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타스님이 들려주는 금강산 전설] 13 백천동 잣송이전설
옛날에 조순이라는 승려가 있었다.
어느 날 금강산 유람을 떠난 그는 금강산 어구의 한 농가에 들려 하루 밤을 묵게 되었다.
저녁을 먹은 뒤에 조순은 문을 활짝 열어놓고 앉아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시절이
가을이라 모든 산이 단풍으로 붉고 소슬한 바람에 낙엽이 쓸쓸히 흩날리었으며 석양빛이 누리에 퍼져가니 하늘땅이 온통 황금빛을 띠었다. 그것을 본 조순은 금강산 부근에 들어서니 가을 풍경이 역시 다른 곳과는 다르구나 하고 생각하며 감탄하였다.
그럴 때 주인이 들어와 인사치레로 손님대접이 소홀하다고 두어마디 말을 하고 손님의 말벗이 되어주려고 눌러 앉았다. 조순도 주인에게 인사말을 하고 나서 금강산에 대하여 이것저것 물었다.
금강산에 오랫동안 살아온 주인은 남다른 애착과 긍지를 안고 자랑삼아 말하였다.
“금강산유람을 하자면 지금 계절이 제일 좋지요. 그렇지만 계절마다 특색이 있어 이름도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선 지금처럼 온 산이 붉은 단풍으로 뒤덮일 때는 ‘풍악산’이요 겨울에는 나뭇잎이 진 뒤 기묘한 바위들이 눈꽃이 날리고 얼음기둥이 설 때 그 모습이 천태만상으로 드러나는지라 그때는 ‘개골산’이 되지요.
또 달리 보면 메부리들이 서리처럼 희고 산뜻하게 보인다고 ‘상악산’이라 부르기도 한답니다.“
금강산에 이름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조순이 말을 받았다.
“그렇지요. 금강산이란 그 이름자체가 안고 있는 자랑만도 큰데 이처럼 많은 이름을 더 가지고 된 것은 금강산이야말로 천하명산이라는 말이 아닙니까.”
“암, 정말 천하 으뜸가는 명산중의 명산이지요. 수정같이 맑은 물이 안개를 피우는 여름철에는 ‘봉래산’이 되고 신선들이 사는 곳이라 하여 ‘선산’이라고도 하지요.”
“허허 노인장의 말씀을 듣고 보니 제가 이처럼 훌륭한 금강산을 너무 늦게야 찾아온 것이 죄스럽습니다. 저는 이번에 이 ‘풍악산’도 보고 ‘개골산’도 ‘상악산’도 ‘봉래산’도 다 보고 갈 작정입니다.”
“그래야지요. 이 금강산은 네 계절을 다 보지 않고서는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답니다.”
“그런데 노인님. 금강산은 신선이 산다고 해서 ‘선산’이라고 한다는데 그거야 옛날에 신선이 금강산에 내려와 살았다고 하여 생긴 말이겠지요.”
“글쎄요. 금강산은 산이 참으로 절승하고 아름다우니, 그 속에 사는 사람은 하늘의 무릉도원에서 세월이 가도 늙지 않고 산다는 신선처럼 생각한테서 나온 말인지도 모르지요.
내가 금강산에서 나서 자라는 동안 노인들이 푸른 옷을 입은 신선이야기를 많이 했지요. 그러고 나도 젊었을 때 한번 푸른 옷 신선을 보았구요.“
“금강산에 사는 신선을 보았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신선이 어떻게 생겼습니까?”
“아무렴 내가 없는 말을 하겠소이까. 내가 본 신선의 생김새는 사람과 꼭 같은데 다만 푸른 옷을 입고 있는 것이 다를 뿐이었습니다.”
“그 신선을 어디에서 만났습니까?”
“어느 해인가 내가 백천동 부근에 잣을 따러 갔다가 본 것 같은데 딱히 어디였는지 기억이 희미하군요. 여하간 본 것만은 사실이니 길은 산속을 두루 찾아다니다 보면 만나게 되겠지요.”
이튿날 조순은 주인집 노인에게 하루 밤 신세진 것을 사례하고 길을 나섰다.
실지로 금강산은 깊이 들어가며 보고 볼수록 듣던 것 보다 더 아름답고 장쾌한 모습이 사람들을 황홀경에로 이끌어갔다.
더없이 아름답고 기묘하게 생간 산속에 어찌 신선이 없겠는가하는 생각이 점차로 켜져서 이제는 꼭 신선이 산다는 생각으로 굳어졌다. 조순은 노인이 보았다는 푸른 옷 입은 신선을 찾아보려고 깊은 골짜기와 바위 벼랑을 톺으며 온 금강산 골 안을 헤매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조순은 또 다시 백천동 깊은 골 안으로 들어갔다.
십왕봉 근처에서 냇물이 감돌아 흐르는 너럭바위에 앉아 쉬려는데 그 바위 옆에 잣송이가 수복하게 쌓여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잣을 모두 까낸 빈 송이들인데 분명 짐승이 까먹고 남긴 것이 아니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자세히 살펴보니, 냇물 곁에 물기 있는 땅위에
사람의 발자국이 희미하게 나 있었다.
“옳지, 이 발자국을 따라 가보자.”
