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두 엽편葉片소설 ‘철수와 영희’, 그 스물다섯 번째(마지막) 이야기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
고등학교 시절부터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과 ‘순자荀子의 성악설性惡說’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그래도 이 세상에는 착한 사람이 많지 않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 세상이 망하지 않고 어떻게 이렇게 발전해올 수 있었겠어? ……” 라고 생각하며 성선설 쪽에 기울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내가 이 소설의 화자話者가 되어, 내 혈육血肉인 철수 오빠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게 아니구나!’ 하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게 된다. 나와 피를 나눈, 현대 과학의 용어를 빌면 어머니 ‧ 아버지에게서 유전자를 함께 물려받은 내가 보기에도 철수 오빠에게 ‘그 본성이 선善하다’는 평가를 할 수 없는데, 어떻게 “사람들의 성품은 본래 선하다”는 주장을 믿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내가 느끼기에 이 정도이니, 철수 오빠에게 피해를 당한 이들이 ‘성선설’을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성선설’을 믿던 세상 사람들이 ‘성악설’ 쪽으로 기울어지게 만드는 데에도 우리 철수 오빠의 영향이 매우 크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사람은 뭐 한 가지를 거짓말하기 시작하면 거기에 맞춰서 한없이 거짓말을 더 하게 된다고. 그게 바로 허언증이죠. 하지만 허언증(虛言症)을 앓는 사람의 거짓말이란 대체적으로 순진한 것이고, 주변 사람도 대략 눈치 채게 마련이거든요. 그렇지만 그 애의 경우는 달랐어요. 그 앤 자기를 지키기 위해선 아무 거리낌 없이 남을 해치는 거짓말도 했고, 이용할 수 있는 건 무엇이든 다 써먹으려고 했어요. 게다가 상대에 따라 거짓말하는 정도도 자유자재지 뭐예요. 엄마라든가 친한 친구처럼 거짓말하면 금방 탄로가 날 것 같은 상대에겐 그다지 거짓말을 안 했어요. 한다고 해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죠. 그리고 절대로 탄로 나지 않을 만한 거짓말만 했구요. 그러다가도 어쩌다 탄로가 나면, 그 예쁜 눈에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변명을 하거나 사과를 하는 거예요, 애원하듯이. 그러면 누구도 그 이상 화를 내지 못했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상실의 시대》, 문학사상사. 220 & 221쪽) 원 제목이 《노르웨이의 숲》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에 나오는 구절이다. 한 차례 좌절의 어려움을 겪고 회복되어 정상 생활을 하고 있는 자신을 무너뜨려 결국 사랑하는 남편과 딸을 떠나서 다시 정신 요양원에 머물게 만든 어느 여중생과의 기억을 더듬으며 레이코가 주인공 와타나베에게 털어놓은 사연 중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아마도 우리 철수 오빠에게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라고 하면 이렇지 않을까 싶다. “금錦禽金 철수鐵秀, 그 사람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선 아무 거리낌 없이 남을 해치는 거짓말을 하고, 이용할 수 있는 건 무엇이든 다 써먹었어요. 게다가 상대에 따라 거짓말하는 정도도 자유자재였습니다. 부모라든가 친한 친구처럼 거짓말하면 금방 탄로가 날 것 같은 상대에겐 그다지 거짓말을 안 했습니다. 한다고 해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죠. 그리고 절대로 탄로 나지 않을 만한 거짓말만 했습니다. 그러다가도 어쩌다 탄로가 나면, 그 커다란 몸집을 굽혀 무릎을 꿇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변명을 하거나 사과를 하곤 했습니다. 그러면 누구도 그에게 더 이상 화를 내지 못했습니다. 금철수씨가 숱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자리에까지 와서 버틸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일 것입니다. 그 사람, 이 타고난 재주(?)는 죽을 때까지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거야 개인 문제라 내가 간여할 바가 아니지만 그 과정에서 상처를 받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 세상에 큰 피해를 주니까 그게 걱정입니다.”
