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사에 있어서 ‘조선시대’는 지금껏 ‘암흑의 시대’로 간주돼 왔다. 이 암흑의 증후군은 불교사 연구에도 깊게 드리워져, 조선시대 불교사는 곧 ‘피폐와 수탈의 시대’로 간주돼 왔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물론 후대의 학자들까지 조선을 억불(抑佛)의 시대로 단정했고, 이같은 경향은 조선시대 불교사 연구에 대한 기피현상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선시대 연구는 가히 폭발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성장을 하게 되었다. 1990년대 이전까지는 거의 찾아볼 수 없던 박사논문이 1990년대에 들어 6편이 발표됐고 2000년대에는 20편 넘게 발표됐다는 점만 봐도 조선불교에 대한 관심이 얼마만큼 큰 폭으로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조선왕조실록이 90년대 중반 CD롬으로 제작되면서 조선시대 연구가 훨씬 더 용이해졌고, 다른 시대의 사료들은 이미 대부분 다루어진 반면 조선시대에는 아직 손대지 않은 수많은 자료들이 남아있다는 점이 초학자들의 흥미를 이끌었던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무엇보다 조선시대 불교는 현재 한국불교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난하지만 매우 절실한 연구분야라는 인식이 확산됐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불교사 연구는 여전히 『이조불교(李朝佛敎)』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이조불교』는 일제시대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지낸 다카하시 도오루(高橋亨)의 저작으로, 조선시대 전시기의 불교사를 다룬 최초의 개설서였다. 그런데 약 80년이 지난 지금까지 조선불교사를 전체적으로 조망한 책이 단 한편도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시대의 연구가 얼마나 미진했는지를 단편적으로 드러내준다.
그런데 최근 이조불교 이후 조선시대 불교사 전체를 아우른 첫 번째 책이 드디어 탄생했다.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김용태 연구교수의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임제법통과 교학전통』이 그것이다.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조선후기의 임제법통의 전개와 교학적인 전통을 주로 다루고 있지만 조선시대 불교의 존립기반, 조선 불교의 시대성 추구 등 조선시대 불교 전반을 아우르고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 불교를 통시적으로 다룬 책이 등장한 것은 김 교수 개인의 학문적 역량이 크게 작용했음이 분명하지만,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조선불교사에 대한 연구의 토대가 시대 전체를 아우를 수 있을 정도로 축적되었음을 의미한다.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조선시대 불교사 연구는 조선전기 국가의 억불정책, 조선후기 승역과 임진왜란 당시 의승군들의 역할 등 몇몇 분야에 치중돼 있었다. 또한 이같은 연구들은 조선시대가 억불의 시대임을 반증하는 성과물들이었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가 되면서 “조선시대가 그토록 억불로 점철된 시대였다면 어떻게 불교의 전통이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라는 문제의식을 토대로 하는 연구성과들이 속속들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유불의 공존을 추구한 사상사 연구들과 조선후기 불경 출판의 확대, 삼문수학 전통의 계승, 왕실의 불화 조성 등 각 분야에서 조선시대를 새롭게 조망하는 연구성과들이 쏟아져나왔다. 이같은 연구의 토대 위에서 드디어 조선시대 불교사를 조망하는 첫 개설서가 탄생한 것이다.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의 발간은 이조불교 이후 첫 개설서라는 점에서도 충분히 의의가 있지만, 무엇보다 ‘억불시대’라는 도그마에서 벗어난 저술이라는 점에서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김 교수는 “식민지 시대 이후의 부정론과 단절적 인식에서 탈피하여 역사적 실상을 연속적 관점에서 규명해야 하며, 조선이라는 시공간적 조건과 불교전통의 내적 흐름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토대로 이 책을 집필했다고 말한다.
