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율을 잘 지키고 늘 실천하라
생사윤회도-티벳(원주 고판화박물관 제공)
며칠 전 마늘밭을 일구었습니다. 메주콩을 베어낸 자리를 관리기로 갈고 두둑을 만들었지요. 비바람만 맞은 땅인데도 어찌나 단단하게 굳었는지, 이런 땅을 헤치고 올라와 결실을 맺은 작물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올해는 병해충으로 인한 손실이 크지 않았습니다. 유례가 없이 길었던 장마와 연이은 태풍으로 벌레들이 활동을 할 환경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장마와 태풍으로 고추농사에 피해를 입었지만 다른 작물에는 덕을 입었으니 작물들의 일생도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농사를 짓다 보면 몇 가지 싸움을 해야 합니다. 가뭄과의 싸움, 병해충과의 싸움, 조수(鳥獸)와의 싸움, 잡초와의 싸움, 장마 또는 태풍과의 싸움 등 대처해야 할 상대들이 제법 많습니다. 자연재해를 제외하면 상대의 대부분이 유·무정의 생명들입니다. 이들을 극복해야 결실을 기대할 수 있으니 피할 수도 없는 싸움입니다. 여기서 극복이란 그들을 죽이거나 쫓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불살생의 계율과는 상반되는 것이지요. 서울에서 살 때에는 혹여 집안에 벌레가 들어오면 가만히 잡아 창밖에 놓아주곤 했지만 산골 살며 농사를 지으니 자꾸 벌레들을 죽이게 됩니다. 병해충은 물론이고, 불청객처럼 찾아오는 말벌들, 집안까지 마구 들어오는 노래기들, 집 주위 곳곳에 지저분하게 거미줄을 쳐대는 각종 거미들, 뒷골을 쭈뼛하게 만드는 뱀에 이르기까지 상대해야 할 녀석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처음에는 망설이고 주저했지만 3년 넘게 농부로 살다 보니 이들을 죽이거나 내쫓는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갑니다. 불제자의 입장에서 무엇인가 꺼림칙하지만 불가피하다는 명분으로 살생을 반복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늘 고민스럽습니다.
자신을 올바르게 단속하는 삶, 그리고 그런 삶을 지속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불가에서는 자신을 올바르게 제어하는 삶을 지계행(持戒行)이라고 말합니다. 지계, 즉 계를 지키는 것처럼 어려운 일도 드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농사를 지으면서도 지계행의 어려움을 실감합니다. 불가피하게 살생을 저지르게 되니까요. 혹자는 말합니다. 벌레도 먹고 사람도 먹고, 함께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요. 그러나 실제 농사는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텃밭 수준이라면 몰라도, 농사를 업으로 삼는 경우에는 이른바 ‘콩 세 알’ 따위의 이야기는 현실과 동떨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삽으로 땅을 파다 보면 본의 아니게 지렁이를 죽이게 되고, 트랙터나 관리기로 밭을 갈다 보면 눈에 보이지는 않는 수많은 생명체들이 목숨을 잃습니다. 생명을 죽이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또 늘 연민과 자비심으로 생명을 대해야 하겠지만 벌레나 균들에 의해 작물들이 죽거나 시들해질 때에는 어쩔 수 없이 방제에 나서게 됩니다. 이처럼 불살생계를 잘 알고 있어도 현실 속에서 그것을 온전하게 지키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지계의 어려움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우바새(남성 신자)가 잠시 옆에 두었던 보석을 거위가 삼켜버렸고, 마침 이 광경을 지켜본 비구가 의심을 받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보석이 사라졌다며 보석이 어디 갔느냐고 의심의 눈초리로 따져 묻는 우바새에게 비구는 말할 수가 없다고 답합니다. 보석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는 있지만 말할 수 없다는 비구에게 우바새는 사정도 하고, 화도 내보았지만 비구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우바새여, 나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보석을 훔치지 않았지만 어디에 있는지를 말할 수가 없습니다.”
