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정윤경

왜 침묵해야 하는가?

여는 말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며 말하는 사람이 있고
남들의 외부를 들여다보며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대는 어느 지점을 바라보며 말하는 사람인가,
혹은 말하기보다 침묵을 더 좋아하는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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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끼리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것도
사실은 눈길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말은 설명하고 해설하고 또 주석을 달아야 하는
번거로움과 시끄러움이 따르지만
눈은 그럴 필요가 없다.
마주보면 이내 알아차릴 수 있고
마음속까지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
가까운 사이는 소리 내는 말보다도
오히려 침묵의 눈으로 뜻을 전하고 받아들인다.
                 <서 있는 사람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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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에 말이 적으면 어리석음이 지혜로 바뀐다.
입은 재앙의 문이기도 하므로 엄하게 지켜야 한다.
승찬대사의 <신심명>에 이런 구절이 있다.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진리에서 점점 멀어진다.
말과 생각이 끊어지면 여느 곳엔들 통하지 않으랴.”
가톨릭 사제인 토마스 머튼은 그의 <관상(觀想)기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침묵으로 성인들이 성장했고, 침묵에 의해 하느님의 능력이
그들 안에 머물렀으며, 침묵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신비가
그들에게 알려졌다.”
“많은 사람들이 열렬히 찾고 있지만 침묵 속에 머무는
사람만이 발견한다.”
“많은 말을 즐기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그가 비록 경탄할 만한
것을 말한다 할지라도 내부는 텅 비어 있다.
무엇보다도 침묵을 사랑하라. 침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열매를
너희에게 가져다 줄 것이다.”
                               <말과 침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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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자연의 소리를 즐기려면
아무 생각 없이 빈 마음으로 조용히 있기만 하면 된다.
어떤 선입관에 사로잡힘 없이 마음이 자유로워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장엄한 우주의 신비를,
우리들이 발 붙여 살고 있는
지구의 아름다움을 보고 느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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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말없이 우리에게 많은 깨우침을 준다.
자연 앞에서는 우리가 아는 얄팍한 지식을 접어두어야 한다.
입을 다물어야 침묵 속에서 ‘우주의 언어’를 들을 수 있다.
침묵 속에서 창조의 비밀과 사랑의 신비를 캐닐 수 있다.
하나의 씨앗이 대지에 묻혀 움이 트고 잎이 피고
열매를 맺을 때까지의 인내와 침묵이 절대로 필요하다.
자연은 원초적인 침묵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실체를 인식하려면 침묵이 전제되어야 한다.
태초에 말씀이 있기 전에 침묵이 있었음을 상상해야 한다.
침묵이야말로 자연의 말이고 우주의 언어다.
뛰어난 사상과 위대한 종교는 가지에서 또 가지를 치는
시끄러운 언어가 아니라, 자연의 침묵에서 싹텄다는 사실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사막의 교부나 불교의 선사가 우주의 언어인 침묵 속에서
성장하면서 거듭나게 됐다는 사실은,
말을 참지 못하는 현대의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침묵의 의미를 배워야 한다.
그리하여 인간도 자연의 일부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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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침묵에 귀를 기울일 때다.
소리에 찌든 우리의 의식을, 소리의 뒤안길을 거닐게 함으로써
오염에서 헤어나게 해야 한다.
수목들의 빈 가지처럼, 허공에 귀를 열어
‘소리 없는 소리’를 듣도록 해야 한다.
겨울의 빈 들녘처럼 우리들 의식을 텅 비울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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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은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되는 길이다.
우리가 무엇이 되기 위해서는
땅 속에서 삭는 씨앗의 침묵을 배워야 한다.
겨울은 밖으로 헛눈 팔지 않고
안으로 귀 기울이면서 여무는 계절이 되어야 한다.
육신의 나이가 하나씩 더 보태질 때
정신의 나이도 하나씩 보태질 수 있도록.
                     <봄 여름 가을 겨울> 중에서

맺는 말

묵언을 쉽게 표현하자면 침묵수행일 것이다.
침묵수행은 불가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마하트마 간디는 매주 월요일을 침묵의 날로 지냈다.
일주일이 시작하는 월요일을 왜 ‘말하지 않는 날’로 정했을까.
말보다 값진 침묵의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이렇게 말했다.
“진리의 숭배자에게는 침묵이 정신 훈련의 한 부분이다.”
“먼저 생각하라. 그런 뒤에 말하라. 이제 그만하라는 말을 듣기
전에 그쳐라.”
“사람이 짐승보다 높은 것은 말할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을 부당하게 행사한다면 짐승보다 못하다.”
“내 생의 순간마다 나는 침묵이 최대의 웅변임을 인식한다.
부득이 말해야 한다면, 가능한 한 적게 하라. 한마디로 충분할 때는
두 마디를 피하라.”
오래 전 암자기행을 할 때의 일이다.
김용사 금선대에 오르자 암자기둥에 ‘묵언’ 패(牌)가 걸려 있었다.
금선대 스님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나와 아내를 피해버린 것이다. 할 수 없이 우리는 샘으로 갔다.
마침 점심때라서 금선대 물이나 한 바가지 마시려고 했던 것이다.
샘가에는 스님의 빨래가 널브러져 있고 찬물이 담긴 그릇에는
1인분의 깍두기 반찬통이 동동 떠 있었다.
반찬통은 우리에게 어서 하산하라고 말하는 듯했다.
미안해진 아내는 샘가에 놓인 스님의 빨래를 했다.
잠시 후 우리도 약속이나 한 듯 묵언을 하며 하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