김 교수는 조선시대 불교를 “조선후기에 존립의 교두보를 확보하면서 자립의 길을 걸어왔다”고 설명했다. 즉 사상과 수행의 측면에서 조선후기 불교 전통의 핵심은 임제법통과 간화선 수행으로 상징되는 선종과 선교겸수에서 시작하여 화엄을 중심으로 전개된 교학, 즉 선종과 교종 양자의 결합이 이루어진 한편 사회적으로는 유교사회에서의 시대성 추구와 공존 모색을 통해 불교 내세관이 갖는 흡인력을 토대로 불교의 사회적 기반을 공고히 하는데 일조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조선시대 불교가 유교사회에서의 존립을 모색할 때 가장 필수적으로 요구된 것이 윤리적 문제, 특히 충효의 실현이었다”고 주장했다. 임진왜란 때의 승군 활동은 충의를 입증하는 계기가 되었고, 전쟁으로 인한 무주고혼의 위령, 국왕과 왕실의 장수와 안녕을 기원함으로써 공효를 자임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충효의 실천이 조선후기 불교의 사회적 역할이었다면, 불교계 내부에서는 유교 지식인들과 시대정신을 함께 하는 여러 움직임이 나타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불교와 유교를 비교하여 양자의 근원이 같음을 주장하는 유불 조화의 논리가 조선시대 전시기에 걸쳐 진행된 것이다. 유불 조화의 논리는 조선전기 기화 등에 이어 조선후기의 승려들에게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또한 인조반정에 즈음하여 조선불교의 원류를 중국의 임제선사와 여말선초의 태고보우에게서 찾는 임제태고법통설이 정립된 점도 주목했다. 임제태고법통설은 1625년에서 1640년 사이에 제기되어 공론화되었는데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 명분론이 특히 강조된 때였다. 즉 1623년 광해군의 패륜과 재조지은 위반을 명분으로 한 인조반정이 일어났고, 이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화이론에 입각한 의리명분론이 일세를 풍미하였는데, 바로 이 시기에 당나라의 선승 임제의 후예임을 표방하는 임제태고법통설이 제기된 것이다. 김 교수는 이에 대해 “명분과 정통성이 강조된 시대에 유교의 도통론과 같이 중화 정통의 계승을 표명한 흐름이었다”고 설명했다.
또한 조선후기에 전등 계보, 승전, 사지 등이 각 사찰마다 만들어졌는데, 특히 18세기 이후에는 각 문파에서 자파를 중심으로 전통을 집성하려는 시도들이 이루어졌다.
이처럼 17세기 전반에 유학의 도통론에 상응하는 정통론적 법통설이 성립되고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전등 계보의 편찬이 대거 이루어진 것 또한 유교사회에서 불교가 공존을 모색하는 움직임이었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김 교수는 이 책의 말미에서 “주체가 몰각된 근대성 예찬보다는 몰락한 전통의 자기정체성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은 그동안 학계에서 이루어진 ‘맹목적인 근대성의 발견’에 대한 나름의 비판을 가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사료에 의해 판단하고, 사료를 근거로 설명한다는 역사학자의 자기 성찰이기도 하다.
“불교의 위상을 높이려는 목적보다는 전통에 대한 실체적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는 김 교수의 지적은 조선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물론 현재 불교계의 구성원들에게 커다란 시사점을 던져준다.
김 교수의 설명대로 조선시대는 현대 한국불교의 원형을 간직한 시대이다. 그 원형에 대한 복원은 매우 필요하지만 학자들에게는 매우 힘든 작업이다. 또한 원형으로의 접근은 일정한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 불교계가 사회적 기득권을 잃어버린 시대에 생존을 위해 선택한 방편들이 현재의 불교도들에게 약간의 자존심의 손상을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역사적 진실이 요구된다. 역사가 힘을 발휘할 수 있기 위해서는, 과거의 역사가 우리에게 법등명(法燈明)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실이 수반돼야 하기 때문이다.
김 교수가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를 통해 시도한 ‘조선후기 불교의 존립 양상과 실태,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대한 통시적 조명’은 조선시대 불교사 연구의 새로운 도약을 알리는 신호탄임에 분명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