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면 날마다 뜨는 해가 미운 날들.
영원히 오지 않았으면 하는 새벽.
방 두 칸의 초가 앞마당이 소란스러웠다. 일구는 어쩔 수 없이 눈을 떴다. 순간적으로 일구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조선인 사냥’이미 인근 부락에서 자행되고 있었다. 마을 장정 서넛이 끌려갔다는 말을 들은 터였다. 아내의 나이 27세, 그는 35세였다.
“뒷문으로 도망가세요.”
먼저 일어난 아내가 말했다. 그러나 뒷문을 살펴보고 온 아버지가 중얼거렸다.
“소용없다. 뒷문에도 목도를 가진 일본인이 서 있다.”
“저는 부양해야 할 가족이 많으니 괜찮을 겁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일구는 태연한 척 일어서서 문을 열었다. 그러자 제복을 입은 순경과 조선인 모집계원이 뛰어 들어왔다. 흙발 그대로였다. 그즈음 총독부에서는 순경 한 사람이면 조선인 한마을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고 자신했을 만큼 순경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순경 앞에서 여섯 식구는 벌벌 떨었다.
순경의 말은 짤막했다.
“정이구, 대일본 노무보국회에 당신이 필요하오.”
“저는 정이구가 아니고 정일구입니다.”
“일구고 이구고, 우린 그런 건 상관하지 않는다.”
이구(二九)는 일구의 동생이었다. 순경은 일구의 말대로 누구도 상관하지 않았다. 인원만 채우면 되는 것이다. 순경이 내민 징용 영장을 제대로 본 가족은 없었다.
조선인 모집계원이 대뜸 그의 손목을 휘어잡았다.
“저항하는 건가? 이놈!”
목도가 어깨 위에 날아왔다. 일구는 저항할 수 없었다. 격심한 통증을 참지 못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때 만삭이 된 일구의 아내가 순경의 발아래 매달렸다.
“남편을 데려가면 우린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제발, 부탁드립니다.”
“소용없소.”
“나도 아버지하고 같이 갈래요.”
어린 아들이 아버지의 팔에 매달려 울었다.
“상영이 아부지.”
아내는 실성한 사람처럼 울부짖었다.
“2년만 있으면 돌아오니 그때까지 엄마하고 건강히 있거라. 엄마가 믿을 건 너뿐이다. 명심하거라.”
“일구야!”
“아부지!”
“상영이 아부지!”
일구는 집 앞에 서 있던 트럭 짐칸에 실렸다. 한 대의 낡은 트럭이 마을의 장정들을 태우고 떠나자 회관은 동시에 울부짖음으로 가득했다. 옷 갈아입을 시간은커녕 얼굴 씻을 틈도 주지 않았다. 트럭에는 이미 7, 8명의 남자들이 타고 있었다. 그 사람들 중에는 이마가 찢어져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사람도 있었다.
도중에 또 다시 같은 방법으로 네댓 사람이 잡혀왔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마을과 30리나 떨어진 경찰서의 뒤뜰이었다. 그날 하루 동안에 가까운 곳으로부터 1백 명 정도가 끌려왔다.
“성전완수를 위해, 산업전사로서 몸을 아끼지 말고 일해 주기 바란다.”
저녁 무렵 떠나기에 앞서 경찰서장이 지껄이는 훈시가 있었다. 너무도 뻔한 말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은 다시 광목이 쳐진 트럭에 처넣어져 역으로 옮겨졌다.
그날 밤, 이구가 멧돼지를 메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가족들이 모두 그를 멍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삼촌!”
어린 조카가 이구에게 매달렸다.
짚이는 데가 있었다.
“형님은요?”
형수가 고개를 흔들었다.
“너 대신 형이 잡혀갔다.”
아버지가 힘없이 말했다.
“어디로?”
“......사할린.”
이구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구는 그렇게 떠나간 형을 위해서 몸이 부서져라 일을 했고, 밤이면 밤마다 괴로워했다. 일본 순경이 그렇게 들이닥친 그날 새벽, 그는 산속을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올무에 걸린 멧돼지가 말목까지 채가지고 도망을 갔기 때문이었다. 그는 커다란 나무 뭉치를 매달고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멧돼지를 쫓아온 산을 헤매고 다녔던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것은 그냥 멧돼지가 아니었다. 일단 잡기만 하면 온 식구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식량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형수는 임신한 상태였다. 그것이 그와 형의 운명을 바꾸어놓았다.
