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정윤경
우리에게 자연은 무엇인가?
여는 말
스님께서 내 산방을 와서 보시고는 다음과 같이 글을 남기신 적이 있다.
“남쪽에 내려간 김에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시골에 내려가 흙을 만지면서 새롭게 살아가는 한 친지를 방문했다. 소비와 소모의 땅,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혼자 살아가는 그 의지와 결단에 우선 공감했다. 작가인 그는 새로운 터전에서 살고 싶어 새로 집을 지어 나무를 심고 연못을 파고 채소를 가꾸면서 작업을 한다. 보기에 아주 건강한 삶을 시도하고 있다.”
스님이 가신 지 8년, 내 산방에 들르신 지 십 수 년, 나는 아직도 내 산방에서 그렇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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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로에 장작을 모아 놓으면 활활 타오르는 소리도 좋지만,
한참 있으면 난로 위에 올려놓은 돌솥에서 물 끓는 소리
또한 훈훈한 실내의 정취를 아늑하게 거들어준다.
산에 살면 오관 중에서도 특히 청각이 예민해지는데,
한밤중에 기러기 떼 날아가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깬다.
‘솨솨 쇄쇗 솨솨 쇄쇗...’
풀이 선 옷깃을 스치는 듯한 이 소리.
오밤중에 남녘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의 날갯짓 소리가,
어떤 혼령이 허공을 지나가는 소리처럼 들려오는 것 같아
나는 퍼뜩 맑은 정신이 든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내 영혼의 무게 같은 것을 헤아린다.
남은 세월을 어떻게 보낼지 생각하며 기러기 떼를 뒤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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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바다는 나름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한쪽에 치우친 삶을 서로 보완해 준다.
산의 고요와 침묵은 인간에게 명상의 씨를 뿌려주고
바다의 드넓음과 출렁거림은 꿈과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우리 삶에는 산만 있고 바다가 없어서는 안 된다.
부성적인 산과 모성적인 바다의 요소가 함께 조화를 이룰 때
삶은 생동감을 잃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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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보다 더 큰 스승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겸허하게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은 산소와 물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나무와 풀만이 산소와 물을 맑게 간직한다.
산소와 물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
<새들이 떠난 숲은 적막하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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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생명의 근원으로서 하나의 생명체로 바라봐야 한다.
자연은 인간과 격리된 별개의 세계가 아니다.
크게 보면 우주 자체가 커다란 생명체이며
자연은 생명체의 본질이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분이며
커다란 우주 생명체의 한 부분이다.
이 사실을 안다면 자연을 함부로 망가뜨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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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 따라 그 철에 어울리는 꽃이 피어나는 것은
자연이 지니고 있는 신비이다.
자연의 오묘한 신비 앞에서 아름다움의 뒤뜰을 넘어다본다.
요즘 세상에서는 다들 돈타령, 경제타령만 하느라고
아름다움에 대해서 무감각하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삶의 질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면
아름다움과 행복이 밀접한 상관관계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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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샘물과 같아서 퍼내어도
퍼내어도 다함이 없이 안에서 솟아난다.
아름다움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열린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안으로 느낄 수 있으면 된다.
<아름다운 마무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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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농사짓고 흙을 딛고 살던 시절에는
흙으로부터 많은 기운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흙의 교훈을 몸소 익힐 수 있었다. 그래서 허약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가진 것도 많고 아는 것도 많으며
여러 편리한 시설 속에 있는데 체력과 의지는 자꾸 떨어진다.
그것은 흙으로부터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지로부터 멀어지고 있으므로 허약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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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필요한 것들이다.
어떤 생물이 됐든 필요하기 때문에 생겨났다.
그런데 그것이 귀찮다고 해서 강한 살충제로 죽여 보라.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이로운 생물까지 모두 사라진다.
이 생태계의 이변과 환경문제, 또 지구 온난화 문제
이것이 어디서 왔는가. 우리가 전체의 흐름과 조화를 모르고
어떤 부분적인 것에 갇혀서 그것만 지나치게 소비하고
낭비하면서 혹사시키다 보니까 지구가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지구는 지진을 일으켰다가 또 사방에 불도 일으키고 있다.
지구 표면에 사는 인간들이 마치 물것처럼 하도 귀찮게 구니까
털어내느라고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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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알아야 한다.
나는 가끔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골프장을 만들기 위해
산을 허무는 걸 보면 내 팔과 몸이, 어느 한 부분이
달아나는 것처럼 아프다. 자연의 신음소리를 그대로 내가 듣는다.
몇 사람이 즐기기 위해서 자연을 그렇게 허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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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문명은 자연이 낳은 이자만으로도 모자라서
자연이 축적해 놓은 자본까지 갉아먹고 있다.
더 많이 만들고 더 많이 소비하는 산업구조가 문제다.
자연은 한정되어 있는데 언제까지 더 많이 만들고 소비할 것인가.
<산에는 꽃이 피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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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곁에서 꽃이 피어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생명의 신비인가.
곱고 향기로운 우주가 문을 열고 있는 것이다.
잠잠하던 숲에서 새들이 맑은 목청으로 노래하는 것은
우리들 삶에 물기를 보태주는 가락이다.
이런 일들이 내게는 그 어떤 정치나 경제현상보다도
훨씬 절실한 삶의 보람으로 여겨진다.
새벽 달빛 아래서 매화향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내 안에서도 은은히 삶의 신비가 배어나오는 것 같다.
<버리고 떠나기> 중에서
맺는 말
나는 나를 소개할 때 항상 자연을 벗 삼고 스승 삼아 산다고 말한다. 노자는 식영(息影)이라는 말을 남겼다. 자연에 귀의하면 인간의 그림자가 사라진다고. 내가 20년 전 산중에 산방을 짓고 들면서 내 마음을 담아 지은 <이불재 가는 길>이라는 가사가 있다. 작곡은 구자형 싱어송라이터가 했다.
상처받지 않은 이 누가 있으랴.
나 구름이듯 바람이듯 불어가
길 끝나는 곳에 지친 몸 쉬이네
허공에 빗방울들 산봉우리에 떨어져
영산강이 되고 섬진강이 되는
깊고 깊은 계당산을 아시나요
그 산 아래 이불재가 있다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