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정윤경
당신의 소울 프렌드는 누구인가?
정찬주(소설가)
사리불과 목련존자는 요즘말로 하자면
소울 프렌드(Soul Friend), 영혼의 친구라고 할 수 있다.
나에게도 영혼의 친구가 있는가?
오스트리아 작곡가 헤르베르트 빌리(Herbert Willi) 씨는
나를 영혼의 친구라고 부른 적이 있다. 그는 내게 특별한 존재이다.
그도 내가 특별한 존재일 것이다.
몇 년 만에 오스트리아 빈에서 두 번째 만났을 때
그는 내게 자신이 작곡해 놓은 <정(情)>을 이야기했다.
그는 한국인의 정(情)을 사랑과 자비보다 더 높은
최고의 철학적 개념으로 인식하고 9악장의 심포니를 작곡한 듯했다.
빈 시청이 운영하는 ‘빈 콘서트 하우스’ 사무실에서였다.
나는 그가 <정>이란 작품을 설명할 때
구도자가 소(진리)를 찾는 과정의 그림인 <십우도>를 떠올리며 들었다.
그의 설명을 다 듣고 난 뒤 나는 그에게 <십우도>를 이야기해 주었다.
당신이 <정>이란 음악을 찾는 첫 단계는 구도자가 소를 찾는 것과 같다.
영감을 얻었던 단계는 소 발자국을 본 것과 같다.
영감이 음악작품으로 발현되는 단계는 소를 본 것과 같다.
그리고 소도 자신도 잊은 공(空, 본질) 상태에서
원래의 저잣거리(色, 현상)로 돌아가는 맨 마지막 단계는
당신의 작품 주제인 평화와 절대자유를 누리는 것과 같다.
그랬더니 그는 자신의 생각과 일치한다며 몹시 행복해했다.
나는 그것이 바로 본질과 현상은 결국 하나라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을 덧붙여 설명해 주었다.
그의 <정> 이야기는 클래식 뮤직 매니지먼트 회사인
IMK 권숙녀 회장의 국제전화로 계속 이어졌다.
권숙녀 회장은 헤르베르트 빌리 씨에게 나를 소개한 분이었다.
권 회장은 내게 <십우도> 열 가지 그림 이야기를 정리해서
빌리 씨에게 영문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화가인 미국 조카의 도움을 받아 영문으로 번역한 원고를
메일로 오스트리아 권 회장에게 보냈다.
그랬더니 영문을 독일어 문장으로 번역해서 다시 내게 보내왔다.
흥미로운 점은 ‘정’을 독일어로 ‘Dsong'이라고 번역한 것이었다.
이야기가 곁가지로 흐르겠지만 헤르베르트 빌리 씨를
처음 만났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 회상해 보면 이렇다.
오스트리아에서 IMK 회사를 운영하는 권숙녀 회장이 빌리 씨에게
나의 소설 세계를 소개했더니 독일어나 영어로 소개한 소설이 없냐며
당장 만나보고 싶다고 호기심을 보이더라는 것.
내가 1년 후에 가겠다고 대답했더니 빌리 씨가 어떻게 1년이나
기다릴 수 있느냐며 납치해서라도 만나고 싶더라는 것.
결국 나는 빈에 있는 카디널 코닝 하우스(추기경문화회관)에서
<한국인에게 불교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강연하기로 하고
아내와 함께 오스트리아를 방문했다.
물론 강연 전에 빌리 씨가 사는 알프스 몬타폰으로 갔다.
거기에서 나와 빌리 씨는 3박 4일 동안 서로의 인생관, 우주관,
자연관, 음악, 문학 등을 소재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빌리 씨는 신학대학교를 나온 작곡자였지만 불교가 건학 이념인
동국대학교에서 공부한 나와 사고가 거의 흡사했다.
그는 외양만 서구인이었지 내면은 동양인이었다.
더구나 그는 한국을 한 번 방문한 적이 있는데,
해인사에 가서 벽화를 보고 크게 감동받았고,
떠날 때는 서울 봉은사를 찾아가 법당을 참배하고 난 뒤
자신은 전생에 한국인이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공항으로 이동 중에 택시 안에서
한국인의 <정>이란 주제의 악상을 떠올렸다고 말했다.
빌리 씨는 첫 만남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작곡가로 활동할 때까지의 모든 삶을 꾸밈없이 들려주었다.
감정이 북받쳐 올라 어린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기도 했다.
또 알프스 산을 함께 오르면서 해발 1100미터 지점에서
여기서부터 자신의 귀에 자연이 주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그는 그 소리의 음가를 음표는 물론 색연필로 그릴 수 있다고 말했다.
자신은 머리로 작곡하는 것이 아니라
알프스 산이 주는 소리를 받아 적을 뿐이라고 내게 알려주었다.
사람과 자연 혹은 우주는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라는 대목에서는 나의 사고와 완전하게 일치했다.
작년 6월에 빌리 씨가 한국을 방문하여 내 산방에서 묵기로 했지만
코로나 사태로 빈에서 한 약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빌리 씨가 한국에 오면 나는 그를 데리고 한국의 소리,
혹은 동양의 소리가 무엇인지 선사하고 싶었는데 아쉽기 짝이 없다.
내가 그에게 선사하고 싶은 소리는 다름 아닌
순천 송광사 산속에서 울려 퍼지는 장엄한 새벽예불 소리였다.
몇 십 명의 스님이 장엄하게 합송하는 성스러운 소리는
틀림없이 그에게 영감을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올해 2월이나 4월쯤에 빈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그의 작품
<정>을 초연한다며 권숙녀 회장이 우리 부부를 초대했지만
이 역시 코로나 사태로 비대면 공연이거나 유동적이지 않을까 싶다.
모차르트의 미완성 악보를 발견했을 때 오스트리아 정부는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도록 빌리 씨에게 맡겼다고 한다.
빌리 씨가 1956년생이니 모차르트 사후 250년 만의 일이었다.
그런데 빌리 씨는 나머지 부분 일부만 작곡한 뒤,
200년 뒤 또 누군가가 완성해 주기를 바란다며 미완성으로 남겼다고 한다.
몇 백 년의 시공 속에서 사는 작곡자, 하루 한 끼만 식사하는 채식주의자,
전생에 한국인으로서 한국 땅에 살았을 거라는 헤르베르트 빌리 씨가
나를 영혼의 친구라고 불러주는 것이 고맙고 자랑스럽다.
어느 날엔가 그와 만났던 인연을 소설로 쓰고 싶어서,
그가 나라면 써도 좋다고 원했기 때문에
<몬타폰의 빛>이라고만 가제를 써둔 지 벌써 3년이나 지났다.
돌아보면 누구나 자신의 내면에 소울프렌드의 목소리가
저만큼에서 그윽하고 향기롭게 메아리치고 있을지 모른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은 불어온 맑은 바람(淸風)이
그대의 선지식이니 한 자리 차지함을 탓하지 말라는 시를 남겼다.
법정 스님은 혼자 마시는 적적한 차 한 잔이
산중의 유일하고 진실한 벗이라고 했다.
영혼의 친구는 유무정(有無情)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리라.
그렇다면 당신의 소울프렌드는 누구인가?
오늘은 보이차 한 잔을 더 따라 빌리 씨에게 권하며 마신다.<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