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천동 “명경대”전설
참과 거짓을 가려내는 신비한 돌거울
옛날 충청도의 어느 한 고을에 어질고 의협심이 강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성은 정씨이고 이름은 봉덕이었다.
그는 부지런히 일하여 살림은 남부럽지 않게 넉넉하였으나 50이 되도록 슬하에 자식이 하나도 없는 것이 큰 흠이었다.
마누라와 함께 늘 쓸쓸히 지내던 어느 날 천하절승 금강산에 가보면 만 가지 소원이 다 풀린다는 이야기를 들은 봉덕은 반신반의하며 깊은 생각에 잠기었다.
‘혈육 한 점 없는 처지에 애써 살림이나 꾸린들 무슨 보람 있으랴. 사람들이 그처럼 자랑하고 즐기는 금강산을 나도 한번 속 시원히 가보리라.’
이렇게 생각한 정 복덕은 마누라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남편의 이야기에 아픈 가슴을 찔린 듯 마누라는 눈물을 머금고 위로하며 자기더러 본가 집에 갔다 오라고 하는 만큼이나 반가와 하면서 기꺼이 동의하였다.
봉덕은 마누라가 극진히 차려준 행장에 노자까지 푼푼히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길을 떠났다.
여러 날 만에 철원을 거쳐 금강산 어구에 이른 봉덕은 날이 저물고 하여 어느 한 주막을 찾아 하루 밤 쉬고 가려고 하였다.
그래서 여장을 풀고 저녁밥을 먹고 있는데 승려차림의 한 객이 찾아들어 그와 함께 한 방에서 자게 되었다.
주막집 안방에는 서울 양반이 먼저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이른 새벽에 안채에서 왁짝 떠드는 소리가 나더니 금시에 정 봉덕이 자는 방에 달려들어 다짜고짜로 “네놈이 우리 샌님의 돈을 훔쳤지, 어서 내놔라.” 하면서 짐을 강제로 빼앗으려 하였다.
봉덕은 너무나 뜻밖의 일이어서 어리벙벙해 있다가 “나는 평생을 두고 남의 물건에 손댄 일이라고는 한 번도 없는 사람이요.” 하며 자기의 정직함과 억울함을 하소연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이놈아, 이 방에 네놈하고 저 대사 한분뿐인데 그럼 저 대사님을 의심하란 말이야?
잔말 말고 네 보따리를 보자.”고 야단하였다.
“그래 네 보따리에 있는 돈은 얼마냐?”
이렇게 따지며 자기가 잃은 돈은 얼마라고 밝힌 다음 어서 봇짐을 풀라고 강박하였다.
봉덕영감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볼테면 보라.”고 항거하며 봇짐을 와락 풀어 놓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 봇짐 속에는 자기 것이 아닌 다른 봇짐도 끼여 있었다.
참으로 귀신이 곡할 일이었다.
양반의 시중 군들은 그 낮선 봇짐을 와락 끌어안으며 “그래 이것이 네 것이 분명하냐?”고 야단법석하며 포수처럼 날뛰었다.
이렇게 옥신각신하는 사이 승려차림의 손은 슬그머니 빠져 달아났다.
관가에 잡혀간 정 봉덕은 서울양반의 돈을 훔쳤다는 억울한 죄명을 쓰고 갖은 악형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는 훔친 일도 없고 남의 물건을 탐내는 사람도 아니라고 거듭 변명하였으나 봇짐 속의 곡절을 밝힐 수는 없었다.
관가에서는 훔친 죄에 반항 죄까지 합쳐서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생각할수록 분하고 억울하였다.
“어느 놈이 이런 못된 짓을 꾸미었을까. 그네들의 말대로 방에는 나와 그 승려밖에 없었는데.....”
아무리 생각을 더듬어도 의문을 풀길이 없고, 그러니 원통한 일이기는 하지만 무주고혼의 봉변을 멸할 길이 없었다.
봉덕은 이왕 죽을 바엔 당초의 소원대로 금강산이나 한번 보고 죽자고 굳게 마음먹고 고을 원에게 어쨌든 자기에게 내린 판결을 받겠으니, 마지막으로 금강산 구경이나 한 번 하고 죽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원은 그 소원이 하도 절절하여 죽을 놈의 마지막 청을 거절할 수 없다면서 승낙하였다.
하지만 원은 그를 진심으로 동정해서가 아니었다. 사건 심의 과정에 의심되는 것이 많았던 원은 이 기회에 봉덕영감을 명경대 거울에 비쳐보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원은 금강산 구경이 끝나는 마지막 날 죄인을 명경대에 데리고 가 비쳐보라고 분부하고 나졸을 붙이었다.
