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동을 며칠 앞두니 발끝이 시리다. 지나간 여름, 염천(炎天)의 괴로움을 그토록 겪고도 따뜻한 것이 이토록 그리워지니 사람 마음처럼 거풋거리는 것도 드물다. 그러나 어찌 사람 마음뿐이랴. 세상 모든 것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을!

 

변하는 것들은 무상(無常)을 가르쳐주는 좋은 스승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저마다 스승이고 부처가 아닐 수 없다. 무상을 느끼는데 가을처럼 좋은 계절은 없다. 찬 기운을 머금었으나 아직은 상크름한 하늬바람 한 줄기 두 뺨을 스쳐갈 뿐 시공간이 정지한 듯 적막하지만 뒤돌아보면 초목들이 어제의 모습이 아니다. 배롱나무는 옹골지게 몸피를 말아 낙엽처럼 땅바닥에 떨구는데 그 무게는 가볍디가볍다. 가을 기운 완연한 잔디마당에 날아와 아무렇게나 어우러진 감잎과 구지뽕잎, 매화 이파리들은 가을을 흠뻑 느끼게 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뒤늦게 꽃밭의 국화들이 일제히 검붉은 꽃대를 밀어올리고 있지만 눈부시기는커녕 볼수록 스산하다. 뒷산 역시 하루가 다르게 성글어 개골산 될 날이 멀지 않았다. 

 

 

 

그래도 가을 기운에 더 물씬 젖고 싶은 마음에, 이웃마을 성상리의 연밭 골정지(骨井池)로 향했다. 면천읍성의 동문 쪽에 있다고 해서 동문저수지라고도 불리는 골정지는, 버려진 못을 4년 동안 면천군수로 일했던 연암(燕巖) 박지원(1737∼1805)이 정조 24년(1800)에 재정비한 것이다. 연암은 골정지의 면모를 일신한 후 못 한 가운데에 돌섬을 쌓고 그 위에 멋들어진 6각의 초가정자를 세웠는데, 이름을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이라 지었다. 두보(杜甫)의 시에서 따온 이름인데, 연암이 절친 홍대용을 그리며 붙인 이름이라고 전한다. ‘하늘과 땅 사이에 이 초가 한 채로 족하다’는 의미를 지닌 정자 이름은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즐겨한 실학자들의 성정을 상징한다고 할 것이다. 이 저수지는 인근 면천향교의 유생들이 시문을 읊고 토론을 하며 입신양명을 꿈꾼 곳이지만, 보다 큰 목적은 농사지을 물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니, 실용을 강조했던 연암의 애민정신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무릇 내 사는 고을에 이렇게 유서 깊은 저수지가 있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지인이 찾아오면 시간을 내어 면천읍성, 향교와 함께 골정지와 건곤일초정을 소개하는 이유다.

 

 

 

 

늦가을의 연지는 황량하다 못해 처연하다. 말라비틀어진 연잎과 쓸쓸히 솟은 짙은 갈색 연자방이 바람에 마구 흔들리면, 우리네 인생살이를 적나라하게 보는 것 같아 가슴 짠하다. 저 짙은 갈색으로 남은 연자방에는 봄날의 파릇한 생기와 여름날의 화려함이 깃들어 있을 터.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의 과정이 반드시 뒤따르는 것이니, 골정지의 가을은 그 자체로 무상법문을 토해내는 유장한 사자후가 아닐 수 없다.

 

찬찬히 골정지를 돌아보았다. 그동안 많은 연지를 살펴보았으나, 이만큼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연지는 만나보지 못했다. 기와를 올리지 않고 볏짚으로 지붕을 이은 초정의 단아함과 소박함은 어쩌면 이 가을에 어울리는 모습일 것이다. 연암이 못 안 돌섬에 정자를 짓고 다리를 놓았을 때는 나무다리였으나, 지금은 거대한 화강암 돌다리로 되어 있다. 튼튼하기는 하겠으나, 고풍스러운 맛은 아무래도 덜하다. 때마침 이 마을에 산다는 촌로 한 분이 다가와 ‘내가 젊었을 때, 이 다리를 직접 놓은 사람’이라며 어깨를 으쓱거린다.

 

골정지에서 마을 안쪽을 바라다보면 저만치 향교가 자리하고 있다. 예전에는 향교의 유생들이 이곳에 내려와 시문을 짓고 읊으며 공부의 노고를 식혔을 것이 분명하다. 내친김에 향교도 둘러보았다. 향교의 규모만으로도 면천이 매우 중요한 고을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낯선 사람이 마을의 이곳저곳을 살피는 것이 신기했던지, 단풍나무 아래 평상을 놓고 그 위에 둘러앉아 막 찐 고구마를 간식삼아 드시던 네댓 8순 안팎의 할머니들이 고구마 먹어보라며 애써 손짓하신다. 사양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듯싶어 다가가 고구마 두어 개를 맛보았다. ‘마을이 참 편안하고 아름답다’고 말을 건네자 ‘면천 사람 같지는 않은데, 마을이 마음에 들면 어서 우리 동네로 이사 들어오라’며 활짝 웃는다.

 

맛난 고구마 잘 먹고 간다고 인사하자 할머니들은 굳이 고구마 한 개를 내손에 쥐어주신다.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서자 ‘기왕이면 여름에 또 오시유. 못에 연꽃이 아주 좋아유. 그때가 진짜지~’라는 조언까지 아끼지 않는다. 어딜 가나 젊은이들은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오늘날의 농촌 현실이고 보면 어르신들은 농촌을 지키는 마지막 버팀목에 다름 아니다. 나오는 길에 다시 골정지를 돌아보았다. 화려한 꽃잎은 모두 사라지고, 갈색으로 변색되어 가까스로 연자방을 떠받치고 있는 이지러진 마른연잎들이 마치 오늘의 농촌을 상징하는 듯하다.

 

새봄이 오면 못에는 파릇파릇 연이 되살아나겠지만, 아이들 재잘대는 소리 사라진 농촌마을에는 언제나 활기가 돌 것인가. 못 주변 은행나무가 농익은 은행들을 후드득 후드득 떨어뜨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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