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파 스님과 다성(茶聖)으로 일컫는 대흥사의 초의의순(草衣意恂) 스님, 실학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선생과의 선 논쟁(禪論爭)을 격발시킨 『선문수경(禪文手鏡)』(선운사 펴냄)이 출간됐다. 조선후기 불교 지성을 일깨우는 기폭제 역할을 했던 <선문수경>이 한글로 완역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책의 번역은 김두재 전 역경위원이 맡았으며, 펴낸 곳은 백파사상연구소(소장 선일 스님)이다.

<선문수경>은 조선 후기의 백파긍선(白坡亘璇)의 대표적인 저술로, <선가귀감> 이후 250여 년 만에 서산대사의 선불교 정신이 유전된 전문 선서이다. 임제종의 사상을 강령화한 <선문강요(禪門綱要)>에 의거하여 선문의 여러 종파의 특색을 밝힌 <선문수경>은 임제삼구(臨濟三句)를 기준으로 선문의 여러 견해를 논변하였다.

특히 임제삼구를 일대 선과 교의 뜻을 온전하게 설명하여 포섭하지 않은 것이 없는 온총삼구(蘊摠三句)라고 하였다.

임제 제1구를 삼요(三要), 즉 대기(大機)․대용(大用)․기용제시(機用齊施)라고 보았으며, 이 도리를 얻으면 부처와 조사의 스승이 된다. 따라서 조사선(祖師禪)의 근기라고 보았다. 제2구는 삼현(三玄), 즉 체중현(體中玄)․용중현(用中玄)․구중현(句中玄)으로, 이 도리를 얻으면 인천(人天)의 스승이 된다고 하여, 여래선(如來禪)의 근기라고 보았다. 제3구는 유(有)․무(無)․중(中)을 희롱하는 것으로, 이것으로는 자기 한 사람도 구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 삼구를 기본원리로 삼아 저자는 삼구도를 작성하고 그 구체적인 해석을 시도하였다. 이런 시도는 당시의 선 이론이 의리선=여래선, 격외선=조사선의 선 분류법이었던 것과 달리, 의리선, 여래선, 조사선의 삼종선으로 체계를 세운 것이다.

한글 번역본 <선문수경>에는 부록으로 <간당론> <원본 선문수경>을 수록하였다.

백파의 삼종선 체계에 대해 대흥사에 주석하던 다성 초의 스님은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를 지어 백파 스님이 선을 3종으로 판별하는 것부터가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또 조사선과 여래선, 격외선과 의리선 등의 사변(四辨)을 중심으로 백파 스님과는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여기에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던 추사 김정희까지 가세해 <증답백파서(證答白坡書)>를 통해 백파 스님의 견해를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초의 스님의 주장을 적극 옹호했다. 이후 백파 스님의 문도인 설두, 홍기, 진하 스님 등이 옹호와 반론을 거듭하면서 사상논쟁은 무려 100여년 간이나 지속됐다.

김상일 동국대 국문과 교수는 이 책의 해제에서 “이러한 사상논쟁은 일찍이 우리 불교사에서 볼 수 없었던 것으로,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 조선조 성리학적 지배질서의 핍박으로 산중으로 내몰려 침체되어 있던 우리 불교계를 진작시키고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논쟁과정에서 백파 스님에 대해 “아무런 심증(心證)도 없이 이것저것 주워 보태서 입으로만 떠드는 그 모습이 볼만하다”고 비판했던 추사가 백파가 죽자 훗날 직접 짓고 쓴 백파 스님의 비문을 짓고 “백파 스님은 화엄종주이자 율사이며 대기대용(大機大用)의 격외선사(格外禪師)”라고 찬탄한 것은 백파 스님의 면모를 알게 하는 좋은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백파사상연구소장 선일 스님은 “백파 스님의 많은 저서 중 <선문수경>은 현대의 우리들에게 어떻게 참선수행을 해야 하는지를 일깨워 주는 매우 소중한 책”이라며 “늦게나마 이렇게 소중한 책이 백파스님의 얼이 숨쉬는 선운사의 백파사상연구소에서 발간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한편 이번 책에는 ‘선문수경’ 외에도 백파 스님이 1826년 쓴 ‘간당론(看堂論)’도 부록으로 실려 있다. 일종의 수선(修禪) 규약적 성격과 의식적 성격을 지닌 ‘간당론’은 지극히 엄정하고도 실천적이었던 구도자로서의 백파 스님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지은이 백파긍선(1767~1852)은?

전라도 무장(현 고창) 선운사에서 출가하였다. 이후 지리산 영원암의 설파상언으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구암사 설봉거일의 법통을 이어받았다. 백양산 운문암과 구암사 등지에서 법회를 열어 선문의 중흥에 기여하였고, 말년에는 화엄사에서 주석하였다. 그는 주선 후기에 율과 화엄과 선의 정수를 모두 갖춘 거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입적 후 제자들이 구암사에 탑을 세우고 선운사에 비를 세웠다. 저서로는 <정혜결사문> <선문수경> <육조대사법보단경요해> <태고암가입과> <식지변설> <오종강요사기> <선문염송사기> <금강팔해경> <선요기> <작법귀감> 등이 있다.

*옮긴이 김두재는?

민족문화추진회와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수료하고, 동국역경원 역경위원을 역임하였다. 저․역본으로는 <능엄경> <시왕경> <제경요집> <정본수능엄경환해산보기> <광찬경> 등이 있고, 단편역서로는 <해동고승전> <당호법사문법립별전> <십문변혹론> <태자서응본기경> <동국승니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