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정윤경
자살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고뇌를 이기지 못해 오늘도 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목숨처럼 귀하고 소중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단 하나뿐이고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일회적인 것입니다. 그런 목숨을 우리는 너무도 소홀히 여기고 있습니다. 이 순간에도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며 단 몇 분만이라도 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산소 호흡기를 때지 못하는 환자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환자의 가족들은 또 얼마나 가슴 졸이면서 그가 단 몇 분이라도 더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이런 존엄한 목숨을 너무 손쉽게 포기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자기 혼자만을 위해 살거나 죽는 것은 더 따질 것도 없이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결코 자랑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개인적인 이유가 무엇이든, 자기 혼자만을 생각하고 스스로 목숨을 내던진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사람은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설령 떨어져 지낸다 하더라도 그는 가족과 친구, 수많은 이웃들과 함께 삶의 흐름을 이루고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그 대열에서 자기감정대로 이탈하는 것은 결코 명예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자살은 자신의 목숨을 손으로 끊는 자해행위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해치는 행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해친 자해의 업을 짊어지고 다음 생으로 건너갑니다. 윤회의 사슬 같은 것입니다. 윤회의 고통이 따릅니다. 그런데 그 고통에 스스로 자신 목숨을 끊는 자해의 업을 하나 더 추가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곧 업이 됩니다. 우리 마음속에 그와 같은 씨앗이 뿌려지는 것입니다. 그 씨앗이 어떤 상황을 만나면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낳습니다. 모든 행위는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고 업이 됩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인관관계의 배후에는 반드시 업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착한 업이든 착하지 않은 업이든 인과관계의 고리를 업이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업은 그 파장이 있기 때문에 결코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관성의 법칙처럼 습관화됩니다. 그래서 업력이 되고 업장으로 굳어집니다. 결코 한두 번으로 종결되지 않습니다.
사족의 말
내 산방을 찾아온 분의 이야기다. 자살을 예방하기 위해 생명존엄운동을 펼치겠다는 시민사회운동가였다. 그분은 나에게 ‘생명존엄선언문’을 부탁했다. 그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우리나라의 경우 심각했다. 보건복지부와 중앙자살예방센터가 공개한 ‘2019 자살예방백서’에 따르면, 2017년 우리나라의 자살자 수는 1만2463명으로 2016년 1만3092명보다 629명(4.8%) 감소했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간 자살률을 비교하면, 우리나라 자살률(2016년 기준 25.8명)은 리투아니아(2016년 기준, 26.7명)에 이어 두 번째로 높았다. 청소년(10~24세) 자살률(7.6명)은 OECD 회원국(평균 6.1명) 중 열한 번째로 높았고, 노인(65세 이상) 자살률(58.6명)은 OECD(평균 18.8명)에서 1위였다. 부모 세대로서 젊은이보다 더 대접받아야 할 노인의 자살률이 OECD 회원국 중에서 가장 높다니 어안이 벙벙했다.
2016년의 경우, 하루에 25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얘기를 듣고는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지옥인지 전쟁터인지 한 순간 혼란이 왔다. 잠시 후 나는 그분에게 두말 하지 않고 ‘생명존엄선언문’을 써드리겠다고 약속했고, 며칠 뒤 완성해서 메일로 보냈다. 내 글을 보고 목숨을 끊는 사람이 줄어든다면 그것도 역시 작가의 몫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직 그 분으로부터 소식이 없지만 내 글이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한편, 나는 업장을 운명과 동의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업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생각이 말이 되고, 말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운명이 된다는 금언이 있다. 운명을 바꾸려면, 업장에서 벗어나려면 처음 한 생각을 바꿔야 하는 이치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