봉덕은 장안사로부터 시작하여 울소며 삼불암, 표훈사, 정양사, 만폭동을 거쳐 비로봉까지 올라 동해바다의 맑고 푸른 물결까지 구경하는 사이에 일찍 와보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고 기박한 운명을 앞두고 평생의 소원을 성취하였으니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나졸들의 엄한 감시 속에 마을에 내려와서 자고 마감으로 명경대를 보려 백천동으로 들어섰다. 봉덕의 눈앞에 엄청나게 큰 돌 거울이 나타났다. 높이는 150자 실히 될 것이고 폭도 30자나마 됨직 하였다. 봉덕은 그 거울이 사람의 겉과 속을 다 비쳐보는 신기한 거울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지라 주저 없이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두 나졸이 서로 눈을 찔끔 마주 보며 의미 있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거울을 유심히 살피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이냐? 거울 속에 봉덕의 모습이 환히 들여다 보이였다. 봉덕은 “그 거울 참 밝기도 하다.”고 환성을 울리면서 거울에 비친 자기의 위아래 몇 번이고 훑어보았다.
“참으로 요지경속 같구나. 돌 거울이 이렇게 신통할 수 있나.”
이렇게 외치며 감탄하는 봉덕의 모습을 두고 나졸들의 생각도 깊어졌다.
“봉덕은 죄 없는 사람이다. 재판을 하지 전에 먼저 이런 일이 있었더라면 저 영감은 무사하였을 것이 아닌가.”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나졸들은 마음속으로 그를 동정하였다.
이럴 즈음에 영원암 쪽에서 승려 하나가 오고 있었다. 백마봉 쪽에서 내려오는 길에 명경대 구경을 하려는 것 같았다. 그는 멀리서부터 이 큰 거울을 보고 놀라며 거울 바위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두 나졸은 그 승려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길옆에 비켜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봉덕의 청백함을 원에게 알려야 되겠다고 의논하였다.
그러나 봉덕은 다가오는 그 승려가 눈에 좀 익은 듯 아래 위를 유심히 살피었다. 봉덕을 본 승려는 훔 짓 놀라며 주춤거리다가 그냥 모르는 체 하고 거울 바위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게 무슨 바위랍니까?”
“예 거울바위입니다. 거울 앞에 서면 온몸이 환히 비치지만, 참 희한한 일이지요.”
그 말에 승려는 딴 생각 없이 “그래요?” 하면서 거울 바위 앞에 다가서서 자기를 비추어 보았다. 아무리 비쳐보아도 승려의 모습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승려는 화가 난 듯 큰소리로 “영감은 누굴 놀리는 셈이요?
어데 온몸이 비친 단 말이요? 웬, 싱거운 영감을 다 보겠네.” 하며 두덜거렸다. 그이 말에 봉덕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몸을 홱 돌려 승려를 쏘아보며 그이 곁으로 갔다.나졸들도 후닥닥 일어나서 거울바위 옆으로 뛰어왔다. 이때 거울 속에 봉덕이도 나졸들도 다 환히 비치는데 승려의 모습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이 뜻밖의 조화에 그들은 각기 제 나름대로 놀랐다.
나졸들이 놀란 것은 죄 없는 사람을 죄인이라고 죽이자고 했는데 진짜 죄인이 여기에 이렇게 나타났기 때문이었고, 승려는 이 거울이 저 사람들은 비치는데 자기만은 보이지 않으니 놀랐고 봉덕은 이 거울 바위의 신비한 조화가 놀라왔다.
그럴 때 나졸들이 포승을 꺼냈다. 봉덕은 자기가 금강산 구경을 다 했으니 이제는 묶이나 하고 서글픈 마음으로 서 있었다.그런데 나졸들은 포승으로 승려를 결박하는 것이었다.
승려는 성을 왈칵 내며 항거하였다. 내가 무슨 죄가 있기에 이렇게 무려한 짓들이냐 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에 봉덕의 머리에는 주막집에서 만났던 그 승려가 분명하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라 그때의 사연을 터쳐 놓았다. 그러나 승려는 봉덕을 전혀 본 일이 없다고 우겨대였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졸은 승려의 뺨을 후려치며 “이놈아, 이 거울은 보통 거울이 아니야. 선량하고 정직한 사람과 흉심을 숨긴 악한 자를 갈라내는 신비한 돌 거울이란 말이야.”하며 그래도 몰겠느냐고 따지고 들었다.
정체가 드러났다고 생각한 승려는 그만 고개를 떨 구고 말았다.
그놈은 승려가 아니라 서울장안의 이름난 도적놈이었다. 이놈은 서울서부터 승려의 차림으로 변장하고 양반의 뒤를 따랐고 마침 그날 밤 주막집에서 서울양반의 행장을 훔쳐 봉덕의 봇짐에 싸가지고 뛰려고 하였었다. 그런데 일이 들통나고 그 죄가 봉덕에게 씌워지자, 도망쳐 금강산에 숨어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신비한 돌 거울 명경대 덕분에 봉덕은 억울한 죽음을 면하고 죄 많은 승려 차림의 도적놈은 그날 저녁을 넘기지 못하고 처형을 당하였다.
* 죄에 따른 과보는 어디에도 숨길 수가 없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