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남헌(洛南軒)”은 화성행궁의 모든 건축물이 일제에 의해 철거될 때, 그 치욕을 겪지 않은 유일한 건축물입니다.
화성행궁에서 진행될 크고 많은 행사를 계획한 정조는 이에 대비하여, 20칸이나 되는 큰 건물을 짓습니다. 요즈음 말로 컨벤션센터인 것이지요. 건물 크기도 크지만 야외행사도 가능한 3천 평 정도로 넓은 앞마당도 가졌습니다.

 

 

 

중국 주 ․ 후한 ․ 위나라 등 아홉 개의 왕조가 바뀌면서도 “낙양”을 수도로 유지했는데, 후한시대에 남쪽에 궁궐을 짓고 “남궁(南宮)”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정조는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로 번성한 국제적인 도시로 명성이 자자한 그 ‘남궁’이 부러웠던지, 이를 본 따서 “낙남헌”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수원부를 낙양처럼 번성한 도시로 만들고 싶었던 때문이겠지요.
또 정조는 수원부를 수나라와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처럼 부유한 도시로도 만들고 싶었던지 한양을 떠나서 수원화성으로 들어가는 문의 이름을 “장안문”이라 붙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조가 중국을 깍듯이 섬기는 사람이 아닌 줄은 아시잖아요? 그럼에도 중국의 도시나 궁궐이름을 따는 것을 보면 ‘내가 무엇인가를 크게 이루어내겠다’는 속마음이 들여다보이기도 합니다.

 

중국에서 새로 세워진 나라가 망한 나라의 수도를 물려받는 것은 망한 나라의 기득권 세력을 끌어안아야 새로운 왕조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기반이 약한 연고지에서 새로운 왕조를 시작하는 것 보다는 기득권 세력과 같이 지내는 것이 수월하잖습니까?
정조는 즉위를 앞두고 있을 때나 즉위한 뒤에도 노론세력이 판을 쓰는 한양에서 자기편이 적다는 것을 절절이 느꼈고, 끌어들이기도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요. 어디에서는 어떤 당 ‘깃발만 걸어도 당선된다’는 그런 현상이 예전에도 있었나 봅니다. 인재를 뽑는 과거제에서도 그쪽만 뽑히는 겁니다.

 

 

 

그래서 정조는 수원부와 광주 ․ 과천 ․ 시흥읍에 거소를 둔 사람에게만 응시자격을 부여하는 과거제를 시행하여 수원부 인구를 증가시키는 방법을 찾았고, 무주공산인 수원부에서 인재를 선발합니다. 물론 과거시험을 보는 장소는 낙남헌이고요.

 

1795년 윤2월 11일 오전에 낙남헌 옆 객사에서 문과시험이 치뤄졌고, 3000평이나 되는 앞마당에서는 무과 초시가 진행되었습니다. 혜경궁의 회갑연을 축하하는 특별히 치러진 과거시험인 만큼 문과시험 제목은 “근상천천세수부(謹上千千歲壽賦)”로 ‘삼가 혜경궁의 천천세를 기원하는 글을 올려라’였으니,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할 발상입니다. 오후에는 문과 5명과 무과 56명의 급제자를 발표하고, 정조가 참석한 가운데 급제자들은 홍패를 수여받았습니다. 
과거시험(식년시)이 3년마다 이루어지는데 선발인원이 33명뿐이고, 지역안배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수원사람들에게 준 특혜는 엄청난 것으로 급제한 사람은 정조와 한배를 탄 친위세력이 되었을 겁니다.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을 치른 다음날에 그 기쁨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행차를 수행한 신하와 수원부 백성으로 칠순과 회갑을 맞은 노인 384명의 양로연을 낙남헌에서 개최합니다.
이 양로연에는 78세의 영의정 홍낙성, 76세의 우의정 채제공 등과 61세가 된 수원 서민 송굴굴이(宋屈屈伊), 이고부랑(李古夫郞) 등이 초청되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각각의 독상을 받았고, 차려진 음식은 영의정 그리고 이고부랑도 왕의 상차림과 똑같았으니 모두가 수라상을 받는 영광을 누린 것이지요. 그리고 참석자들에게는 장수를 기원한다는 명아주로 만든 지팡이 “청려장”과 비단 한 필씩이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늙은 노인으로 호적이 없어 양로연에 참석하지 못하는 서민들은 앞으로 불러내어 술과 고기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대중과 같이 걸식을 하시고 불가촉천민을 대함에도 차별이 없으셨듯이, 정조는 백성과 같은 음식으로 즐기고 신분의 차별을 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실행한 왕이었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조상 대대로 터를 잡고 살아오던 곳, 그리고 논과 밭을 기름지게하면서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구 읍치를 떠나게 한 것에 대한 속죄의 마음으로 잔치를 열어준 것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잔치를 열어준 것이 뭐 대수냐?’또는 ‘이씨 왕가의 부귀영화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속셈으로 백성을 이주시킨 것이 아니냐?’ 하시는 분도 계실 수 있지만 경상 전라 충청도 백성 수만 명을 척박한 함경도로 강제 이주시키면서 어떠한 보상금이나 이주대책이 없었던 왕을 생각하면 백성들은 고마웠을 겁니다.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에 지출한 경비로 10만 냥을 준비했는데, 행사를 치르고 남은 돈을 호조로 돌리지 않고 1만 냥은 흉년이 든 제주 백성을 구제하는데, 2만 냥은 전국 8도로 나누어 진휼하는데, 1만 냥은 수원부에 만석거와 둔전을 설치하는 비용으로 썼습니다.

