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에 올라 세상을 굽어보니
임연태 지음, 인북스
408쪽, 1만9500원

누정(樓亭)은 누각과 정자의 약칭이다. 누각은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벽이나 문을 두지 않고 높이 지은 다락식의 집이다. 정자는 누각보다 작은 건물을 말한다. 유서 깊은 누정에는 뜻있는 인물들의 발자취가 서려 있다. 현액(縣額)되어 있는 고래의 누정시(樓亭詩)가 그것이다. 누정시는 정자와 누각의 풍정을 소재로 한 시문이나, 누정의 아름다움 속에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읊은 문인 선비들의 시를 일컫는다.

임연태 시인은 기행집 《부도밭 기행》, 《절집기행》, 《히말라야 행선트레킹》과 난민촌 르뽀집 《철조망에 걸린 희망》 등으로 필력을 검증받은 작가. 본능적으로 뭔가를 찾아다닐 궁리를 하는 그가 이번에는 우리의 산하 곳곳에 남아 있는 누정시의 무늬와 결을 찾아 떠났다.

어둠이 다 가시지 않은 12월의 어느 아침, 새벽 바람을 가르며 부석사 은행나무 길과 사과밭을 지나 다다른 안양루. 그곳에서 그는 지금은 사라진 취원루를 생각한다.

“부석사 취원루가 언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지만, 거기 머물던 무수한 시심이 있어 불심과 시심이 어우러지는 또 하나의 화엄 공간은 언제나 열려 있다. 그래서 안양루 바람벽에 기대어 김삿갓의 시를 소리 내어 읽던 30여 년 전의 나를 만날 수도 있다. 시가 있는 모든 공간은 시공을 초월해 옛사람을 만나고 나를 만나는 곳이니까.”(299쪽)

단오 무렵 찾은, 사랑과 이별 노래가 가득한 남원 광한루. 그곳에서 그는 꿈속 같은 신록을 찬탄한다.

“청허부(淸虛府)라 쓰인 현판이 걸린 솟을삼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엷은 현기증 같은 것이 느껴진다. 온통 푸르다. 푸른 하늘을 떠받치고 선 나무도 푸르고, 푸른 나무가 얼비친 물도 푸르고, 그 물가에 서 있는 누각도 푸른 기운에 감싸여 있다. 녹음방초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 시나브로 천지가 신록의 절정에 이르고 있다.”(373쪽)

책은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은 한국의 대표적인 누각과 정자 22곳을 찾아 누정을 소재로 한 시와 누정의 현판에 걸린 누정시 210여 편을 소개하고 있다. 작품의 창작 배경과 문학적 의의는 물론, 시를 쓴 인물에 얽힌 영욕의 역사를 함께 조명해, 문인 선비들의 풍류와 기개, 예술적 향기를 오롯이 감상할 수 있게 했다.

저자는 선비들이 남긴 시문(詩文)뿐 아니라 각 누정마다 창건자와 시대적 배경, 지리적 환경, 주변의 풍광과 인물에 얽힌 일화들을 상세히 기술해 역사문학 기행이라는 특성에 충실한 책을 꾸미고자 했다. 책에 등장하는 누정시를 남긴 시인 묵객도 유명인이 많다. 신라 시대의 최치원을 비롯해 고려의 이규보, 문익점, 이색, 정몽주 등과 조선 시대의 하륜, 이이, 정철, 이산해, 김시습, 김병연, 서거정 등 역사의 고비마다 중요한 역할로 이름을 떨친 선비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사진 = 금강신문]

12월 14일 서울 종로 인사동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저자(사진)는 누정시의 가치를 이렇게 역설했다.

“특히 권력의 정점에서 세상을 호령했던 이들이 굴곡진 삶을 겪고 나서 누정을 짓고 강학에 전념하여 재기를 다지거나 마음을 추스르며 귀거래사를 읊었음을 상기할 때, 누정시는 선비들이 정신을 수양하며 살아가는 지혜를 모색하는 하나의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초야에 은일하여 자연과 교감하며 무위자연과 안분지족을 추구한 이들이 유유자적한 삶을 누리며 관조와 달관의 경지를 담은 누정시는 그래서 더욱 소중한 가치가 있습니다.”

《유심》잡지 연재를 위해 3년 간 전국의 누정을 찾았던 저자는 독자들이 누정시에 대해 애정과 관심을 가져줄 것도 당부했다.

“누정문학에 대한 문학적 관심과 학술적 연구는 빈약한 편이죠. 기본적인 데이터베이스 구축 작업조차 일천하니까요. 학회나 대학은 물론이고 많은 지역의 문화원이 전문인력과 예산의 부족으로 손을 놓고 있는 실정이죠. 누정시야말로 우리 문학계가 특별한 관심으로 학술적 연구를 통해 정리하여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고전문학 분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