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 닙바나(Nibbāna)의 정의

닙바나의 사전적인 의미는 익히 알고 계시는 바에 이의가 없으나, 그 뜻의 해석에서는 닙바나를 실현하는 데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직 한 말씀 그 정의에서 파생되어 쓰이고 있는 “지고하고 완전한 행복”이라는 뜻을 앞세웁니다.
불교의 세계관에서 욕망의 세계인 욕계를 살고 있는 욕계의 하늘나라에서마저도 오직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데 그 목적이 있지, 그 위험성-감각적 쾌락을 파헤치고 그것을 벗어나게 하는 가르침이나 행위는 도외시됩니다. 지옥, 축생, 아귀, 수라의 4악도에서는 오로지 기근과 두려움에 쫓기느라 닙바나라는 말 자체가 있는지 의심스럽고, 욕계의 6천부터 11천-위대한 네 분의 하늘나라, 사대왕천, 서른 세분의 하늘나라 삼십삼천(도리천), 축복 받은 야마천의 하늘나라, 만족하는 신들의 도솔천, 쾌락을 창조하는 신들의 화락천, 다른 이의 즐거움마저 자기 것으로 즐기는 타화자재천-에서는 닙바나를 이해하고 있으나, 골치 아프게 그걸 생각할 겨를이 있느냐 “오로지 즐기면 되는 것”이라고 등한시하며, 비로소 욕계의 다섯 번째인 인간의 세계에서만이 괴로움과 즐거움을 동시에 느끼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했듯이 모든 감각적 쾌락의 뒤 안에는 즐긴 것만큼의 수 10배, 100배, 수십만 배의 괴로움이 뒤따라 괴로워하는 경우를 체험했고 주위에 당하는 이들도 쉽게 보고 있지 않습니까?
붓다의 가르침과 그것을 증명한 수많은 성‧제자님들의 증언 또한 이를 경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승의 가르침에 “이 몸 받아 제도 못하면 어느 생에 제도하리!”라는 게송이 있어 이 몸 받은 이 생(生)에서 제도의 궁극적인 닙바나를 실현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맹구우목(盲龜遇木)”이니 확률 zero이니 하는 인간계의 이 생(生)에서 우리는 천우의 기회를 살며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죽음과 윤회의 문을 닫아거는 닙바나의 성취를 위해 분골쇄신, 정진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 생에 남자 몸 받아 태어나 동진출가하여 성불하게 하소서!”하는 등의 말은 붓다의 교설과는 천리만리나 먼 황당한 발원입니다. 또다시 맹구우목하고 사람 몸 받기가 확률로 zero인 인간계의 출생을 기다려야 하는 우매함을 범해야 되겠습니까?
또 다른 가르침 “일생일대 목숨 바쳐 이룰 일은 성불하는 것이다”라는 대승에서의 가르침을 새삼스레 새기게 합니다. 물론 여기에서 성불(成佛)이란 닙바나를 실현한 아라한의 다른 표현이겠지만 말입니다. 대승에서의 깨달음이니 도(道)니, 피안이니 하는 말들은 닙바나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지난 제 수행기에서 밝혔듯이 “위빠사나 수행 → 지혜의 완성 → 정견의 확립 → 해탈 → 깨달음 → 열반 → 회광반조”의 정형적인 공식은 동시성, 동의어일 뿐, 이 과정은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찾아오는 같은 뜻이지만 면밀한 분석적 앎을 가지고 본다면 이름을 그와 같이 붙인다는 말입니다. 초입인 위빠사나 수행에서 시행되는 도정들... 팔정도, 12연기, 4성제 등은 위와 같은 공식을 얻기 위한 과정일 뿐입니다. 그 과정에서 조금 얻어진 과정지의 증득에 한소식한 양 일희할 일이 아닙니다. 눈 밝은 이의 앞에서는 꾸중 듣고 무색당하는 일밖에 안 되는 일이니까요. 우리의 알음알이와 증득되어지는 바도 닙바나에 이르는 초석이고 토양일지언정, 끝내는 모두 버려야 하는 것들, 즉 “여벌유자 법상응사(如筏喩者 法尙應捨)” 뗏목의 비유 경에서처럼.