보석이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하면 거짓말을 하게 돼 불망어(不妄語)의 계율을 깨뜨리게 되고, 거위가 먹었다고 말하면 거위가 죽임을 당할 것이 뻔하므로 불살생(不殺生)의 계율을 어기게 되는 것이니 비구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우바새는 치솟는 화를 참지 못하고 비구를 거칠게 폭행했고, 거위를 발로 걷어차 죽여 버렸습니다. 거위가 죽었음을 확인한 비구는 그때서야 거위가 보석을 삼켰다고 힘겹게 알려줍니다. 거위의 배를 갈라 보석을 찾은 우바새가 비구에게 사죄했지만 비구는 폭행 후유증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이 비구는 욕계 천상세계 가운데 하나인 화락천(化樂天)에 태어났다고 불전은 전합니다.
이렇게 계율을 잘 지키는 것은 녹록한 일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계율을 깨뜨리면서 도를 닦는 것과 청정하지 않은 비도덕적인 삶을 살면서 부처의 세계에 가고자 하는 것은 똥을 깎아서 전단향을 만드는 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남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삶, 비도덕적인 삶, 청정하지 못한 삶을 사는 이는 결코 열반과 해탈로 다가갈 수도 없고, 궁극적으로 어떤 행복도 얻어질 수 없다는 것이지요.
야운 스님이 지은 <자경문(自警文)>에는 계에 대한 내용이 자주 등장합니다. 스스로 경책을 하는 글이니 당연하겠지요. 그 가운데 “비록 재주와 학식이 있으나 계행이 없는 사람은 보배 있는 곳을 알려주었지만 일어나 가지 않는 것과 같다(雖有才學 無戒行者 如寶所導而不起行)”는 구절이 있습니다. 자제하지 못하고 탐욕을 부리면 아무리 재주와 실력이 있어도 낭패를 본다는 가르침입니다. 원효스님의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에도 비슷한 의미의 문장이 있습니다. “막지 않는데도 천당에 이르는 사람이 적은 것은 탐진치(貪瞋癡) 삼독의 번뇌로 자기의 재물을 삼기 때문이요, 유혹하지 않는데도 악한 길에 사람이 많은 것은 쾌락에 휘둘리는 몸뚱이(감각기관)에서 비롯된 망령된 마음을 보배로 삼기 때문이니라.(無防天堂 少往至者 三毒煩惱 爲自家財 無有惡道 多往入者 四蛇五欲 爲妄心寶)”라는 구절이지요. 욕망과 쾌락에 휘둘리기 쉬운 것이 중생의 속성이니 천당으로 가는 길은 늘 한산하고 지옥과 축생, 아수라, 아귀의 세계[四惡道]로 가는 길은 늘 북적인다는 뜻이지요.
부처님께서 계율을 정한 이유는 10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교단의 질서를 잡고, 대중을 기쁘게 하며, 대중을 안락하게 하고, 믿음이 없는 이를 믿게 하며, 이미 믿은 이를 더욱 굳세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다루기 어려운 이를 잘 다루고, 부끄러운 줄 알고 뉘우치는 이를 안락하게 하며, 현재의 실수를 없애고, 미래의 실수를 막으며, 바른 법을 오래 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계율은 건전한 삶을 살아가는 데에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에 진전이 있도록 하는 목적도 가지고 있습니다. 지계를 가벼이 여기는 수행자는 사소한 유혹에도 마음이 흔들리고, 마음이 흔들리면 지혜를 얻지 못하여 정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계를 지키지 않으면 공덕을 이룰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정진하여도 궁극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행복해지는 지침 가운데 하나로 ‘계율을 잘 지키고 늘 실천하라’고 당부하신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자신을 잘 제어할 수 있는 것(self-displine, a highly trained displine)이 행복으로 가는 또 하나의 이정표인 이유입니다. 계율을 잘 지켜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것은 불교적으로 말하자면 팔정도의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모든 행동거지는 정, 즉 바름을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지계가 없는 선정은 바른 선정[正定]일 수 없습니다. 범계자에게 정정은 불가능한 것이며, 따라서 범계자가 반야를 얻었거나 도과를 성취했다는 것은 사기나 거짓 행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불교의 기본 체계인 삼학(三學)은 계에서 출발해서 정과 혜에 이르는 과정을 말합니다. 불교의 출발점은 계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계를 지키지 않으면서 깨닫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부처님의 상가에서는 비구들 사이에 위계 및 서열의 기준을 법랍으로 정했습니다. 상가에서 행해지는 모든 것의 기준은 법랍 순에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부처님의 설법을 들을 때 법랍이 높은 순으로 부처님 가까이에 앉았습니다. 공양을 할 때에도, 탁발을 나갈 때에도, 목욕을 할 때에도 법랍이 높은 비구들이 언제나 먼저였습니다. 설사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과를 얻어 성자의 흐름에 들었거나 이미 성자가 된 비구라고 하더라도 그보다 법랍이 높은 비구를 앞설 수는 없었습니다. 그만큼 부처님은 법랍을 ‘지계를 지켜온 시간’으로 매우 소중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계율에 대한 부처님의 생각이나 입장을 알 수 있습니다.