삽화 염정우
옥아는 회산과 마주 앉았다.
회산의 등 뒤로 수 백 권의 책들이 물결처럼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옥아는 이곳에서 회산과 마주할 때면 항상 켜켜로 쌓여 있는 책들에게 먼저 눈이 갔다. 불쾌하지 않은 곰팡이 냄새, 그리고 화선지와 먹 냄새... 붓은 벽면에 일자로 쭈욱 정렬되어 있었다. 크고 작은 것, 그것들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그 옆에 무엇인가. 단아한 한문 족자 한 폭과 한글 족자 한 폭이 마주 보며 웃고 있었다.
今生 未明心
滴水 也難消
이 강산 어디에
나를 묻을꼬
회산은 먹을 갈고 있었다. 그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보기 드물게 하얀 손. 파란 실핏줄이 보일 정도로 투명한 손이었다. 회산은 먹을 가는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옥아가 들어왔는데도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저 왔습니다.”
비로소 회산이 고개를 들었다.
단정한 회산의 양미간이 움찔거렸다.
옥아는 조심스럽게 그와 마주 앉았다.
네 귀가 떨어져 나간 <능가경>이 탁자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언제나 있던 그 자리에.
“나한테 할 말 있느냐?”
옥아는 할 말이 없었다.
“없습니다.”
옥아의 말은 언제나 간단했다.
회산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지나갔다.
“이곳이란 항시 내일이 없다. 오늘이 우리 삶의 전부다.”
늘 듣던 얘기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후회할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도 옥아는 조금도 마음의 변화가 없었다. 그건 정작 회산에게 배운 것이었다. 회산의 흉중은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 쫓기는 두 사내를 거둔 것은 오로지 자신의 결정이었다. 그렇다면 의당히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세상은 언제나 명분이 실리를 당하지 못하지. 자신의 일이 아닌데, 관심을 갖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명분 때문에 세월을 까먹는 일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옥아는 회산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회산도 옥아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저는 원래 어리석어요.”
“결과를 다 알고 있는 아주 재미없는 얘기를 하자.”
회산과 옥아의 공부는 늘 그렇게 시작되었다.
“재미있겠지요?”
“성직자와 창녀가 한 이웃에서 살았다.”
“아주 흥미 있는 이야기네요.”
“두 사람은 죽어 염라대왕 앞에 섰다. 그런데 성직자에게는 지옥행이 판결되었고, 창녀에게는 극락행 판결이 났다. 왜 그랬을까?”
“마음을 판결했겠지요.”
“그렇지. 염왕은 그들의 육신을 판결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판결한 거야. 왜?”
회산은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했다.
“육신은 이미 죽었으니까.”
“그러면 스님은 어느 쪽이세요?”
생글거리며 묻는 옥아의 말에 회산은 뚫어지게 옥아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긴 한숨 뒤에 회산은 짧게 말했다. 회산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난 반드시 지옥행이지.”
“재미없어요.”
순간적으로 이상한 느낌이 든 옥아가 외쳤다.
‘혹시 저 때문인가요?’
그러나 다음 순간 옥아는 입을 꽉 다물어버렸다. 하얀 회산의 얼굴이 붉게 물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사실은 정말로 재미있었다. 그 순간 걸쳐 놓은 띠 발 사이로 두 마리 나비가 너울너울 춤을 추며 날고 있었다.
“겨울이 오면 살아남는 나비는 한 마리도 없다.”
“예?”
“이제 여름이다.”
다시 먹을 잡으며 회산이 중얼거렸다.
그 사이 아랫마을에 심상치 않은 말이 돌았다. 명장사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보는 사내들이 왔었다는 것이다. 물론 일본인 주재소장과 각별한 회산으로 하여 절을 직접 찾아오는 사내는 없었다. 그렇지만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씩 사내들이 온 걸 보면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었다. 옥아는 속이 탔다. 그것은 불안해서가 아니었다. 회산과의 팽팽하게 밀고 당기는 긴장에서였다. 어떻게 할 것인가.
