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고익진 박사(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교수)의 저서 『현대한국불교의 방향』을 요약 게재합니다.

자유의 불교적 의미

어떤 바라문이 부처님을 찾아와서 ‘일체(一切)라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라고 물은 일이 있다. 이때 부처님은 서슴지 않고 ‘그것은 열두 가지(十二處)에 포함되는 것이니, 눈 귀 코 혀 몸 의지와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법(法)이니라’고 답하셨다. <잡아함 권13>

우리 만물은 포섭하는 그 열두 가지를 살펴보면 인간의 의식기관과 그 대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들이 인식할 수 있는 것만이 가장 확실한 존재라는 입장이 밝혀져 있는 것이다.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입장을 나타내는 이 교설에서 우리들이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인간의 주체를 ‘의지(意志manas)'라는 말로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대의 ‘자유’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바탕을 둔 개념이라고 볼 수가 있다. 그런데 불교는 처음부터 인간을 그러한 ‘의지’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일체를 자재신(自在神)이나 숙명, 우연에 의해 일어난다고 보는 세계관에 대해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계신다. ‘만일 모든 것이 그러한 원인들에 의해 일어난다고 하면 인간의 범죄는 이론상 성립되지 않을 것이며, 의지와 같은 현상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중아함 권3 度經>

이것은 어떠한 형태로든지 예속되어 있는 ‘의지’라면 그것은 참다운 자유의지라고 말할 수 없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동시에 이것은 불교의 ‘의지’는 어떤 것에도 예속되어 있지 않은 지극히 순수한 ‘자유’를 지닌 것이라는 말이 된다. 선을 행하든지 악을 행하든지는 각자의 의지에 내맡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불교의 기본입장에서 그러한 ‘의지’의 대상을 ‘법(法, dharma)'이라는 말로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법‘은 어떤 원인이 있을 때 그에 대해서 ’필연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을 가리킨다. 선인(善因)에는 선과(善果)를, 악인(惡因)에는 악과(惡果)를, 이런 뜻의 법으로써 의지의 대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자유에 대한 철저한 책임이 각자에게 돌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불교에서의 자유와 책임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도 불교에서는 아직 참다운 자유에는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고 있다. 자재신(自在神)을 비롯한 일체의 외적 구속을 벗어난 것이지만 ‘나’라는 내적인 구속은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의지의 바탕에 존재하는 한, 그것이 행사하는 자유는 아무래도 ‘나’를 위한 이기적 방향으로 흐르지 않을 수가 없다. 의로운 일이 눈앞에 있어도 ‘나’를 버리고 그것을 행해보려는 자유는 결코 결행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불교에서는 그러한 ‘나’를 번뇌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이요, 무지요, 계박이요, 죽음이라고 규정한다. 의로운 일에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 장애가 제거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불교의 무아설(無我說)은 바로 이런 측면에서 이해될 수가 있다. ‘나’를 멸하려는 강렬한 실천은 마침내 대승적 공(空)사상에로 심화된다. 그러나 단순히 ‘공’만을 설하는 것이 아니라, 보시를 비롯한 대사회적 활동이 보살의 덕목으로 함께 설해지고 있는 것이다. 무아는 실로 자유의 원천이 됨을 알겠다.

이렇게 볼 때 불교는 자유를 위한 종교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나 해탈은 인간성에 본유(本有)한 이러한 자유에 대한 각성이요 계발이다.

원효스님은 ‘일체무애인(一切無碍人)은 한길로 생사를 벗어난다(一道出生死)’라는 무애가를 부르며 신라 사회를 누비고 다녔다고 한다. 천년 전 신라를 깨우치던 그 싱싱한 목소리에 우리는 다시금 귀를 기울여야 하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