난한 액난을 피해 등나무 덩굴에 매달렸는데, 밑에서 독사가 노려보는 와중에도 욕심이 주는 꿀맛에 빠져 지낸다는 부처님의 인생무상의 교훈과 비교하는 생각이지요.

가지치기되어 팽개쳐진 곁가지가 뿌리 없어 살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알지 못하고, 햇빛의 단맛에 빠져 싹을 틔우는 것이나 우리가 꿀방울을 즐기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두어 시간을 해광사에 머물렀건만 절에 나 혼자 말고는 들어온 사람도, 나가는 사람도 못 보았습니다. 주택들에 둘러싸였지만 어떤 소음도 들리지 않았고, 간혹 새 지저귀는 소리만 들릴 뿐입니다. 절 구경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예전에는 바다를 내려다보는 전망이 훌륭한 절이었을지 몰라도 이제는 볼거리가 없는 절이다’고 말할 것입니다.

대웅전 주련을 다시 봅니다. 

불신충만어법계 보현일체중생전 수연부감미부주 이항처차보리좌

(佛身充滿於法界 普現一切衆生前 隋緣赴感靡不周 而恒處此菩堤座)

부처님은 온 법계에 가득하게 계시며, 항상 모든 중생들 앞에 나타나시네.

인연 따라 다다라서 두루 보살펴 주시고 모든 곳에 지혜 베풀어주시네.

저는 이렇게 읽었습니다.

볼 것 없는 절이라고 ‘이곳에도 부처님이 계신가?’라 의심치 말아라.

세상 어디인들 부처님이 나타나지 않으시겠는가.

부처님과 인연을 맺는다면 그 자리에서 깨달음에 이르게 하신다네. 

세상의 많은 지식의 대부분이 눈을 통해서 들어옴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눈으로 본 것은 앞모양만 본 것일 뿐, 뒷모양은 물론 속 모양은 더욱 알지 못함도 알고 있습니다. 제가 딱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부처님께서 갖추신 오안(肉 天 慧 法 佛眼) 중 육안만으로 살아가는 저로서는 해광사가 모든 것이 무상함을 보는 혜안을 키우고, 옳고 그름을 벗어나게 하는 법안을 뜨게 하고, 나에게도 태어나고 죽음을 보는 천안의 싹이 있음을 알게 하는 절이었습니다.

사람마다 육안이 가진 능력이 다르듯 천안 혜안 법안의 능력도 사람마다 다 다를 것입니다. 해광사를 찾아 자신의 또 다른 시력을 깨달아보셨으면 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