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악행 즐기는 것에서 벗어나라
산골 살이 몇 해 만에 절로 소욕지족의 삶을 삽니다. 욕심 과하게 부릴 일 없고, 딱히 무엇을 갈구하거나 갖고 싶다는 욕구도 많이 줄었습니다. 안빈낙도하는 것만으로도 제악막작(諸惡莫作)의 절반은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강희안, 조선 15세기 중반, 종이에 수묵, 23.4×15.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가을걷이가 마무리되고 농한기로 접어들면 농부들에게는 시간적 여유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어르신들은 마을회관에 옹기종기 모여 한나절을 보내고, 몇몇 아낙들이 농사짓다 다치거나 불편해진 몸뚱어리를 고치기 위해 입원했다는 소문도 들려옵니다. 관(官)으로부터 허가를 얻은 한철 포수들이 공기총을 들고 예리한 눈매를 한 채 낙엽 뒤덮인 뒷산(상왕산) 자락을 헤매고, 이따금씩 매와 독수리가 하늘을 배회하며 먹잇감 사냥에 여념이 없습니다. 거님길에 마주친 언덕 너머에 사는 김 씨 아저씨는 엊그제 생포한 멧돼지를 읍내 식당에서 맛나게 요리해 먹었다며 자랑하고, 무릎 수술 후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 돌보랴 심신이 고단한 밤나무 집 어르신은 하얀 입김 길게 내뿜으며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아침나절 코끝을 싸하게 하던 매운 추위는 강터산 옥녀봉 마루에 해 떠오르자 고양이 앞 쥐처럼 부리나케 스러지고, 트럭 지나갈 때마다 짖어대는 살림꾼(진돗개)의 웅장한 목청을 듣다 보면 어느덧 중천입니다. 몸도 마음도 한가로우니 도인이 따로 없습니다. 일주일 전쯤부터 현묘재 오른쪽에 자리한 옥수수밭에 수십 그루의 소나무를 가식하면서 갑자기 조성된 솔숲이 붉은 노을과 어우러져 펼치는 광경은 예기치 않게 찾아온 즐거움입니다.
그러나 마냥 한가롭고 유유자적할 것 같은 산중 생활에도 이따금씩은 생각지도 않은 욕망이 불쑥불쑥 솟구치니, 범부의 때를 여전히 벗지 못했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제법 세련된 막장 드라마들이 넘쳐나는데, 저마다 눈길을 끄는 대사 한 마디를 양산해냅니다. ‘돈은 피보다 진하다’, ‘돈 앞에는 부모도 형제도 없다’, ‘법보다 강한 것이 돈’ 등등의 세태를 꼬집는 속담 같은 대사들이 눈길을 잡아끕니다. 상당한 부(富)를 이루었는데도 만족하지 못하고 온갖 범죄행위를 스스럼없이 저지르는, 아니 악행을 즐기는 캐릭터들이 드라마마다 넘쳐나는 것을 보면 중생의 욕심엔 커트라인이 없는 게 맞지 싶습니다.
‘좋지 않은 것을 혐오하여 삼가라(pāpa ārati)’는, 그러니까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버리라는 당부에 이어 부처님은 행복으로 가는 열아홉 번째의 지침으로 ‘악행을 즐기는 것에서 벗어나라(pāpa virati, 빠빠 위라띠)’고 가르치십니다. 두 지침은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깊이 살펴보면 분명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열여덟 번째 지침이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악행에 대한 경계를 의미한다면, 열아홉 번째 지침은 ‘말’과 ‘몸’으로 짓는 악행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강조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빠빠 위라띠’는 말[口業]과 몸[身業]으로 짓는 악한 행위로부터 벗어나거나 멈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빠빠(pāpa)는 생각, 행동과 말에 의해 악을 짓는 것을 금한다(To Cease and Abstain from Evil)는 뜻을 가지고 있고, 위라띠(virati)에는 악행을 즐기는 것을 멈춘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빠빠 위라띠’에서의 악행은 본의 아니게, 또는 불가피하게 저지르는 악행이 아니라 악한 행위 그 자체를 즐기는 업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는 데 주목해야 합니다.
불전에서는 악행을 즐기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절제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악행 즐기는 것을 삼가거나 벗어난다는 의미를 가진 위라띠에 ‘절제’의 의미가 깃들어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기뻐하는 것에서 벗어난다’는 뜻인데, 이것은 곧 ‘끊음, 절제, 자제’를 의미합니다. <아비담마>에서는 절제하는 마음을 아름다운 마음들 가운데 하나로 설명합니다. 아름다운 마음들은 ‘악한 마음’과 ‘원인 없는 마음’을 제외한 마음입니다. 아름다운 마음들은 유익한 마음들보다 더 넓은 범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마음에는 유익한 마음들과 함께 아름다운 마음부수법들을 가진 과보의 마음과, 작용만 하는 마음들이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빠빠 위라띠’는 팔정도 가운데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의 세 가지를 잘 지키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입으로 짓는 악업과 몸으로 짓는 악업은 물론 또는 생계를 이유로 짐짓 악업을 짓는 것 역시 벗어나야 할 과제라는 것입니다.
위라띠, 즉 절제는 세 가지 아름다운 마음부수들로서, 말과 행동과 생계로 짓는 나쁜 행위를 엄격히 절제하는 역할을 합니다. 세간적 차원의 마음에서 절제는 사람이 나쁜 행위를 할 기회가 생겼을 때 그것을 억제하는 경우에 작용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쁜 행위를 일으킬 기회를 만들지 않고, 실제로 나쁜 행위를 짓지 않으면 그것은 절제(virati)가 아니라 청정한 계율(sila)에 속합니다.
