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은 분주한 팔자를 타고났다. 어찌나 바쁜지 이파리도 나기 전에 꽃부터 피운다. 온기가 바람결에 실려 오면 개나리나 매화, 산수유, 벚꽃, 진달래 등 봄꽃들은 귀신처럼 봄을 감지하고 쫓기듯 꽃을 피운다. 잎이 먼저 제자리를 잡은 후에 꽃이 피는 보통의 경우와는 정반대다. 이른 봄날은 그래서 봄꽃들의 각축장이다.

 

 

봄꽃들이 이파리보다 먼저 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은 온도에서 찾을 수 있다. 봄꽃 꽃눈의 분화(芬華) 시기나 양상은 온도의 영향을 받는다. 전 해에 형성된 꽃눈이 개화하려면 낮은 온도 상태가 필요한데, 추운 겨울을 준비기간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다가 바람결에 따뜻함이 섞이면 다투어 꽃을 피운다. 아이러니하게도 겨울은 봄꽃의 필요조건인 셈이다. 그러므로 ‘꽃샘추위’라는 말은 봄꽃들에겐 틀린 말이 된다. 폭죽처럼 피어난 봄꽃들의 화려한 절정이 지나고 나면 그 자리에 파릇한 이파리들이 돋는데, 그 연둣빛은 차라리 찬란하다.
봄꽃이 개화하면 사람보다 벌들이 먼저 신바람이 난다. 어떻게 꽃소식을 알았는지 녀석들은 봄꽃을 향해 몰려온다. 바람결에 번진 꽃향기를 맛보고는 연어가 고향을 찾듯 향기의 발원지를 추적해왔을 것이다. 꽃으로 날아드는 녀석들의 표정은 행복하다. 처음에는 벌들만 보였는데 어느 순간 나비들도 찾아왔다. 꽃 피면 벌과 나비가 날아드는 건 시골에서 흔한 광경이지만, 채 서울뜨기 습성을 벗지 못한 내게는 한 장면 한 순간이 다 기적처럼 아름답고 소중하다. 
매화꽃 향기는 새큰하고, 동백꽃 향기는 달콤하다. 개나리나 벚꽃, 진달래도 나름의 은은한 향기를 내뿜는다. 봄꽃 향기는 뭇 생명들의 잔칫상이다. 지칠 줄 모르고 이리저리 꽃을 옮겨 다니는 벌과 나비들의 몸짓은 조동탁의 시어(詩語) 그대로 ‘나빌레라’다.
다섯 그루의 현묘재 매화꽃이 뿜는 향기는 환상적이다. 청매향은 찌르는 듯 날카롭고, 홍매향은 여인의 화장품처럼 향기로우며, 백매향은 덤덤한 듯 우아하다. “이 집에는 매화꽃향기가 진동하네요.”라며 인사를 나누는 택배아저씨의 표정도 봄꽃처럼 해밝다.
봄꽃 향기를 한번이라도 더 느끼기 위해 요즘은 수시로 문밖을 나선다. 마당을 이리저리 거닐며 향기를 맡노라면 벌들이 시샘하며 달려들기도 한다. 산골에 처음 왔을 때는 이 녀석들이 근처에만 와도 놀라 난리법석을 쳤지만 지금은 제법 느긋해졌다. ‘향기가 닳아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 너도 즐기고 나도 즐겨야지.’라고 여유 있게 속삭이면 녀석들은 알아듣기나 한 듯 다른 꽃으로 날아간다.
문득 어제 저녁 읽은 경전구절이 떠올라 심신을 움츠리기 전까지 나는, 내가 심고 가꾼 매화나무 향기를 얼마든지 맡아도 된다는 교만함에 젖어 있었다. <쌍윳다니까야>의 ‘향기도둑의 경’ 경구가 뇌리를 스쳐간 것이다. 이 경에서는 연꽃 향기를 맡고 있는 한 수행자를 천신(天神)이 나타나 “향기를 도둑질하고 있다”며 꾸짖는다.
   

 

[하늘사람(천신)] 그대가 이 연꽃의 향기를 맡을 때 그것은 주어진 것이 아니네. 이것은 도둑질의 한 가지이니, 벗이여, 그대는 향기 도둑이네.
[수행자] 나는 연꽃을 취하지도 않았고, 꺾지도 않았고, 떨어져서 향기만 맡았네. 그런데 무슨 이유로 그대는 나를 향기 도둑이라고 하는가? 연 줄기를 잡아 뽑고, 연꽃을 꺾고, 그와 같이 거친 행위를 하는 자에게는 왜 그렇게 말하지 않는가?
[하늘사람] 어떤 사람이 거칠고 흉폭하고, 하녀의 옷처럼 심하게 더렵혀졌다면, 나는 그에게 말할 것이 없지만, 지금은 그대에게 말하는 것이라네. 때 묻지 않은 사람, 언제나 청정함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머리털만큼의 죄악이라도 구름처럼 크게 보이는 것이네.”
[수행자] 참으로 야차여, 그대는 나를 알고 나를 가엾게 여기네. 야차여, 그대가 그러한 행위를 볼 때마다 다시 말해주시오.
[하늘사람] 우리는 그대에 의지해 살지 않고 또한 당신에게 고용된 하인도 아니네. 행복한 세계로 가는 길을, 수행자여, 그대가 스스로 알아야 하네.  -<쌍윳따니까야> 제9 ‘향기 도둑의 경’

 

그 순간, ‘향기 도둑의 경’은 내게,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한 경책이었다. 특히 ‘거칠고 흉폭하고 더럽혀진 이에게는 이래라 저래라 말할 것이 없다’는 하늘사람의 말이 폐부를 깊게 찌른다. 이런 따끔한 경책의 소리를 듣지 못한 이가 있다면, 특히 그가 수행자라면 이 경의 가르침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삶의 모습을 돌아볼 필요가 있겠다. 이 얼마나 준엄한 꾸짖음인가.
진흙구덩이 같았던 일터를 떠나 내포지역 산골에 내려와 농사짓고 글 쓰면서 한결 맑아진 삶을 살고 있다고, 내 스스로 가졌던 알량한 위안이 얼마나 교만한 짓이었는가를 이 봄꽃향기가 꾸짖고 있다는 생각에 심신이 오싹해진다. 멀리까지 상춘여행을 다녀오고, 꽃향기에 취하는 것을 풍류로 여겼던 내 자신이 한없이 작아진다.
‘아, 그러니까 저 벌과 나비는 나의 경박함을 일깨우고자 찾아온 천신의 화현이었구나!’ 천신은 멀찍이 서서 향기 맡는 것조차 도둑질이라며 호되게 꾸짖었는데, 나는 벌 나비와 다투듯 꽃송이에 코를 들이밀며 향기를 훔쳤으니….
문득, 내가 좋아하는 손현숙 시인의 시 ‘毒, 꽃으로 찾아오는’의 한 구절이 절절하게 떠올랐다. 지금의 내 심정을 섬뜩하리만큼 후벼낸 절창이다. 

 

“꽃향기에 질식해 죽은 사내를 알고 있다 밤이 묵묵하면 죽은 사람의 목소리로 향기가 돌아온다 제대 위에 성배 올리듯 촛불에 심지를 돋운다 독약처럼 피가 돌고 소금기 빠져나가는 섬망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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