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묘재 뒤 상왕산(象王山)에는 장마철에나 물이 흐르는 자그마한 골짜기가 있다. 이 골짜기를 흘러내려온 물은 현묘재를 가운데 두고 양편으로 난 도랑으로 흘러내린다. 평상시에는 늘 메말라 있어 골짜기라 부르기도 민망하다.
이 골짜기의 이름이 ‘능골(陵谷)’인데, 여기에 능(陵)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능이 있던 자리는 옥녀봉(玉女峰)과 한티고갯길을 사이에 두고 자리한 상왕산의 기스락부분이다. 현묘재에서는 직선거리로 채 5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이런 이유로 내가 사는 동네 이름이 능골이다. 현재 이 산에는 재령이씨 집안의 선산으로 곳곳에 이 집안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상왕산 기슭 능이 있었다고 하는 자리. 지금은 집을 짓는 공사로 인해 주변이 크게 훼손됐다.

능이라면, 왕이나 왕비의 무덤을 말하는 것인데, 능이 있었던 곳은 방치된 채 무덤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밭과 잡목 빼곡한 야산으로 바뀌어 있다. 어느 시대 누구의 묘(墓)인지 알 수 없지만, 마을 어르신들에 따르면, 비석(碑石)이 세워져 있었고, 새마을운동이 한창이었던 70년대까지 도굴꾼들이 모여들었으니, 예삿무덤은 아닌 게 분명하다. 비석은 도굴꾼들이 훔쳐갔다는 이야기도 있고, 능 주변 땅속에 묻혔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면천면에서 발간한 <由緖 깊은 沔川>에는 능 앞에 있던 묘갈(墓碣)의 명문(銘文)이 ‘承議郞通禮問…之墓’라는 점을 들어 ‘정육품’ 아래 벼슬을 한 이의 무덤이므로, 능과는 무관한 것으로 일단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 능이 있다면 원(原)삼국시대이나 삼국시대, 늦어도 후삼국시대의 것으로 봐야 하는 만큼 조선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묘갈만으로 결론을 짓는 것은 아무래도 섣부른 듯싶다.  
능에 묻힌 주인공이 마한시대 고원국의 왕인지, 백제의 왕인지는 알 수 없지만, 보다 체계적인 발굴이 필요해 보인다. 특히 백제의 역대 왕들의 무덤의 소재가 대부분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허투루 지나칠 일은 아니다. 백제시대 유물이 많지 않은 현실에서 그것이 왕릉이든 아니든 ‘비가 서있던 왕릉으로 불리는 무덤’이 있던 것은 확실하니 책임 있는 기관의 조사가 있었으면 좋겠다.
면천은 한성백제 시절에 이미 백제 영역권에 속해 있었다. 웅진 천도 후에는 지정학적으로 그 중요성이 더 커진 것으로 추정된다. <대동지지> ‘면천군 전고 조’에 이 지역은 백제 때 수군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면천지역은 백제시기부터 중요한 해양거점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남아 있는 지명에도 강이 있었다는 강터(江基), 배가 들어왔다는 해섶 등의 등이 있는 것은 그 개연성을 뒷받침한다.
이 한적한 마을의 나지막한 뒷산에 어떻게 왕릉이 자리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대치리가 예로부터 풍수지리상 길지로 소문이 나 있었다는 점, 유서 깊은 지명에 자주 등장하는 옥녀봉이 마을 뒷산에 솟아있다는 점, 능이 자리한 산 이름이 부처님을 상징하는 ‘코끼리왕(상왕)’이라는 점, 후백제를 개창한 견훤왕이 주둔했던 던절미산(屯田山)이 대치리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는 점 등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아내와 함께 능을 찾기 위해 한두 시간 가량 집 뒷산(상왕산)을 헤맸다. 갈참나무가 어지럽게 자란 틈새를 헤치며 잡목으로 인해 길이 사라진 곳까지 수색하듯 발길을 옮겼다. 길이 난 곳으로는 재령이씨 집안의 묘들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주변으로 이따금씩 버려진 옛무덤(古墓)으로 보이는 펑퍼짐한 봉분들이 눈에 띤다. 비교적 봉분이 큰 고묘들을 유심히 둘러보고 내려왔지만 어떤 것이 능으로 불린 무덤인지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결국 80평생을 이곳에서 사신 이웃집 어르신에게 능이 있던 자리를 여쭙고 나서야, 능이 현묘재 뒤 50미터 지점의 오른편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코앞에 있는 능을 두고 한나절 동안 산속을 헤맨 것이다.    
지금은 능 위쪽에 한옥 한 채를 짓는 공사가 시작돼 진입로를 닦아놓은 관계로 주변이 크게 훼손돼 자세히 살펴봐도 도저히 능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만큼 원형이 사라진 상태다. 좀 더 자세히 능에 대해 알고 싶어서 마침 능이 있는 자리에 집을 짓고 살았었다는 올해 80세가 된 이웃집 할머니에게 물었다. 이 할머니에 따르면, 30년 전까지만 해도 능 앞에는 비석이 세 개가 있었다. 어느 날 보니 그 비석들이 사라졌고,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가 없단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도굴꾼들이 상왕산 일대에 있던 고분들을 도굴하러 많이 다녀갔다고 하니, 아마도 그 때에 도난 되었을 것이다. 그 후로는 능에 대한 관심이 마을에서도, 면에서도 흐지부지 사라져버린 상태다.
문화유산의 가치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예전보다 개선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아쉬운 수준을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문화재에 대한 관심도 ‘진품명품’이라는 한 공중파 방송의 프로그램에서 그 가치를 돈으로 평가하면서부터 그나마 늘어났다는 일각의 지적을 솔직히 부인하기 어렵다. 하긴 우리나라 지정문화재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불교계조차 신앙의 대상이기도 한 성보(불교문화재)를 수입 올리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저열한 모습을 스스럼없이 보이고 있으니 더 말해 무엇 하랴!
흔적도 없이 사라진 능 언저리에서 마주치는 삭풍이 꼬집힌 듯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