빠알리 논장 <담마상가니>의 주석서 ‘앗타살리니’에서는 세 가지 유형의 절제를 들고 있습니다. ‘자연적인 절제’, ‘계율을 통한 절제’, ‘근절을 통한 절제’ 등이 그것입니다. ‘자연적인 절제(sampatta-virati)’는 나쁜 짓을 저지를 기회가 생겼을 때 자신의 사회적인 지위나 나이 교육의 정도 등을 고려하여 그것을 절제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컨대 도둑질을 하다가 붙잡히면 자신의 명성에 큰 타격이 생길 것이라는 점을 우려해서 절제하는 것이지요. ‘계율을 통한 절제(samadana-virati)’는 자신이 계율을 지키기로 다짐했기 때문에 나쁜 짓을 절제하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면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음주의 오계 등을 지키는 것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세 번째로 ‘근절을 통한 절제(samuccheda-virati)’라는 것은 출세간적 도의 마음과 연결된 절제로서 나쁜 짓에 대한 모든 성향을 근절하면서 일어나는 절제입니다. 앞의 두 가지 절제가 세간적이라면 세 번째 절제는 출세간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절제를 통해 말과 행위, 생계에서 빚어지는 악행에서 벗어나 바른 말과 바른 행위와 바른 생계를 영위하라는 가르침인 열아홉 번째 행복 체크리스트, ‘악행을 즐기는 것에서 벗어나라(pāpa virati)’는 실천하기 매우 어려운 지침이기는 하지만, 일단 의식적으로라도 지키겠다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수행정진을 통해 인격이 완성됨으로써 저절로 절제가 실행된다면야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외부의 시선이 두려워서든, 규율에 묶여서든 일단 절제하는 마음을 통해 악행을 그치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청정도론>에서는 절제[virati]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몸으로 짓는 나쁜 행위로부터 절제하는 것이 몸으로 짓는 나쁜 행위의 절제이다. 이 방법은 말로 짓는 나쁜 행위의 절제, 그릇된 생계의 절제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이들 셋의 특징은 몸으로 짓는 나쁜 행위 등의 대상을 범하지 않거나 어기지 않는 것이다. 몸으로 짓는 나쁜 행위 등의 대상으로부터 움츠리는 역할을 한다. 이들을 행하지 않음으로 나타난다. 믿음, 양심, 수치심, 소욕(少欲) 등의 덕이 가까운 원인이다. 마음이 악행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바른 말(정어), 바른 행위(정업), 바른 생계(정명), 이 셋을 절제라고 합니다. 바른 말은 십선업 가운데 말로 짓는 네 가지, 즉 거짓말과 중상모략, 욕설 잡담을 절제하는 것입니다. 바른 행위는 살생과 도둑질, 삿된 음행이라는 세 가지의 몸으로 짓는 해로운 행위를 절제하는 것입니다. 바른 생계는 무기 장사, 사람 장사, 동물 장사, 술장사, 독약 장사 등 재가자들이 해서는 안 되는 그릇된 생계를 절제하는 것입니다. 바른 행위는 바른 말과 연결되어 있고, 바른 생계는 바른말, 바른 행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강희안, 조선 15세기 중반, 종이에 수묵, 23.4×15.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바른 말을 하고 살아라’는 의미의 정어(正語, sammā vācā)를 바꿔 표현하면 ‘나쁜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쁜 말은 ‘말하는 사람이 화가 난 상태에 있는가?’와 ‘악의를 가진 상태에서 말하고 있는가?’의 기준으로 가려집니다. 이 두 가지 기준에 포함되면 나쁜 말이 됩니다. ‘바른 행위를 하고 살라’는 의미를 가진 정업(正業, sammā kammanta)은 ‘몸과 입의 행동으로 나쁜 업을 쌓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널리 베푸는 행위, 남에게 널리 베푸는 행위, 청정한 행동 등이 바른 행위에 해당합니다. 부처님은 많은 설법을 통해 선업과 악업의 과보는 결코 피할 수 없으며, 언젠가는 반드시 드러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온갖 악업을 저질러도 죽으면 그만’이라는 견해는 인과의 엄정함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의 견해라는 것이지요.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실수나 악행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마음을 서서히 고쳐나가는 것입니다. 실수나 악행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게 마음을 만들어가는 정진이 중요합니다. 이런 과정이 부처님께서 강조한 정업의 핵심인 것이지요. ‘바른 생계(正命, sammā ajiva)’는 바른 직업, 좋은 직업에 대한 기준입니다. 독이나 술, 고기, 마약 등을 사고파는 것은 악업을 짓게 하는 좋지 않은 직업이니 갖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지와(ajiva)의 의미는 생계나 직업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아지와는 ‘살아가는 일’이라는 보다 포괄적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명을 바른 생계로만 이해하는 것은 협소한 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명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분명하게 하는 삶의 방법’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바른 생계를 이야기 할때 흔히 재가자가 갖지 않아야 할 직업을 언급합니다. 잘못된 설명은 아니지만 좁은 해석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사실 이런 직업은 가능한 피하는 것이 맞습니다. 정명은 출가자에게도 적용되는 필수 지침입니다. 출가자에게 정명은 올바른 수행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로도 사주나 관상, 점 따위를 보거나 부적 등을 파는 삿된 행위를 수행자가 해서는 안 됩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