조순은 슬금슬금 그 발자국을 따라 골짜기로 계속 들어갔다.
들어갈수록 험하던 골짜기는 얼마 더 들어가니, 앞이 확 트인 평평하고 아늑한 곳이 있었는데
저 끝에서 사람같이 생긴 것이 어물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자세히 보니, 몸은 알몸인데 온몸에 푸른 털이 돋아 마치 푸른 옷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조순이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낀 그 사람은 날렵한 동작으로 일어나 피하려고 하였다.
조순은 그를 놓칠세라 달려가며 “여보시오.”하고 소리쳤다.
그제야 그 사람은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조순은 급히 달려가 그 괴이한 모습의 사람 앞에 엎드리며 공손히 절을 하였다.
“인간 세상 사람이 신선님을 뵈옵고 문안드립니다.”
“하하..... 신선? 나는 신선이 아니요.”
“예?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이 아니란 말이요?”
“그렇소. 나는 그대처럼 이 땅에 사는 사람이요.”
그 말에 조순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럴 리가......신선이 아니시라면 어찌하여 온몸에 푸른 털이 돋고 걸음 또한
그렇듯 가벼울 수가 있으오리까? 이 고장 노인들은 아이 적에 신선님 이야기를 마을
어른들에게서 듣고 또 더러는 보기도 했다고 합니다. 지금 신선님을 보니, 듣던 바와
조금도 다름이 없거늘 왜 아니라고만 하십니까?”
“하긴 그대가 보는 봐와 같이 내 몸에는 푸른 털이 돋아있고 이 고장 사람들이 말하듯이
백수십년을 살고 있는 것도 사실이요. 하지만 난 하늘나라에서 온 신선이 아니요.”
신선은 이런 말을 하고 나서 큰소리로 껄껄 웃었다. 그리고 나서 “그 사연을 알고 싶다면
저리로 가서 이야기를 합시다.”고 하였다.
푸른 털이 돋은 사람은 손을 들어 골 안의 깊은 숲속을 가리키더니 조순을 데리고 그리로 들어갔다.
울창한 숲을 지나 맑은 시내물이 흰 바위를 적시며 흐르고 햇볕이 밝게 비치고 바람도 없는
아늑한 곳에 이른 그 사람은 걸음을 멈추었다.
“자 이젠 다 왔으니 여기에 앉으시오.”
조순은 그가 가리키는 너럭바위에 우선 다리를 쭉 펴고 앉았다.
사방을 둘러보니 봉우리들이 얼마나 날카롭고 지세가 험한지 누구도 감히 여기까지
들어설 염두를 못 낼 만큼 깊은 골이었다.
“이런 험한 곳이니 사람이 살 것 같지 못한데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고 내심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 사람은 조순이 응당 그런 생각을 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 빙긋이 웃으며 가볍게 몸을 날려 너럭바위 위에 뛰어 올라와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너럭바위 위엔 솥처럼 생긴 돌확이 나있고 그 안에 누룩덩이 같은 것들이 가득 차 있었다.
“자, 시장할텐데 우선 이것부터 맛보시우.”
그 사람은 커다란 덩어리를 하나 꺼 내여 그것을 두 쪽으로 가른 후 하나를 조순에게 주었다.
조순은 그 덩어리를 조금 뜯어 조심스럽게 입에 넣어보았다.
그랬더니 갑자기 입안에 향기로운 맛이 가득차고 신선하면서도 달콤한
그 무엇이 스르르 녹아 넘어 가는 것이었다.
“그 맛이 어떠하오? 이게 바로 내가 먹는 밥이요. 잣을 찧어서 만든 것이지요.”
푸른 털 돋은 사람도 한 조각 떼어 입에 넣고 우물거려 넘긴 다음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나는 본시 전라도 사람이요. 먹고 살기가 하도 어려워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금강산에 들어 왔지요. 하지만 처음에는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파 죽을 지경 이였소.
그래서 돌아다니며 잣을 따다가 먹고 또 여러 산열매와 산나물을 뜯어다가 섞어 이렇게
음식을 만들어 먹었더니 처음에는 밸이 윤활해지고 피부에 윤기가 돌더니 마침내는
온몸에 푸르스름한 털까지 잔뜩 돋아나는 것이 아니겠소.
그리고 날이 갈수록 힘이 솟고 헐기가 왕성해져 옷을 입지 않아도 추운 줄 모르게 되었다오.
이렇게 살아온 지 어언간 100여년이 넘었구려.“
“아아, 말씀을 듣고 보니 당신은 진실로 신선이요.”
“신선이라....그런 즉 하늘이 아니라 이 금강산이 나를 신선으로 만든 셈이지요.”
“지당한 말씀이요. 천하절승 금강산의 정기는 절경 속에 사는 사람마저 신선이 되게 하니
금강산에 신선이 산다는 말은 헛소문이 아니었소이다.”
조순은 그날 저녁 아담하고 조촐한 초막에서 그와 함께 하루 밤을 지냈다.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다가 피곤에 못 이겨 잠깐 쪽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깨어보니
푸른 털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조순은 그 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금강산에서 혼자 살면서 그 “신선”처럼 잣을 따고
산채와 산열매를 따먹으며 지냈는데 그가 언제 어디서 생을 마쳤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 북한 방언을 그대로 게재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