스물두 살의 옥아와 서른여덟 살의 회산...... 옥아는 회산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한 번도 큰소리를 내지 않은 사람, 어지러운 세상을 비켜가게 한 사람이 회산이었다. 그런데 옥아는 그 회산에게 반기를 들고 있었던 것이다. 눈 쌓인 국경 마을을 바람불이처럼 떠돌던 시절, 그녀에게 회산이 말한 것은 단 한 가지였다.
너만은 세상과
담을 쌓아야 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럴 수가 없었다. 폐원이 되어가는 아랫마을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회산은 무엇을 바라 산중 산중을 떠돌며 먹을 갈고 있을까? 그는 정말로 부처가 되려는 것일까? 회산은 그야말로 이마에 땀 흘리는 일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비가 와서 홍수가 지건, 전쟁이 나서 누가 이기든 말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 때문일까? 그녀는 일 년에 몇 번씩 주재소장과 술잔을 나누는 회산을 보면서 자꾸만 큰 돌 하나를 가슴에 갈고 있었다. 아마 그래서 마을 사내 둘을 거두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마도 반짝반짝 윤이 나게 돌을 갈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회산에게 자신의 돌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산중의 쌀 한 톨, 물 한 방울이 아까웠다. 그러나 회산에게 아까운 것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회산은 언제, 어디를 가든 부자였다. 그런데도 옥아는 한 번도 그 연유를 묻지 못했다.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회산 앞에만 서면 까닭 없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그것을 감추어야 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만난 사람, 그녀는 난설헌의 채련곡(采蓮曲)을 읽으며 얼굴을 붉혔다. 秋淨長湖碧玉流/荷花深處繫蘭舟/逢郞隔水投蓮子/遙被人知半日羞/가을은 맑고 긴 호수엔 벽옥 같은 물 흐르고/연꽃 우거진 곳에 아름다운 목련배 매여 있어요/임을 만나 물 사이로 연밥을 던지다가/멀리 사람들이 알아보아서 반나절이 부끄러웠소. 그렇지만 이제 끝났다. 그것을 옥아는 짐작하고 있었다.
삽화 염정우
조선인에 대한 강제 연행은 1939년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시작은 훨씬 오래전이었다.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에 승리한 뒤 제정 러시아와 포츠머스 조약을 맺었다. 한반도로부터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고 곧바로 을미보호조약을 체결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당시의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이었던 석탄업계를 필두로 노동력 부족으로 고민하던 군수업계의 강한 요청으로 시작되었다. 한반도에서는 당초 표면적으로는 징용이라고 하지 않고 기업에 의한 집단 모집의 형태였다. 그러나 실제는 경찰 권력이 적극적으로 동원되고 행정부가 가담한 강제 연행이었다.
‘우리 광산에 몇 명을 보내 주시오.’
그것은 말단 직원에게는 정부 명령이나 다를 바 없었다. 군수나 면장은 경찰서장과 긴밀하게 연락하여 순경이나 조선인 끄나풀을 앞장 세웠다. 마을마다 인원을 할당하여 일방적으로 연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끄나풀들이 주력한 것은 조선 여성들의 공납이었다. 대부분 일본 방적공장으로의 취업 알선이라는 나름대로의 명분을 내걸었지만, 그것은 위장 모집 공작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당시의 조선 상황은 그들의 속내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의 상황이 아니었다. 굳이 일본이 아니더라도 10살만 넘으면 여식을 팔아먹는 집이 부지기수였다. 단 한 명의 입이라도 줄여야 했던 것이다. 한 톨 한 알의 곡식이 가족 전체의 생사를 결정했던 것이다. 땅을 가진 양반들은 밥 한 그릇으로 논 한 마지기를 살 수 있을 정도였다. 가난한 농민들은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 수가 없었다. 사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을 걱정해야 했다.
멀지 않은 회령에서 산간 화전을 일구고 살던 일곱 식구.
가장이 끓는 솥에 들어간 일이 있었다. 자신의 몸을 늙은 부모와 자식들에게 먹인 것이다. 그 덕에 그 겨울, 일곱 식구가 살아남았다.
누가 믿을 것인가.
