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황명라. 원시반본 (原始返本)1, 2018, 종이 위에 혼합재료, 162.2 x 130.3cm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
그러나 부처님 이후 진정으로 이 말 뜻을 체득한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관악산 연주암을 찾아가는 길은 드문드문 녹지 않은 눈이 겨울의 위세를 자랑하는 흐린 날이었다. 슬쩍슬쩍 가랑비가 옷깃을 적시는 줄도 모르고 올라가는 돌길은 의외로 많은 사람들로 하여 붐비고 있었다.
과천 종합청사에서 꼭 한 시간 반, 연주암은 마치 무술영화에나 나오는 무법인걸들의 산채처럼, 아니면 외적방비를 위한 산성처럼 웅혼하게 서 있었다. 어찌 보면 서울의 도성을 닮아있는 듯, 보통의 사찰과는 다른 세속 궁궐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하기야 그것은 미리 연주암에 대한 이력을 염두에 두고 있는 방문객의 한갓 가소로운 심사 때문인지도 모른다.
끊을 수 없는 세속의 인연, 비애의 연주암
자랄 대로 자라고, 휘어질 대로 휘어진 몇백 년의 고목이 연주암을 지키고 있었다. 우리네 고향 앞의 느티나무처럼. 우선은 그것이 반가웠다. 관악산 최고봉인 연주봉 남쪽에 자리 잡은 연주암은 세속의 무상함을 뼈저리게 목도한 조선왕조 두 왕자의 시퍼런 한이 서린 사찰이다. 이 절은 원래 신라 문무왕 17년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된 사찰이다. 창건 당시에는 관악사라고 불렸고 위치도 현재의 절터 너머 골짜기에 있었는데, 조선 태종의 제1, 제2 왕자인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에 의해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고 한다.
연주암 탑과 나무.(사진. 염정우 기자)
이들이 절을 옮긴 데에는 끊을 수 없는 세속의 인연으로 하여 겪었던 왕자들만의 비애가 서려 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것을 체득한 슬픈 불연(佛緣)이 있다. 조선왕조가 서울로 도읍을 옳긴지 불과 30년. 정권찬탈을 위해 형제권속에게까지 무자비한 척살을 단행했던 방원 태종도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은 어찌할 수 없었다.
그는 왕권 양위를 생각하고 있었다. 수많은 권신들의 만류가 있었지만, 그는 점점 쇠약해져만 가는 자신의 육신을 돌아보며 다음번 왕이 될 자식들을 살펴보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일찌감치 세자로 책봉된 큰아들 양녕대군의 방탕한 생활에서 비롯되었다. 순리로야 따지면 마땅히 세자인 양녕이 다음 번 왕위를 물려받아야겠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했다. 무도의 법으로 정권을 잡은 그였기에, 그리고 아버지 이성계마저도 밀어낸 자신이었기에, 권력 주변으로 몰려드는 불나비 같은 자들에 대한 의심은 병적이리만치 컸다.
자신의 처가, 그러니까 양녕대군의 외가 민씨 일족의 발호가 걱정스러웠다. 양녕은 어릴 때부터 외가에서 자랐고, 또한 그가 왕권을 양위한다는 소문이 돌자 민씨 일족에서 벌써 세자를 등에 업고 날뛰는 자들이 소동을 벌인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더구나 어린 양녕은 태종의 된서리를 맞은 민씨 일족을 옹호하는 말을 어전에서 태연하게 하였다. 만인지상의 권력에는 으레 꼬이는 대단치 않은 일을 두고 태종은 세자 양녕을 불신하기 시작했다.
북소리로 잠재우던 효령 대군의 단심!
사실 양녕의 방탕한 기질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 이후로 양녕은 시정잡배들과 어울리기 시작했고, 그들과 어울리기 위해 궁궐을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강제로 해야 하는 글 읽기에 신물이 난 것은 물론, 궁중 생활 자체에도 극단적인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태종의 마음은 양녕에게서 떠나갔다.
지난날 우리 교과서는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양녕과 효령대군의 아름다운 형제애를 부각시켜 놓았지만 그건 그야말로 뒷사람들이 만들어낸 유치한 이야기일 뿐이다. 세상 누가 왕위를 마다할 사람이 있겠는가? 더구나 조선왕조와 같은 권력지상주의, 극단의 사회구조에서.
