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현묘재) 뒷산 옥녀봉 부근에 ‘고사리 밭’이 있다. 돌아가신 부모님 제사에 올릴 고사리나물은 직접 뜯어보자는 식구의 제안에, 어릴 적 양평 뒷산에서 나물 뜯던 추억이 떠올라 선뜻 그러자고 했다.
지난 한 달, 비 그치면 부리나케 뒷산에 올랐다. 한 줌 두 줌 뜯은 고사리를 삶아 햇볕에 바짝 말려 비닐봉지에 보관해 두는 일을 재미삼아 몇 차례나 계속했다. 처음에는 눈에 띠지 않던 고사리가 몇 번 경험을 쌓다보니 제법 잘 보인다. 갈수록 고사리 따는 솜씨는 늘고, 수확한 고사리의 양도 얼추 네 차례의 제사상에 올릴 만큼은 되었다.
한국불교를 바꿔보겠다는 나름의 포부를 품고 30년을 헤매다가 한계를 느끼고 산골로 내려와 농사짓고 글 쓰며 속리의 삶을 흉내 내며 살면서, 고사리 뜯으러 뒷산을 오르내리다보니 자연스럽게 고사리에 얽힌 옛 이야기들이 떠오른다.
고사리에 얽힌 이야기는 대부분 사마천의 <사기(史記)> 맨 앞에 나오는 ‘백이와 숙제’의 고사에서 비롯된 것들이어서 그 내용이 처연하다.
백이와 숙제는 상(商)나라 제후국 가운데 하나인 고죽국(孤竹國) 군주의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막내인 숙제를 후사로 삼으려고 했으나 숙제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맏형 백이에게 그 자리를 양보했다. 그러나 백이는 ‘아버지의 명’이라며 사양하고 도망가 버렸다. 그러자 숙제도 왕위에 오르지 않고 큰형을 따라가 버리자 백성들은 부득이 가운데 아들을 군주로 세웠다.
백이와 숙제는 당시 서쪽 제후의 우두머리였던 서백창이 늙은이를 잘 보살펴준다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아가 의탁하려 했으나 주(周)나라에 도착했을 때 서백창은 죽고 없었다. 이어 왕위에 오른 무왕(武王)은 선왕(서백창)에게 문왕(文王)이라는 시호를 붙이고 그 위패를 들고 동으로 가 상나라 주왕(紂王)을 치려고 했다. 이에 백이와 숙제는 왕의 말고삐를 붙잡고는 이렇게 간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사도 지내지 않고 군사를 일으키는 것을 효(孝)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하가 군주를 시해하려고 하는 것을 인(仁)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를 본 좌우의 신하들이 그들을 죽이려고 하자 태공(太公)이 만류하며 말했다.
“이들은 의로운 분들이다.”
그러고는 그들을 부축하여 떠나보냈다. 그후 무왕이 상나라의 난을 평정하자 천하가 주나라를 제후국 가운데 으뜸으로 받들었다. 그러나 백이와 숙제는 효와 인을 저버린 주나라 무왕의 백성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의리를 지켜 주나라 땅에서 나는 곡식은 먹지 않고 수양산에 숨어 고사리를 뜯어먹으며 연명했다. 그들은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이런 노래를 지어 불렀다.
“저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뜯네.
무왕은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었건만 그 잘못을 모르는구나!
신농‧우‧하나라 시대는 홀연히 사라졌으니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아! 나는 떠나련다, 운명이 쇠했으니….”
그들은 마침내 수양산에서 굶어 죽고 말았다.
조선시대에도 고사리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진다.
부안 기생 매창(梅窓)은, 천민 출신이면서도 시문에 필적할 자가 없었던 촌은(村隱) 유희경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촌은에 대한 매창의 단심은 홍길동을 지은 허균도 무너뜨릴 수 없었다. 그런데 당시 부안에 조일철이 사또로 부임하자마자 그녀에게 수청 들 것을 명했다.
임란이 한창이던 당시 촌은은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맞서고 있었다. 촌은에 대한 사모가 절대적이었던 매창이 신임사또의 강압에 흔들릴 리는 만무. 한 달 가까이 병을 핑계로 등청을 거부하다가 끝내 끌려 나갔다.
사또와 마주 앉은 정자에는 마침 개구리 울음이 들려왔다. 수청을 거절하는 매창에게 사또는 난제를 냈다. 낙운성시(落韻成詩), 즉 제시하는 운에 맞춰 시를 지으라는 것이었다. 사또는 의(衣), 비(飛), 미(薇)를 운으로, 개구리를 주제로 시를 지으라고 명령했다. 서슬 퍼런 살기가 흘렀지만 매창은 서슴없이 시를 써 내려갔다.
봄비 내리는 연못가서 옷 입지 못함이 서럽고,
풀 섶에서 뱀을 만나도 날지 못함이 한스럽네.
개구리처럼 안 먹고 살 수 있는 생애 얻었다면,
백이숙제는 수양산의 고사리조차 먹지 않았으리.
春雨池塘歎無衣
草中逢蛇恨不飛
封口生涯人若得
夷齊不食首陽薇
일전, 볼일이 있어 잠시 서울에 들렀다가 절집 사람들 몇몇을 만났다. 교단 상황은 더 막막해졌고, 희망은 실낱만치도 남아 있지 않다는 그들의 탄식은 새삼스럽지가 않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버티고 있다’는 하소연마저 비루하게 들린다.
백이숙제는 효와 인을 저버린 왕의 백성 되기를 거부하며 고사리로 연명하다 굶어죽었고, 매창은 사랑과 지조를 위해 부당한 권력 앞에서 당당함을 잃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요즘 세상에는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추비함이 창궐하는가.
부처님은 입멸에 들기 직전, 승가의 규율을 따르지 않고 가르침을 받들지 않는 ‘막무가내’ 찬나를 어찌해야 할지 묻는 아난다에게 “범단벌(梵檀罰)로 다스리라”고 답하셨다. “모든 비구들에게 명하여 그와 더불어 말하지도 말고, 서로 왕래하지도 말며, 그를 가르치지도 말고, 일을 시키지도 말라”는 엄명이었다.
의리와 사랑에 목숨까지 건 이제(夷齊)와 매창의 ‘고사리 교훈’,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참괴(慙愧)를 잊은 범계승 대처법을 일러주신 부처님의 간곡한 당부! 그러나 이와 같은 절절한 가르침도 여전히 ‘강 건너 불’에 지나지 않는 현실이 애처로울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