은은한 솔잎차를 앞에 놓고 회산과 전택경이 앉아 있었다. 깔끔한 양복 차림의 전택경은 어디로 보아도 잘 생긴 사내였다. 목소리도 그의 외모답게 정갈했다. 깊숙이 눌러쓴 금테 안경 너머 예리한 눈빛이 자리 잡고 있었다. 회산은 누구보다도 그의 방문을 즐거워했다. 솔잎차의 향기와 함께 두 사람이 피우는 담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스님.”
“자주 오시지 그러셨습니까?”
“아이구, 스님과의 차 한 잔이 늘 그리웠지요. 그런데 시국이 시국인지라 짬이 나야지요.”
“하하, 저도 그랬습니다.”
처음, 두 사람의 대화는 정이 넘쳐흘렀다.
그것을 전택경이 깼다. 웃으면서.
“일본 경찰은 여학생이나 젊은 여인들의 옷을 찢고, 때리고, 발길질하고, 채찍질하고, 범간한다. 성분이 나쁜 어린 학생들은 일찌감치 매질하여 죽인다. 불붙은 담배를 젊은 여인들의 여린 부분에 짓누르거나 인두로 지진다. 엄지손가락에 끈을 매달아 대나무와 쇠몽둥이로 의식을 잃을 때까지 때리고 다시 의식을 되찾게 하여 때리는 과정을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는데 이러한 고문으로 죽는 경우도 있다. 고통이 극심하도록 사지를 돼지처럼 잡아맨다.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오랫동안 감금하는데, 이를테면 한방에 남녀를 꽉 차게 집어넣어 여러 날 동안 한순간도 앉거나 누울 수 없게 만든다.”
손에 든 전단을 다 읽은 전택경이 회산을 쳐다보았다.
“그게 뭡니까?”
회산은 멀거니 전택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님, 이 전단이 명장사에서 나왔다는 제보를 받고 제가 왔습니다. 이게 뭔지 저도 궁금해서요? 어떤 경우에도 스님이 저한테 거짓말을 하시지는 않겠지요?”
“글쎄요. 저도 때로는 거짓말을 한답니다.”
“아닙니다. 스님은 거짓말 하시지 않습니다.”
회산이 고개를 흔들었다.
“허허! 부소장님도 아시겠지만 전 불도수행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땡중이랍니다.”
주재소장 하야시 경사의 끄나풀에 불과한 전택경이지만 마을 사람들은 다들 그를 부소장이라고 불렀다. 주재소장보다 더 무서운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다.
“아닙니다. 스님은 수행을 하기 위해서 머리를 깎은 것이 아니라, 다른 일을 하기 위해서 머리를 깎았습니다.”
“어허! 부소장님이 저보다 저를 더 잘 알고 계십니다, 그려. 난 내가 왜 머릴 깎았는지 모를 때가 있는데.”
“흐흐흐! 전 스님 말씀이 너무 어려워서 잘 알아듣지를 못하겠습니다. 우리 소장님께서 특별히 스님께 잘 말씀드려서 무지한 사람들이 이런 불온한 전단에 속아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협조를 당부하셨습니다. 지난번 열차 탈선 사고와 경찰서 무기고 습격도 모두 이런 전단 때문에 비롯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특히 함경북도는 다른 지역보다 개화되질 못해서 이런 일이 빈번하게 생겨서 총독부에서도 나름대로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장님께서도 경성으로 올라갔습니다. 아마 소장님이 스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지 않았으면 명장사는 무사하지 못했을 겁니다.”
“나야말로 견문이 짧아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
“이런 전단이 조선의 독립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정말 이 전단이 사람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지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지요.”
회산은 단호하게 말했다.
“스님, 일본은 조선을 다스림에 있어서 공공건물을 짓고 농업기술을 개선하고 통신시설을 확충하는 등 물질적인 면에서 많은 업적을 이룩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조선에는 전혀 없는 교육제도를 일원화하고 교육수준을 향상시켜 누구나 신분의 제약을 받지 않고 고르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습니다. 물론 종교의 자유는 무한대로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렇지요.”
전택경의 열변에 회산이 맞장구를 쳤다.