연주암 종각 뒤쪽에 위치한 효령각.(사진 염정우 기자)
어쨌거나 양녕과 효령은 왕위가 셋째인 충녕 세종에게 넘어가자 그 절망감을 이기지 못해 방황하게 된다. 양녕은 여전히 서울 근교 곳곳을 돌면서 방랑하고 있었고, 효령은 관악산 관악사, 그러니까 원래의 연주암 조금 아래에서 북을 치고 있었다. 처음에는 불경 구절에 맞추어 쳤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북을 잡은 그의 손은 빨라졌다. 형인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된다면 당연히 자신이 세자가 될 줄 알고 품었던 그 마음이 부끄러웠다. 그는 더욱 세차게 북을 두드렸다.
"둥둥둥둥!"
어찌나 북을 세게 쳤던지 나중에는 가죽이 늘어났다.
선방에 있던 스님이 이상스러워 뒷방 북소리 나는 데로 나가 보았다. 효령은 그를 보지 못하고 여전히 북을 치고 있었다. 딱했다.
"대군, 북이 늘어났소이다. 북소리가 아니라 가죽 치는 소리밖에 안 들리오이다. 자신이 치는 북소리는 자신밖에 들을 수 없다는 이치를 깨달아야겠소."
그제서야 효령은 지긋이 그 늙은 스님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엔 비로소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나 효령과 달리 양녕은 태종이 죽고 세종이 즉위하였는데도 여전히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불심 깊은 효령이 양녕에게 관악사 동행을 권했다.
양녕은 아무 곳이나 좋았다. 술과 여자, 그리고 그가 취미로 삼고 있는 사냥만 할 수 있다면‥‥‥ 관악사는 도성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있었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물끄러미 그 도성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왕이 된 아우 충녕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찬가지로 아버지 태종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것이 그를 견딜 수 없게 했다. 그는 어서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자기 것이 될 수 있었던…… 도성을 마음껏 바라볼 수 없는 슬픔이 그의 가슴을 메웠다.
양녕 대군의 방랑이 눈물 속에 잠들고
양녕은 관악사에 도착해서는 마지못해 아우와 같이 법당에 나가 부처님께 공손히 예를 올렸다. 어릴 때부터 불심 깊은 효령은 정성껏 부처님 앞에서 예를 갖췄지만, 불교에 뜻이 없고 세상사가 모두 허황하게만 느껴지는 양녕에게는 절이라고 해서 특별한 의미가 있을 수 없었다.
불당 안에는 부처님상이 장엄하게 앉아 있으나 한 겹을 뜯어 본다면 나무나 싸리채로 만든 물건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웃었다. 이렇게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을 보고 절을 하다니…. 그는 의례적인 절 방문 격식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즉시로 사냥놀이에 나섰다.
"형님, 오늘은 안 됩니다. 오늘은 재를 올리는 날이니 사냥과 술, 고기는 삼가해 주셨으면 합니다."
효령이 양녕의 뒤꼭지에 대고 한 말이었다.
양녕은 또 웃었다. 그리고 어금니를 맞물었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흐흐, 나는 지지리 복도 많다. 살아서는 왕의 형이 되고, 죽어서는 부처님의 형이 되겠구나. 흐흐!"
그러나 그렇게 옹골차게 자신의 심정을 내뱉어도 마음 한구석에 뭉쳐있는 응어리는 풀리지 않았다. 처음 효령과의 짧은 동행 후 2년이 흘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왕조에 대한 미련은 도성을 떠난 시간이 오래일수록 더욱 끓어올랐다. 하루에도 수십번을 도성이 보이는 이곳을 떠나고 싶었지만, 몸은 마음같이 따라주지 않았다.
연주암 3층석탑.(사진. 염정우 기자)
아침이면 일어나서 연기가 오르는 도성을 바라보았고, 저녁이면 하나둘 등불이 껴지는 머언 도성을 그리워하였다. 양녕의 마음을 아는 효령은 양녕에게 간절히 불경을 읽도록 권했다. 그러나 양녕에게 부처님의 말씀이 가슴 깊이 와 닿을 리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이 되어 달이 밝아올 때 그는 갑갑한 심정을 풀기 위해 뒷산에 올라갔다. 큰법당에서는 재 올리는 소리가 여전히 들려왔다. 쏟아지는 달빛 아래 이곳저곳을 거닐다가 문득 그는 작은 암자를 발견하였다. 무엇 하는 곳인가 하고 기웃해 보니 늙은 스님이 홀로 달맞이를 하고 있었다.
"노승은 이곳에 어찌 홀로 계시오?"
백발의 노승이 대답했다.
"달을 보고 있소이다."
"어째 저 아래 절에서 재 올리는데 아니 가셨소?"
"소승은 그런 중이 아니오."
"그럼 무엇하시오?"
"암자에서 홀로 공부하고 있는 중이오."
"그래도 좀 가보시지요?"