 

화성행궁은 담장과 행각 또는 행랑으로 크게 둘러쳐진 형태로 정문은 신풍루이고 뒷문은 득한문(得閒門)입니다. 그리고 득한문을 나서면 팔달산 끝자락에 조성한 후원이 나옵니다.
봉수당에서 득한문으로 나가려면 문을 하나 거쳐야 하는데, 나가면서 현판을 읽으면 “어천문(於千門)”이고 통과한 다음 뒤돌아보면 “삼수문(三壽門)” 현판이 보입니다. 문 하나가 두 개의 이름을 가진 것이지요.  
“삼(三)”이란 것은 거듭됨을 말하기 때문에 두개의 현판을 합쳐 풀이하면‘명(命)이 거듭되어 천년에 이르는 수명을 누리고 싶다’가 된 답니다. 정조가 그렇게 오래 살고 싶어 했을까요?
혜경궁 진찬연을 위해 정조가 작사한 노래가사 “화땅 국경지기가 어머니의 삼수를 축복하네. ～ 생략 ～ 좋은 술을 해마다 따라 올리리.”를 보면 자신이 장수하고자 하지는 않은 듯싶습니다.
그렇지만 나라가 세워진지 400년이 넘어 왕권과 국력은 피폐해졌고, 헐벗고 유리걸식하는 백성이 넘쳐나는 것을 고쳐보려는 큰 야망을 지녔기 때문에 천년은 아니어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남은 수명이 길어지기는 바랐을 겁니다.    

 

이 삼수문을 지나면 한가로움을 얻을 수 있는 “득한문(得閒門)”을 통과하게 되는데, ‘이 문을 지나 후원에서 한가로움을 갖겠다’는 마음이 담겼습니다. 정조가 한가해질 때를 언제로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순조에게 왕의 자리를 내주고 상왕으로 물러나려한 1804년 또는 계획했던 일을 모두 끝냈을 때였을 겁니다.

 

득한문을 나서면 행궁 후원인데, 몇 개의 계단과 맞닥트린 다음 팔달산 쪽으로 난 좁고 호젓한 길을 걸어가면 “미로한정(未老閒亭)”에 이르게 됩니다.
‘때가되면 늙음은 당연히 올 것이고, 그 때 한가하게 쉴 정자’라는 뜻이지요. 늙는 것(老來)은 운명에 맡긴다며 “노래당”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미로한정은 주변 나무사이에 여섯 개 기둥과 모임지붕의 한 칸짜리 정자로 혼자 한가롭게 세워져있습니다. 생김도 단출하니 동쪽만 트여놓고, 나머지 다섯 면은 평범한 연잎 난간을 놓았습니다. 기둥 폭도 1m 남짓으로 트인 동쪽에는 한 명이 걸터 앉을만하며, 올라가 앉을 마루도 한 명만 앉을만하게 좁은 한 칸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한가로움을 방해받지 않으려 자신만을 위한 공간으로 지어졌습니다.

 

미로한정에서는 정조가 계획한 한양에서 삼남지방으로 뚫린 길과 시전이 형성된 십자로(十字路)가 시원하게 보이고, 가까이는 신풍루부터 득한문까지의 행궁 전체가 다 보입니다.
행궁을 짓고 나서 정조는 많은 일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래서 읍치를 이전하면서 건축한 278칸의 행궁을 배가 넘는 576칸으로 증축했으며, 또 여러 건물의 이름도 계획에 맞게 바꿨습니다. 욕심을 부려 건평을 증가시켰으면서도 한가로운 때 쉬려고 지은 미로한정은 옹색하게 놓아둔 것이 궁금증을 일으킵니다.
좁은 곳에 앉아서 자신이 추진하고, 이루어 낸 모든 것을 곱씹어 보려고 했을까요?
국왕으로 모든 것을 가져보고 누리던 것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왔는데, ‘더 바랄게 무엇이겠는가’라는 뜻일까요?
우리들의 살아감이 “제행무상, 공수래공수거”인 것을 보여주려 했을까요?
화성행궁에 오셔서 소음도 없고, 화려하지도 않은 미로한정에 앉아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도시 한가운데에 이만한 사색의 공간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몇 차례에 걸쳐 조선 22대 왕 정조가 수원시와 화성시를 오고가면서 행하였던 일을 말씀드렸습니다. 이 이야기를 드린 까닭은 수원을 방문하시어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 “융릉”, “건릉”과 “화성행궁”을 보실 것을 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정조의 마음을 볼 수 있고, 아이들의 심성을 길러줌에도 이보다 좋은 소재가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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