알음알이만큼의 100만 배 실참 수행이 필요함을 제 스스로 절실히 깨달아(understading)가고 있습니다. 스리랑카 케마 비쿠의 말씀처럼 1온스(28.35g)의 실참수행이 1톤(1,000,000g)의 알음알이를 뛰어 넘는다는 말씀을 실감하고 체험해 간다는 말입니다.
“깨달음 병”에 신음하시는 많은 이들을 대승불교권에서 보았듯이, 테라와다 불교쪽에서는 닙바나 중병에 걸려 계시는 분들을 가끔 뵈었습니다. 물론, 이 분들은 닙바나를 찬양하다보니, 말씀마다 책마다 시에 닙바나로 범벅이 되어 있습니다. 이는 닙바나에 대한 개념 정리도 덜 되었고, 수행도정도 빈약한 위에 정의마저 세우지 못한 그저 애매모호한 오색구름위에 떠 있는 마니주를 맘속으로 만들어보는 우치이고 닙바나에 대한 그리움의 상사병자와 같은 것으로 본다면 지나친 것일까요?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특히 인간은 “행복”이라는 실체를 얻고자 동분서주하고 때로는, 아니 많은 경우 불선업(不善業)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감각적 쾌락의 충족을 즐기는 것을 행복으로 아는 극히 어리석은 행위로 행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세간의 행복에 대한 개념이기도 합니다만, 불자가 추구하는 행복은 출세간의 것입니다. 그것은 물질적 요소의 것이 아닌 지극히 순수한 정신세계의 것임을 우리는 잊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된 행복의 추구를 위해 온갖 짓을 다 하다가, 그래도 충족이 없다보니 신까지 만들어내고 애걸복걸하다가, 그 또한 안 되니 신에게 배신당했노라 분통까지 터뜨리며, 그것마저 과감하게 포기하는 것을 우리 주위를 통해, 혹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많이 보았고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행복의 실체는 무엇이며, 그 기준점은 어디에 설정해야 하는가? 내가 바라는 바의 물질적 성취가 행복인가? 감각적 쾌락의 충족과 즐김이 행복인가? 우리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한평생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강준만 교수님의 칼럼을 소개합니다. “소확행(小確幸,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란 신조어)이 커피나 디저트 시장 등 외식업계 트렌드로만 그치지 않고 우리의 삶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선, 물질 중심으로 돼 있는 행복의 기존 정의를 바꿔야한다. 일상의 소소한 것에서 기쁨을 찾으면서 어느 정도 행복감을 느껴야 남들을 돌아볼 여유도 생겨나는 법이다”라는 글입니다. 세간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성공과 충족과, 축복이었던 것이 세월이 흘러 환경과 조건이 바뀌면 실패와 저주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이런 가변성의 행복을 끊임없이 추구하며 행복을 찾고 있는 우리들,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 아닙니까? 그런데, 붓다께서는 2600년 전에 행복에 대한 기준을 정확히 세워 놓으셨습니다. 즉, “우리의 정신세계가 느낌을 통해 느끼는 그 자리에서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행복을 지고의 행복, 순수무잡(純粹無雜)하여 더 보태고 뺄 것도 없는 완전한 행복이 있다. 그것은 닙바나의 실현이다”라고 설파하셨습니다. 이것이 사전적 의미를 풀이하고 뛰어 넘는 닙바나 뜻의 정립입니다. 과연 지고하고 완전한 행복이란 존재할 수 있을 까라는 의문을 풀어주는 것이 붓다의 8만4천 가지 교설이고, 그것을 실천하는 “수행”을 통해서만이 그곳에 도달할 수 있음을 45년 동안이나 애타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신의 위치에서가 아니라 가장 인간적인 말씀과 방법으로 말입니다.
우리가 붓다를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은 일체지자요 해탈, 열반을 이루신 분이라는, 그래서 붓다-깨달으신 분-라 칭하는 역사적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이 왕자라서, 태양의 후예인 사키야족이라서, 32상 80종호의 위대한 모습에 가위 눌려 억지 믿음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 그 분이 “깨달으신 분”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그 분의 금구(金口)에서 나온 금어(金語)들은 정녕 진리의 말씀이고, 우리가 의심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이제 금어의 궁극인 닙바나의 실체를 이해-해부-해 보았으니 양생과 실천의 길을 찾아갑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