"속된 중들은 염불보다 잿밥을 좋아하겠지만 소승은 벽곡하고 삽니다. 그래서 나의 마음은 언제나 평화스럽소."
노승은 여전히 달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양녕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저 도성에서 일어나는 일은 얼마나 부질없는가? 저 달빛 한줌보다 못한 세상의 일을 두고 자신은 스스로를 얼마나 학대했는가. 그는 자신이 겪어왔던 행로를 곰곰 되돌아보았다. 부끄러웠다. 그는 더 이상 노승의 얼굴을 대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는 총총 관악사로 내려왔다. 그러나 자리에 누워서도 조금 전에 만난 그 노승이 잊혀지질 않았다.
슬픔어린 또 하나의 전설
아침에 일어나는 즉시로 그는 어제의 그 산꼭대기 암자로 결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곳엔 어제의 그 암자는 온데간데없고 뜰 앞에는 다 쓰러져가는 탑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어젯밤 일을 생각하며 양녕은 시를 읊었다.
산 노을로 아침밥을 지어 먹고
덩굴 어린 달로 등을 삼네
외로운 바위 아래 자고 나니
오직 탑 한 층이 남아 있을 뿐일세
그 후로 그는 곤히 내려와 효령과 함께 암자가 있던 자리로 절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관악사는 연주암이 되었다. 관악산의 최정상에 자리잡게 되었다.
훗날 사람들은 이 절을 가리켜 연주암-서울 도성을 그리워하는 암자-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 반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서울을 잊어버리기 위한 두 왕자의 몸부림이 오늘의 연주암을 만들었다.
양녕이 보았던 그 삼층석탑은 지금도 절 앞마당에 곱게 자리하고 있다. 몇몇 불자들이 그 석탑을 돌면서 탑돌이를 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등산복 차림을 한 젊은이들이 자동판매기에서 뽑은 커피를 마시며 낄낄대고 있고, 마치 안개처럼 다가온 빗줄기는 어느새 굵어지고 있었다. 그 빗줄기를 맞으면서 연주대로 향했다.
연주대.(사진. 염정우 기자)
연주암 뒤편의 오솔길엔 저희들끼리 몸을 부비고 있는 외로운 수목들이 가물가물 안개와 빗속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황홀지경은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이다. 눈 쌓인 산정, 허공에서 떨어지는 빗줄기, 꼭 몇십분 간의 인간 비인간의 경계의 산길이었다.
그러나 이 맵시 있는 색시 같은 연주대도 기실 모두 인간의 이기가 만튼 서글픈 흉상들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깎아지른 벼랑 끝의 연주대, 그러나 한눈에 들어와야 할 서울은 짙은 안개로 인해 보이지 않았다.
연주대, 연주암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관해서는 또 다른 전래가 있다. 고려의 충신 강득룡, 서견, 남을진 등이 고려가 망하자 이곳 관악산의 정상에 올라 멀리 송도를 바라보며 고려를 연모해 연주대로 불려졌다는 것이다. 이 연주대 또한 원래는 의상대사의 이름을 따서 의상대라고 불려지다가 후일에 연주대로 기록되었다.
진짜 주인은 어디에?
연주암 전경.(사진. 염정우 기자)
삼막사와 함께 관악산에서 가장 유서 깊은 절, 이 땅에 살았던 인물과 역사, 그리고 소박한 경관이 어우러져 가히 도성의 덧없음을 먼발치 아래 굽어보고 있는 천하오연의 도량.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 우리에게 남겨진 연주암의 실재를 기록한다.
연주암은 높은 산정에 자리 잡은 산지가람, 대웅전과 삼성각. 그리고 종각 등의 전각과 2동의 요사채로 이루어졌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3층 석탑이 있고, 종각 왼쪽에 3기, 대웅전 오른쪽에 1기의 공덕비가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1975년에 건립했다. 내부에는 석가여래상과 지장보살상을 봉안하였고, 후불탱화 지장탱화, 그리고 괘불이 있다.
삼성각은 대웅전의 오른편 뒤편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최근 건물이다. 이전에는 금륜보전이라 불렸고, 내부에 독성상, 산신탱화, 그리고 1926년 제작된 독성탱화를 봉안하였다. 종각은 대웅전 오른쪽 축대 위에 새로 지었는데 원래는 나한전 자리였다. 연주대는 해발629 미터의 기암절벽 정상에 위치한다. 연주암의 역사와 호흡을 같이한 이 건물은 건평 3.14평의 맞배지붕 양식이다. 내부에는 석가여래상과 약사여래상, 그리고 16나한상을 봉안하였고 지금은 나한전이라 불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