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행복수업>을 연재하며
이 글은 <반야심경> 해설서가 아님을 먼저 밝힌다. <반야심경> 해설서는 이미 여러 눈 밝은 선사(禪師)들이 남겼으니 내가 쓴다면 군더더기밖에 되지 않을 것 같아서 접었다. 사실 몇 구절을 새롭게 발견하여 기막힌 해석인 듯 드러내 봐야 서지학적인 굴레를 어떻게 벗어나겠는가. 진리는 하나로 회통하는 것을! 깨달음의 진경(眞境)이 아닌 분별지(分別智)를 드러낸다면 실소를 금치 못할 터이다.
<반야심경 행복수업>은 <반야심경>을 징검다리 삼아 내 인생과 삶을 이야기하는 산문이다. 굳이 장르를 분류하자면 주제가 있는 에세이, 나의 사유가 깃든 중수필(重隨筆) 정도 될 것이다. 독자 분들과 공감하고 소통하기 위해 쓰는 글이지 가르치려고 연재하는 글은 절대로 아니다. 다시 말하면 지식을 전달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내가 자각한 것들을 나누고 싶을 뿐이다. 때문에 매우 주관적인 글이 되겠지만 독자 분들이 공감한다면 다소 보편성을 띤 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연재는 33회를 예감하고 있는데, 무슨 특별한 뜻이 있다기보다 그냥 영감처럼 떠오른 생각이다. 나의 무의식에 저장돼 있던 관음 33응신불(應身佛)이나 33천(天) 우주가 영향을 미친 것일까? 그것이라면 희유한 일이다. -정찬주(소설가)
내 안의 행복을 버리지 말라
정찬주(소설가)
팥죽은 삿된 것을 물리치는
벽사(辟邪)의 의미도 있지만 우리들의 집단무의식 속에
뿌리내린 그 근본은 ‘붉은 해’를 상징한다고 한다.
그래서 하늘의 자손(天孫)이라고 자부했던 우리 민족은
오래 전부터 팥죽을 즐겨 먹어 왔던 것 같다.
추운 동짓날에 먹는 뜨거운 팥죽이 으뜸이겠지만
초가을에 풋고추를 반찬 삼아 먹는 팥죽도 별미다.
내 산방인 이불재 마당 귀퉁이에서는
옥비녀처럼 생긴 순백의 옥잠화가 피고지고 있다.
선방 스님들의 공부기간인 하안거를 해제할 때마다
피는 꽃이라고 해서 ‘해탈꽃’이라고 부른다.
밤안개가 충만한 꼭두새벽마다 내밀한 향기를
귀로 듣게 하여[聞香] 나를 행복하게 했던 꽃이다.
선방 스님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나는
무엇으로부터 벗어났거나 무엇을 내려놓았는지 궁금하다.
그것이 바로 나만의 해탈이 아니겠는가.
나를 건네준 <반야심경>이라는 나룻배의 뱃삯이 아니겠는가.
해탈꽃을 피우지 못하는 ‘어제의 나’로 살아서야
내 삶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타성에 젖은 삶은 ‘어쩔 수 없는 생존’이지
새순처럼 올라오는 ‘거듭 나는 삶’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반야심경>이란 ‘어제의 내 삶’을 ‘오늘의 거듭나는 삶’으로
변화시키고 성장시키고 건네주는 나룻배가 아닐까.
나룻배가 내게 요구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리라.
‘오늘의 거듭나는 삶’이야말로 나룻배의 뱃삯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반야심경 나룻배’를 공짜로 염치없이 타고 다닌
헛걸음질만 한 내 삶을 통렬하게 참회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에 나는 아래 절 스님들을 모시고
아내가 쑨 팥죽을 스님들과 함께 먹은 적이 있다.
여름더위에 시달린 탓인지 밥맛도 떨어지고
아내가 팥죽을 제법 먹을 만하게 쑤어 스님들을 초대한 것이다.
오후 내내 팥죽을 준비한 아내는
스님들에게 팥죽 맛이 좋다는 호평을 듣고 싶었던 듯하다.
내가 보기에도 아내가 쑨 팥죽은
체리와 같은 붉은 빛깔이 좋았고, 잣을 넣어 향기가 났다.
면은 하루 전에 반죽하여 쫄깃쫄깃 했다.
그런데 강원도 서래굴 스님은 환희심 나게 맛있다고 하고,
아래 절의 한 스님은 덤덤하게 잡수시고 갔다.
내가 스님 접대용으로 두었다가 아껴서 우려마시는
부산에서 한약방을 하는 보살이 9년 간 숙성시키어 보낸
보이차를 내려주어도 반응은 팥죽을 잡수실 때처럼 무덤덤했다.
아내가 섭섭하여 내게 뭐라고 한 마디 했지만
나는 짐짓 귀 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아내의 말을 자르며 절에서 많이 듣던 소리를 했다.
“팥죽을 대접했으면 됐지
내가 잘 쑤었네, 못 쑤었네, 마음에 담아두지 마소.
스님들의 반응에도 매달리지 마소. 다 복감하는 일이네.”
불가에서 자주 듣는 복감(福減)이란 복을 까먹는다는 말이다.
자신에게서 행복이 모래알처럼 빠져 나간다는 뜻이다.
복감한다는 말은 결국 집착한다는 말과 같다.
자기가 쑨 팥죽을 상대가 맛있게 먹었느니
안 먹었으니 하는 유무형의 상(相)에 집착함은
내 안의 행복을 버리는, 갈등을 불러들이는 행위인 것이다.
우리가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었던 <금강경>의 한 구절인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以生其心), ‘집착 없이 마음을 내라’는
금싸라기 같은 부처님 말씀도 있지 않은가.
복감의 반대말은 발복(發福)이다.
행복이 꽃처럼 뭉게뭉게 피어난다고 해서 발복이다.
아내가 오후 내내 스님들을 대접하기 위해
무심하게 팥죽을 쑨 자체는 발복하는 행위이다.
거기에는 팥죽을 준비하는 티 없는 마음만 있지 상은 없다.
그런데 한 생각 일으키어 분별하고 시비하고
무엇에 집착하면 그때부터는 복감이 되고 만다.
그렇다. 변화무쌍한 마음 중에서 갈등과 시비,
집착이 붙지 못하는 본래의 마음이 무심(無心)이다.
나라고 고집하지 않는 상을 버린 마음이 무아(無我)이다.
인연을 거스르지 않고 인연 따라 무심으로 살며
나를 내려놓고 무아로 살 줄 알아야만 세상과 다투지 않으리.
나와 이웃이 한 몸이라고 깨달았던 인도의 유마거사,
욕망과 집착의 뿌리인 자신의 전 재산을 호수에 버렸던 중국의 방거사,
시비와 분별을 훌훌 놓아버렸던 우리나라의 부설거사 같은 사람이
참으로 발복하고 살았던 참사람, 행복한 자유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