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출판 은행나무에서 조선 왕실의 기도처인 ‘원당’을 통해서 조선의 역사를 새롭게 조망한 탁효정(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전임연구원) 박사의 『원당, 조선 왕실의 간절한 기도처』를 내놓았다.
“시대의 마음을 읽는 것이 역사를 통찰하는 가장 쉽고 재미있는 길”이라고 말하는 저자 탁효정의 『원당, 조선 왕실의 간절한 기도처』는 왕 중심의 조선사 뒤에 가려진 왕실 여인들의 지성스러운 불사를 소설처럼 생생하게 재현한 전에 없던 역사책이다. 왕 중심으로 기록된 관찬 사료인 《조선왕조실록》에서 《실록》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 퍼즐을 사찬 사료와 설화, 지금도 계속 발굴 중인 사찰의 사지(寺誌)를 통해 입체적으로 구현한다.
‘원당’은 말 그대로 ‘무언가를 간절히 비는 집’이다. 현재의 욕망과 아픔에서 비롯된 그 시대의 간절한 기도, 그 욕망과 아픔을 깊은 불심으로 풀어내던 간절한 기도처다. 저자는 “여자가 사람이 아니었던 시대, 그들의 삶 속에서 역사적 의미와 인간의 존엄성을 찾는 일이 마치 목이 좁은 유리병에서 자란 새를 꺼내는 일 같다”고 한다. 그리고 저자는 “한 사찰의 역사에는 수많은 인연과 수없는 마음들이 실타래처럼 엉켜 하나의 인드라망을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원당의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은 의성 고운사의 연수전이다. 영조의 기로소 입소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이 건물은 특이하게도 사찰 전각이 아닌 유교식 사당 형태로 건축되었다.
이는 조선 후기의 불교가 더 이상 배척이 아닌 공존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임진왜란 당시 전투에서 승군들의 활약과 전쟁 복구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공로와 불교의 사회경제적 기여를 인정한 것이다.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은 승려들과 지적∙문화적 교류를 확대해 갔고, 불교계 또한 유교와의 융합과 공존을 위한 접점들을 모색했다.
원당을 이해한다는 것은 조선의 역사를 다르게 보는 하나의 창을 내는 것과 같다. 혼란 정국을 돌파하고자 했던 선조들의 간절한 바람, 그리고 마침내 이뤄냈던 불교와 유교의 융화. 그 촛불을 밝히고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 그리고 그 기도가 불러온 변화의 바람은 그 누구보다 지금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기댈 곳 없고 의지처가 절실한 이들에게 “가장 영험한 곳, 바로 내 마음속에 원당을 짓고 지성으로 가꾸는 법”을 알려주는 『원당, 조선 왕실의 간절한 기도처』, 역사학자의 엄중함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야사처럼 흥미진진하다. 한 차례 읽어내고 난 뒤 잔존하는 조선사 지식은 덤이다.
『원당, 조선 왕실의 간절한 기도처』 도서출판 은행나무
탁효정 지음. 판형 146*216㎜. 336쪽
17,000원
<책 속으로>
필자가 쓴 이 글에는 관찬 사료와 사찬 사료, 그리고 절에서 전승되는 설화들이 혼재되어 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역사도 아니고 설화도 아닌 잡다한 이야기라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비난이 일부분 맞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필자는 그 이야기 속에서 진짜 역사를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역사학자의 몫이라고 말하고 싶다. _16쪽
훈민정음과 관련된 숫자들의 상당수가 불교의 세계관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총 3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33은 불교에서 33천天을 뜻하며, 이는 수미산 위에 있는 신들의 세계를 상징한다. 《훈민정음 해례본》 맨 첫머리에 “나랏말??미 듕귁에 달아”로 시작되는 세종의 어지(御旨)는 108자이고, 《월인석보》의 맨 앞에 실린 세종 어지의 글자 수 또한 총 108글자다. 《월인석보》 제1권의 면수도 108쪽이다. 108이라는 수는 중생이 인간 세상에서 느끼는 모든 번뇌를 합한 수다. _61쪽
보살의 공덕을 지었지만 친혈육을 죽인 앙굴리말라에게 부처님은 온몸 가득 종기가 돋게 했다. 세조를 고통스럽게 한 것은 죄의 식이 일으킨 마음의 병이라 할 수도 있다.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이후 심적 고통을 겪는 ‘트라우마’가 바로 세조가 앓았던 병의 근본 원인이 아니었을까. 어떤 처방에도 소용이 없었던 세조는 전국 방방곡곡의 절을 찾아다니며 참회의 기도를 올렸고, 자신의 욕망으로 희생된 인물들의 명복을 빌 수밖에 없었다. 부처님은 권력에 도취된 세조에게 종기라는 과보를 내려 그의 벌거벗은 영혼을 돌아보게 했다. 살아생전 내려진 업경대가 부처님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자비였던 셈이다. _136~137쪽
한 사찰의 역사에는 수많은 인연과 수없는 마음들이 실타래처럼 엉켜 하나의 인드라망을 이루고 있다. 어떤 이들은 동학사에서 단종의 핏빛 슬픔을 보고, 어떤 이들은 김시습의 통곡을 듣고, 어떤 이들은 누더기가 된 세조의 마음을 읽는다. 또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사육신의 충절과 비애를 느낀다. 어떤 이들은 이곳에서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닌 이치를 깨닫기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수행에 몰두한 스승의 발자취를 더듬는다. 그중 일부는 역사로 남고, 일부는 전설로 떠돌며, 대부분은 세월 속에 묻혀 잊힌다. 동학사에 뒹구는 낙엽들이 계룡산의 일부가 되어 사라지듯이. _147쪽
벼랑 끝에 몰려 비구니가 된 이들의 신세를 그리 좋다고 말할 수 없겠지만, 전근대 사회에서 비구니가 된다는 것은 남자의 부속물이 아닌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자, 해방구였다. 그들은 불교를 통해 비로소 권위나 인습에 굴복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이 될 수 있었다. _153쪽
병자호란 때 청에 볼모로 끌려갔던 장유의 딸은 8년 뒤 봉림대군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왔다. 청에 잡혀있느라 장례에도 참석하지 못한 아버지를 위해 원당을 세웠으니, 시흥 법련사가 바로 그곳이다. 청에서 돌아온 며느리를 내쳤던 장본인이 청에서 돌아온 딸자식의 극락왕생 기도를 수백 년간 받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_233쪽
명성왕후의 삶을 들여다보면 붓다가 아들 이름을 ‘라훌라(R?hula, 장애障碍)’라 지은 심정이 백분 이해된다. 첫째와 둘째 딸은 너무 일찍 죽어 깊은 상처를 남기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여자 문제로 속을 끓이게 한 것도 모자라 병까지 들어 마음을 아프게 하고, 뒤늦게 낳은 막내딸마저 요절해 가슴의 한을 남겼다. _267쪽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왕실에서 원당을 짓는 가장 큰 이유는 죽은 부모나 남편, 요절한 자식의 극락왕생 발원이었다. 그런데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아들 낳기를 발원하는 왕비나 후궁들의 기도처가 훨씬 더 많이 설치되었다. 이는 전술했다시피 조선 전기 구도적 성향의 왕실 불교가 후기에 이르러 기복적으로 변화되는 양상이기도 하다. _3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