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에 아들과 함께 주워온 은행열매만으로는 턱없이 모자랄 게 뻔해, 아내와 함께 재차 은행나무를 찾았다. 내년 농사에 사용할 천연 살충제 만들기에 나선 것이다. 친환경 농사를 목표로 하는 만큼 최고의 천연 살충제 ‘은행열매 삶은 물’을 미리 만들어 놓는 건 매우 중요한 숙제다. 현묘재 아래쪽에 있는 밤나무집 은행나무에 엄청난 양의 은행이 열렸고, 은행나무 주인인 노부부 또한 친절하고 후덕한 분들이어서 고맙게도 재료 마련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열심히 은행열매를 줍는 우리 부부를 바라보면서 두 어르신은 그저 재미있다는 표정이다. 어쩌면 그분들의 눈에는 살충제 치면 간단할 일인데 공연히 부산을 떠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농사를 지어보면 알겠지만, 인건비는 차치하고서도, 원가를 넘겨 이익 남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특히 소농일수록 손익분기점을 넘긴다는 건 하늘에 별 따기 수준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필요한 살충제를 농자재센터에서 구입하는 것은 적자 농업의 출발점에 해당된다.

 

작물에 벌레가 들끓으면 어쩔 수 없이 살충제 등 농약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건강한 먹거리를 위해서는 친환경 농약을 구입해야 하겠지만, 그 가격대가 만만치 않은 게 문제다. 차라리 농사를 포기하고 친환경농산물을 구입해 먹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천연 살충제를 만드는 일은, 그래서 농사에서 매우 중요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친환경 유기농 농사를 지을 수 있고 원가절감 효과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농사부터 직접 액비를 만들어 화학비료의 사용을 피할 수 있었지만, 살충제는 늘 고민거리였다. 은행잎을 녹즙기로 짜서 그 추출물을 희석시켜 농약 사용을 최대한 줄이긴 했지만 고추의 경우에는 100% 친환경 농사를 짓지는 못했던 것이다.

 

고민 끝에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친환경 농사를 짓고 있는 분들이 블로그 등에 올려놓은 농사 후기의 공통적인 결론이 ‘은행열매 삶은 물’보다 탁월한 친환경 살충제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름이 살충제이니, 벌레를 죽이는 것으로 알지만 독한 냄새로 벌레는 쫓아내는 역할이 더 크다. 따라서 불살생을 제1계율로 삼는 불자로서 부담은 다소 덜하다.

 

은행열매 삶은 물 만들기의 시기는 가을이 가기 전인 늦가을이 적절하지만, 가을 수확이 늦어지면서 동지(冬至)가 지나서야 시간을 낼 수 있었다. 은행열매 삶은 물을 만들기 위해 아궁이방의 가마솥을 사용하기로 했다. 은행열매를 가마솥에 붓고, 물을 부어 10시간 이상 삶아내는 간단치 않은 작업이다. 가마솥 용량의 한계로 두 차례로 나누어 은행열매를 삶아야 하니, 도합 스무 시간 넘게 아궁이에 불을 지펴야 한다. 농사를 크게 짓는 친환경 농가에서는 전열기를 사용한다고 하지만, 이런저런 기구가 늘어나는 것이 번거로워 장작불 때는 수고를 견디기로 했다.

 

오후 4시에 시작한 천연 살충제 만들기 작업은 다음날 오전이 다 지나가고 나서야 마무리됐다. 밤새 아궁이 불을 지피느라고 부리나케 현관문을 들락거렸다. 불을 지피고 아궁이를 지키며 불을 관리하는 일이야 내가 직접 담당했지만, 옻이 잘 오르는 체질이어서 은행열매 삶은 물을 용기에 담는 일은 아내에게 넘겼다. 이렇게 만든 은행열매 삶은 물의 양은 약 400여 리터. 그늘에 보관하며 사용해야 한다니, 일단 컨테이너 창고에 보관했다. 사실 은행열매 삶은 물은 워낙 독해서 잘 변질이 되지 않는다고 하니 관리에 별 어려움은 없다. 다만 이 정도 양이면 내년 450평 밭농사를 감당할 수 있을지는 경험이 없어 가늠하지 못하겠다. 그래도 내년 농사 준비 중 아주 중요한 부분을 해결했으니 마음이야 한결 가벼워졌다. 여기에 아들이 지난 봄 쇠비름을 삭혀 만들어 놓은 ‘자닮오일(표면접착제 효과가 있는 천연 살충제)’을 혼용하면 그야말로 강력한 종합살균살충제가 된다고 하니 내년의 농약 값 지출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은행열매를 삶기 위해서 기왕에 아궁이에 불을 지피게 되었으니, 아궁이 방에 2주 전 만든 메주를 띄우기로 했다. 20시간 연속 불을 땐 아궁이 방은 찜질방처럼 달아올라 불을 뺀 다음에도 거의 하루 동안 열기가 식지 않았다. 그래서 아궁이 방 아랫목은 메주가, 윗목은 우리 부부의 훌륭한 잠자리가 되었다.

 

이렇게 천연살충제인 은행열매 삶은 물까지 만들고 나니 올 한 해 농사와 관련된 일은 모두 마무리됐다. 따라서 올해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위빠사나 수행차 한 달 일정으로 떠나는 미얀마 방문의 발걸음은 한결 가볍게 되었다. 그동안 틈틈이 테라와다 불교에서 전승되어온 붓다의 수행법 사마타와 위빠사나에 대한 공부를 해왔다. 강의도 듣고 선배 수행법사들에게 수행지도도 받으면서, 테라와다에 대한 기본적인 교육을 받기도 했다.

 

이번 미얀마 수행처에서의 한 달은 내 일생에서 매우 큰 분기점이 될 것 같다. 막연하게 알아왔던 붓다의 교설을 수행을 통해 정교하게 다듬고, 가슴이 아닌 머리로 했던 표피적 신행패턴에 일대 전환점을 마련되지 않을까 기대가 되는 것이다.

 

부득이하게 한 달 동안은 글 농사도 잠시 쉬어야 할 것 같다. 다만 미얀마 위빠사나 수행센터에서의 수행체험과 수행자로서의 삶이, 이후 어떻게 내 글 농사의 자양분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 다행히 이번 수행 여정에 오랜 세월 불연을 맺어온 법형제들 몇 분도 함께 하기로 했다. 첫 미얀마 방문인데도 든든한 이유다.

 

그리고 보니 밭농사와 글 농사를 병행하는 삶을 본격화한지 어언 2년이 되어간다. 돌이켜보면 어느 것 하나 온전하게 이루어진 것이 없는 것 같다. 한 달 동안의 수행을 통해 집중력을 키우고, 나아가 지혜까지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모든 것이 부족한 남편인데도 그저 무사히 잘 다녀오기를 바라며 땅콩도 볶아주고, 서리태도 튀겨 정성껏 챙겨주는 아내가 눈물겹게 고마울 뿐이다. 묘련심,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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