계율은 삼업 중에 주로 몸으로 짓는 업(신업)과 입으로 짓는 업(구업)에 관해 규정한 것입니다. 의업, 즉 마음으로 짓는 업은 선정 또는 지혜에 해당되는 업입니다. 그래서 계율은 잘 배우고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몸에 배도록 실행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래야 무의식적으로 범계를 저지르는 것조차 피할 수 있어 악업을 짓지 않게 됩니다. 악업을 짓지 않으면 몸과 마음이 청정해지므로 깊은 삼매가 가능해지고, 이 삼매의 힘이 뒷받침된 상태에서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는 수행을 통해 반야를 심화시키는 토대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지계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중국과 우리나라, 일본 등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이른바 무애행(無碍行)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향은 위험하다는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 아무리 현란한 수사로 미화한다고 해도 무애행은 파계행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의외로 많은 불자들이 무애행으로 미화된 파계행에 속아 넘어갑니다. 고기 먹지 말라는 것은 부처님의 계율이라기보다 원리주의자였던 데와닷따의 계율입니다. 오신채를 먹지 않는 것은 부처님께서 제정한 계율이 아니라 중국 도교의 계율입니다. 그런데도 고기 안 먹고, 오신채 안 먹는 게 불가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계율인처럼 세간에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물론 고기를 안 먹는 것이 먹는 것보다 바람직하겠지요. 또 오신채를 안 먹는 것이 먹는 것보다 수행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불교의 계율을 대표하는 아주 대단하고 중요한 계율은 아닙니다. 계율에도 경중이 있고, 선후가 있는 것이니까요.
언젠가 선배 수행자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이가 도인이 산다는 암자를 찾아 산으로 올라가는 길에 계곡물에 떠내려 오는 배춧잎 한 장을 발견하고는, 만나볼 것도 없겠다며 실망한 표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몇 걸음 내려오는데 헐레벌떡 가쁜 숨을 몰아쉬며 스님 한 분이 달려오더니 떠내려가는 배춧잎을 건졌다. 그 광경을 본 이 사람은 진정한 큰 도인을 만났다고 크게 기뻐하며 땅바닥에서 큰 절을 올렸다. 그 후부터 그는 이 스님을 생불처럼 존경하며 모셨다.’
참으로 그럴듯한 이야기이지요. 배춧잎 한 장까지 아끼는 스님의 철저한 검약 정신이 감동적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을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부분만으로 전체를 평가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소소한 물건조차 끔찍이 여기는 정신이야 훌륭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스님이 건전한 몸과 마음의 소유자인지, 선정의 힘과 반야의 지혜를 갖추었는지, 팔정도의 삶을 실천하는지, 하여 스승으로서의 자질과 자격을 갖추었는지를 충분한 시간을 갖고 살피는 일입니다. 그 스님이 근검한 정신과 함께 계정혜 삼학까지 두루 갖추었다면 정말로 다행하고 행복한 일이지만, 혹여 그렇지 않았다면 그로 인해 갖게 될 실망과 허탈감은 어쩔 것입니까.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출가 직후 스승을 찾아다닐 때 충분한 시간을 갖고 여러 가지를 살핀 연후에 스승을 삼으셨던 것입니다.
수행을 하는 궁극적 목적은 최상의 행복, 즉 열반과 해탈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열반과 해탈로 향하는 출발점이자 토대는 지계행입니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자신의 도덕적 자세를 비판적으로 숙고하십시오. 내 행위는 올바른 것인가? 혹 방종하며, 고집불통이고 독단적이지 않은가? 명상생활에 도움이 되는 몸가짐을 하고 있는가? 매일매일 이렇게 점검하며 살아간다면 시나브로 행복은 성큼 다가와 있을 것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