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속뜰에도 꽃이 핀다
일러스트 정윤경
마중물 생각
봄비가 밤새 내린 듯하다. 잠결에 낙숫물 소리를 간간히 들었다. 어둑한 꼭두새벽에 휘파람새가 후이후이 하고 잠든 세상을 깨운다. 날빛이 희부옇게 돌자 이번에는 딱따구리가 앞산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무엇 하나 무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없음을 자각하는 이른 아침이다.
대동강 얼어붙은 물이 풀린다는 우수가 며칠 지났다. 그렇다면 마당 연못가에 심은 홍매, 백매, 청매의 꽃이 피지 않았을까 싶어 나가보니 예감한 대로다. 대동강 강물에 화답하듯 매화나무 꽃봉오리들이 문을 열고 있다. 김소월의 영변 약산 진달래꽃, 내 산방의 진달래꽃 피는 날에 남북도 서로 간에 절절한 마음들이 오고가야 하지 않을까. 북향집인 내 산방인 이불재 상량문에 ‘백두산 천지 향해 이불재를 앉히다’라고 썼는데, 삼짇날 제비 날아와 노래하듯 백두산과 이불재의 신령들이 함께 통일 아리랑을 부르기를 기대해 본다.
자, 내 산방의 소식을 전했으니 나의 불가(佛家) 스승이신 법정스님의 불일암 소식은 어떤지 궁금해진다. 불일암의 휘파람새가 노래하는 뜻은 무엇일까? 밑에 소개하는 스님의 산문은 서정적인 산문시(散文詩)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니라. 우리말이 얼마나 정겹고 아름다운지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스님의 말씀과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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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숲이 잔기침을 하면서 한 꺼풀씩 깨어나고 있다. 뒤꼍 고목나무에서 먹이를 찾느라고 쪼아대는 딱따구리 소리가 자주 들리고, 산비둘기의 구우구우거리는 소리가 서럽게 들려오고 있다.
해마다 이맘때면 숲을 찾아오는 저 휘파람새, 할미새가 뜰에 내려와 까불까불 가벼운 몸짓으로 인사를 한다. 저 아래 골짝에서부터 안개처럼 보얗게 새움이 터서 밀물처럼 산허리로 올라오고 있다.
머지않아 숲에서 수런수런 신록의 문이 열리리라. 그때는 나도 숲에 들어가 한 그루 청정한 나무가 되고 싶다. 나무들처럼 새움을 틔우고 가지를 뻗으면서 연둣빛 물감을 풀어내고 싶다. 가리어진 속뜰을 꽃처럼 활짝 열어 보이고 싶다. 허허. 이 봄날이 나를 흔들려고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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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개이자 개울물 소리가 한층 여물어졌다.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흐르는 저 개울물소리에 귀를 모으고 있으면 내 안에 묻은 먼지와 때까지도 말끔히 씻겨지는 것 같다. 개울가에 산목련이 잔뜩 꽃망울을 부풀리고 있다. 한 가지 꺾어다 식탁 위에 놓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갓 피어난 꽃에게 차마 못할 일 같아서였다.
철 따라 꽃이 피어나는 이 일은 얼마나 놀라운 질서인가. 생명의 신비가 아닐 수 없다. 꽃이 피어나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다. 꽃의 정기를 머금고 있는 나무가 스스로의 충만한 삶을 안으로 안으로 다스리다가 더 견딜 수가 없어 마침내 밖으로 터뜨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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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속에 묻힌 한 줄기 나무에서 빛깔과 향기를 지닌 꽃이 피어난다는 것은 일대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 ‘순수한 모순’이야말로 나의 왕국에서는 호외감이 되고도 남을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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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종일 봄비 소리를 듣는다. 창밖에 부슬부슬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앉아 있으니 산방의 촉촉한 한적(閑寂)이 새삼스레 고맙다. 차를 안 마실 수가 없다. 초하룻날 지리산에서 보내온 차를 오늘 비로소 시음해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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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까지 받은 편지들을 부엌에 들어가 죄다 태운다. 입춘도 지났으니 편지를 담아두었던 광주리도 텅 비워두고 싶어서다. 굴뚝에서 편지 타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저것은 ‘말의 연기’라는 생각이 든다. 아궁이에서는 ‘말의 재’가 사그라들고 있다. 사람의 말이란 결국 연기와 재로 사라지는가 싶다. 말 한 마디, 글 한 줄 쓰는 일이 새삼스레 허무한 짓거리로 느껴진다.
갈무리 생각
툇마루까지 날아온 개똥지바귀 한 마리. 겨울에 아내가 가끔 그릇에 모이를 놓아주었더니 기억하고는 물까치 눈치를 보면서 또 온 듯하다. 산방 둘레는 떼로 몰려다니는 물까치 영역인 것이다. 사람들은 ‘새머리’라고 비하하지만 새도 나름 요령이 있는 것 같다. 코로나 바이라스 창궐로 우울해진 보통사람들에게 잠시 미소 짓게 하는 행운의 새가 되기를 갈망해본다.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연재소설 <광주 아리랑>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나의 글이 이 참혹한 시기에 위로가 될까 싶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불재 매화 피는 순서는 홍매, 백매, 청매다. 홍매는 유혹하듯 급하게 피지만 타고난 천품이 우아한 청매는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백매의 만개(滿開)를 기다렸다가 가만가만 피어난다. 사람의 맑은 심성에 빛깔이 있다면 청매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스님께서 불일암 뜰에 왜 청매를 심으셨는지 알 것만 같다.
작년 12월 말부터 준비했던 스리랑카 취재여행을 출발 하루 전에 취소하고 짐을 풀었지만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국가적 재난 사태에 나름 협조했다고 생각하니 떠나지 못한 아쉬움이 사라진다. 저축한 셈치고 미루어두었다가 나중에 가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