“실제 조선이 백성들에게 해준 것이 무엇입니까? 일본이 조선 백성들에게 베푼 선정은 조선이 천만 년을 지속한다 해도 해주지 못할 것들입니다. 지금 조선 사람들에게는 백성들을 수탈하는 명목상의 조선 정부가 아니라, 실제로 백성들의 삶에 이익을 줄 수 있는 일본 정부가 필요합니다. 아마도 대다수의 조선 사람들은 일본을 고맙게 생각할 겁니다. 혹여라도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필시 조선이라는 허울에 숨어서 백성을 수탈하던 몇몇 지주 양반들이거나 그 후손들일 겁니다. 저잣거리에 나가 지난날 조선이었던 때와 지금을 비교해 보십시오. 모두 머리를 흔들 겁니다.”
“부소장님의 말씀은 하나도 틀림이 없어요. 난 썩어빠진 조선이라는 나라에 신물이 난 사람입니다. 난 먹을 것이 없어서 절로 들어온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디 나뿐이겠습니까? 조선이라는 나라는 그런 나라입니다.”
“회산 스님?”
전택경이 회산을 간절히 불렀다.
“이번에 스님께서 모범을 보이셔야겠습니다.”
“그래야겠지요.”
회산이 꽃무늬 부채를 부치고 있었다.
“대일본제국이 승승장구를 하고 있습니다.”
“축하할 일이지요.”
회산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어디 대일본제국이 오기 전에 조선 정부에서 우리 백성들에게 해 준 것이 있습니까? 길을 닦아주었습니까? 밥을 배불리 먹여주었습니까? 5백 년 조선 정부에서 한 일은 대대손손 권력 유지를 위해 백성들 수탈한 것밖에 더 있습니까?”
“옳으신 말씀입니다. 걸어서 다니는 것보다야 기차를 타고 다니는 것이 훨씬 좋지요.”
“어디 그것뿐입니까? 일본 정부는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전쟁이 끝나면 아마도 일본인보다 조선인이 더 혜택을 많이 받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스님께서......”
“여부가 있습니까? 저는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 늘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처음 철로를 놓을 때 조선인 양반들이 얼마나 반대했는가를.”
“하하하, 그렇습니다. 아직 조선인들 대부분이 세상 물정에 어두워서 일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전국에 학교를 만든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철부지 조선인 양반들이 아직도 저항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조선 백성이 잘 먹고 잘 사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육을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모두 제 밥그릇 챙기려고 하는 수작들이지요. 그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일반 백성들이 제대로 교육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자손손 자신들만이 영화를 누릴 것이 아닙니까? 하하, 그들에게는 오직 그들 자신의 이득밖에는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으니까요.”
회산은 조용히 전택경을 거들었다.
“우리 주재소장님도 조선에 와서 정말로 진정한 친구를 만났다고 늘 스님 이야기를 하십니다. 아 참, 그리고 지난번 백두산 더덕은 너무 고마웠다고 꼭 인사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을, 오히려 소장님께 고마운 말씀 전해주세요. 그런데 사람들은 많이 모집하셨습니까?”
“아직 실적이 좋지 못합니다. 경상도와 전라도에서는 실적이 많은 모양인데, 그래서 우리 오가사와라 총경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함경도는 아무래도 인구가 많지 않은 탓도 있지만......”
“그렇겠지요. 머지않아 우리 지역에도 부소장님 같은 분이 계시니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지원들 할 겁니다.”
“아이구, 무슨 말씀을......”
“옥아를 보낼 수는 없습니다.”
회산의 말은 간결했다. 그렇지만 비호처럼 빨랐다. 회산은 지나가는 바람처럼 말했지만 전택경은 눈썹이 쑥 올라갔다. 노련한 전택경도 적이 당황하고 있었다. 회산은 느긋하게 그런 전택경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아이를 보내면 제가 너무 불편해서요......”
전택경이 무언가 한참을 생각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도 스님이 북간도에 다녀오신 걸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저만 알고 있는 상황이지요. 주재소에서는 아무도 모릅니다. 저는 언제나 스님을 남다르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역시 전택경은 조선인이지만 상대할만한 사내.
회산은 천천히 부채를 접었다.
“그러면... 김처사님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일은 그때 다시 생각을 해보도록 하지요.” “아, 그렇습니까? 하하하!”
두 사람의 웃음이 마당 끝 무성한 홍매화 이파리를 흔들었다.
“그러면 그렇게 알고 가겠습니다.”
“여부가 있습니까.”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