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어라, 민들레 꽃밭이다
일러스트 정윤경
마중물 생각
불일암에는 꽃밭이 없다. 군데군데 나무와 화초가 있을 뿐이다. 불일암 마당가에 심은 후박나무, 스님께서 제주도 추사 유배지에서 가져온 수선화 몇 송이와 채마밭에 파초와 모란 몇 그루가 고작이다. 수선화는 추사의 혼을, 모란은 시인 김영랑을 위로하자는 마음에서 심었다고 하시고, 파초는 넓은 이파리에 떨어지는 경쾌한 빗소리를 듣고 싶어서 가꾸셨다고 한다. 그밖에는 농사꾼이 이식한 청매 한 그루가 고작이다. 불일암에 굳이 꽃밭을 만드시지 않은 까닭은 스님의 성정에서 연유한 것 같다. 스님은 굳이 무얼 꾸미려고 하는 것을 경계하셨던 것이다. 꽃밭을 만들어 놓으면 이 꽃 저 꽃 집착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집착이란 병은 우리들 일상에 널리 퍼져 있는 듯하다. 스님께서는 송광사 한주 영선 스님을 좋아하셨는데, 영선 스님은 선방 옆에 꽃들을 낫으로 베어버렸다고 한다. 선방 스님들이 참선 중에 꽃에 집착하는 것을 보고 그랬다는 것이었다. 법정 스님은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영선 스님답다.”고 미소만 지으셨다. 아무튼 중국 선사들은 무위법(無爲法)을 최고의 경지로 삼았다는데, 의도적인 작위(作爲)를 경계한다는 말일 것이다. 무위란 자연스러움이고 작위는 부자연스러움이 아닐까 싶다.
스님의 말씀과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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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전 한때를 후박나무 그늘에 앉아
조촐하고 맑은 시간을 보내면서 나무의 덕을 입고 있다.
그 그늘 아래서 책을 보기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무심(無心)을 익히기도 한다.
나뭇잎 사이로 살랑거리는 바람 소리도 듣고
은은히 숨결에 스며드는 꽃향기를 맡는다.
고개를 들어 후박나무 잎 사이로 흘러가는 구름도 보고
그 그늘 아래서 새들의 맑은 목청에 귀를 모으기도 한다.
나무들은 결코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다.
나무의 그늘에 견주면 우리들 사람의 그늘은 얼마나 엷고 빈약한가.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면서
눈앞의 이익만을 앞세워 신의를 저버리기 일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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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사랑과 집착을 혼동하고 있다.
집착은 사랑이 아니라 이기적인 욕구다.
참 사랑은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다.
줄수록 더욱 맑고 투명하고 넉넉해지는 것이 사랑이다.
주는 사랑에는 집착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자꾸 받기만을 원하면 사람이 무뎌지고 오만해지고
불만과 괴로움이 따르게 된다.
괴로움의 뿌리를 살펴보면 거기에는 대대 집착이 도사리고 있다.
집착이 없으면 괴로움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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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가 벌겋게 온 산을 물들이다가 지고 나더니
그 뒤를 이어 이 골짝 저 등성이에서
산벚꽃이 허옇게 무더기 무더기로 피어 나 있다.
얼마 전에는 길섶에 연분홍 철쭉꽃이 문을 열어
오르내리는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어제 아침부터 뜰에는 모란이 피어나고 있다.
꽃은 무슨 일로 필까?
생명의 신비 앞에 부질없는 생각일랑 접어둘 일이다.
수억만 년을 두고 철 따라 어김없이 피고 지는 꽃이다.
우리 인생도 이런 꽃의 생태와 다를 게 무엇인가.
갈무리 생각
어머니는 호미를 들고 잔디밭 마당에서 사셨다. 그때는 마당이 정갈하고 푸른 잔디밭이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광주로 가시고 난 뒤부터는 잡초가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잡초는 결국 잔디밭을 이기고 점령했다. 그러나 자연은 잡초 뽑기를 포기해버린 나에게 민들레 꽃밭을 선사했다. 내가 잡초를 뽑겠다는 집착을 아예 놓아버리자, 노란 금화처럼 반짝이는 민들레꽃들이 어느 날 문득 마당을 아름답게 수놓았던 것이다.
해마다 호미 들고 잡초를 쫓아다니다가
두 해 전부터 잡초도 더불어 생명이려니
그대로 두었더니 민들레 꽃밭이 됐구나.
꽃을 꽃인 줄 모르고 살았던 이 누구인가?
민들레꽃만 피어 있는 것이 아니라 흰 냉이꽃, 보랏빛 제비꽃도 “저 여기 있어요!”라고 깜찍하게 고개를 내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