아, 내 오빠가 이런 사람인 것을 아는 세상 사람들이 이처럼 많다니 이를 어쩌나! 이 오빠 덕분에 내가 돈 몇 억 원을 손에 쥐었지만, 늘 불안감 속에 살아가는 것도 이제 지겹고 게다가 내가 사랑하는 나의 조카, 오빠의 아들이 속한 단체에도 재단의 공금 수백만 원(가족의 연락에 따라 '수억 원'을 '수백만 원'으로 수정)을 지원했다는 것도 자꾸 마음에 걸린다. 이러다 오빠의 문제가 세상에 터지기 시작하면서 고구마 줄기가 뽑혀 나오듯, 대추나무에 걸린 연줄이 풀리듯 이것도 함께 나오면 조카는 어떻게 되고 그 돈을 지원받으며 내 조카에게 “훌륭한 아버님을 두셨어! 아버님 실망키지 말고 연구에 매진하시게!”하며 웃던 조카의 지도교수는 또 뭐라고 하겠는가. “자네 아버지가 결국 업무상 배임 행위를 하는 데에 우리 단체를 써 먹은 것 아니냐? 어찌 나를 이렇게 욕 먹이느냐? 자네는 이제부터 내 제자가 아니네. 다시는 얼씬도 하지 말게. ……”라며 조카를 닦달하면 어떻게 하느냐 말이다. 결혼 40년이 지나서부터 남편에게 아주 작은 사랑을 받는다고 여기며 행복해하고 그 기분으로 프랑스 추억여행을 다녔는데, 그것이 남편이 저지른 배임 덕분이었음을 알게 되는 착하디착한 올케 언니는 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제 남은 길은 한 가지밖에 없을 것 같다. 자기가 아직도 국무총리급은 된다고 믿고 있는 고집쟁이 철수 오빠가 말을 들을 리는 없으니, 내가 올케 언니와 조카들을 설득해서 오빠의 죄를 대신 참회하는 기도를 드리고 오빠에게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찾아가 진심으로 “제 남편의, 우리 아버님의 잘못을 잘 압니다. 우리들을 봐서라도 용서해주세요. 무슨 일을 하라고 하시든 다 하겠습니다. 제 남편만, 아버님만 용서해주시면 우리가 대신 지옥에까지도 갈 수 있습니다. ……”라고 매달려보라고 해야겠다. 그렇지 않고서는, 철수 오빠가 사후에 무간無間지옥에 떨어질 것이 확실한데다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많은 사람들이 쏟아내는 비판과 비난 ‧ 저주 때문에 ‘살아도 산 게 아닌 신세’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으뜸가는 제자[上首弟子] 중 한 분이었던 목련존자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저지른 죄악 때문에 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하러 지옥에까지 갔다고 하고 며칠만 지나면 그 설화가 얽힌 우란분재盂蘭盆齋라고 하는데, 이대로 가다가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 확실한 남편과 아버지를 위해 대신 참회 기도를 올리는 것을 못하겠다고 하지는 않겠지. 아, 그리고 이왕 참회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김에, 나도 지난 번 수련원 엉터리 공사 하면서 챙긴 돈을 다시 재단에 반납하고 조카도 관계된 단체에 지원된 몇 억 원을 다시 돌려보내며, 올케 언니가 프랑스 추억여행 다니며 혜택 본 것들도 반납하자고 해야겠다. 회계 상 그게 어려우면, 그 돈을 합쳐서 오빠가 망치고 있는 그 재단 설립자의 뜻에 맞게 이 땅의 불교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일에 쓸 수 있게 무기명으로 기탁하자고 해야겠다. 이렇게라도 해야 내 마음이 편안해질 것 같다.
거듭 말하지만, 오빠는 결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 나라 최고 대학교 법대를 다니며 익힌 법률 지식과 동서고금東西古今의 문학작품과 사상서들을 읽으며 머릿속에 저장한 것들을 활용해서(아니 악용惡用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위기를 모면하려고만 들 것이다. 《상실의 시대》에 나오는 그 여중생처럼 새로운 거짓말을 만들어 더 많은 사람들을 속이려 들 것이다. 그렇지만 부모님의 유전자를 함께 물려받은 나까지 오빠를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어떻게 해서든 철수 오빠가 지옥에 떨어지는 것만은 막아보련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착한 올케 언니는 나의 이 마음을 알 것이다. 올케 언니가 뜻을 함께 하고, 언니가 나서서 조카들을 설득해 마음을 모아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드리면 철수 오빠가 지옥으로 떨어져 고통을 겪는 것만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어보자.
작가의 변辯 ---
우리 곁의 ‘철수’ 방치는 큰 죄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소설을 써보았습니다. 이 소설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독자들 중에는 이 소설의 주인공 철수에 대하여 이미 “아, 그 사람 …!”이라며 눈치를 채신 분들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 맞습니다. 엽편葉片 소설 <철수와 영희>는 굳이 따지면 팩션(faction)입니다. 소설에 나온 사건과 소재는 거의 사실(事實, fact)이지만, 그 사실을 전하면서 픽션(fiction) 형식을 빌렸습니다.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주인공 철수와 그 주변 인물에 대해 제가 모르고 있던 사실(fact)을 전해준 분들도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한편 이야기를 재미있게 이어갈 수 있었던 데에는, 이 ‘구체적인 사실’들 이외에 오르한 파묵의 《순수 박물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스콧 피츠제랄드의 《위대한 개츠비》 같은 소설뿐 아니라 최호근의 《나치대학살》에서 아주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실제 역사에 그리고 소설에, 주인공 철수와 닮은 인물들이 참 많다는 것을 알고 놀라기도 하였습니다. 아마 세상은 ‘성선설이 맞다’고 믿게 해주는 사람들도 많지만 ‘성악설이 확실하다’고 믿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이들이 주인공 철수 이외에도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한없이 서글펐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아직 ‘성선설’을 믿습니다, 아니 믿고 싶습니다. 그렇게 믿어야 이 세상이 무너지지 않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착한’ 사람들이 철수의 잘못을 지켜보면서 “설마 …?”하고 있다가, 아니면 ‘40년, 50년 우정’을 믿다가 결국 철수의 배임과 비리를 방치하거나 조장하고 재단을 무너뜨리는 데에 일조하는 상황을 보면서 “착하기만 하고 어리석으면 그것은 악한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동안 현실의 철수에게 상처 입은 분들, “내가 무슨 힘이 있어? …”하면서 그의 범죄 행위를 모른 체 피해온 사람들 ……. 이제 더 이상 그렇게 무기력하게 있으면 안 됩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철수를 쫓아내주고 그 덕분에 편안하게 지내볼 생각을 하는 비겁한 짓은 더 이상 안 됩니다.
지금 대한민국과 불교계에 분명히 존재하는 철수(한 명일 수도 있지만 뜻밖으로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를 방치하는 것은 큰 죄를 짓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 책을 읽다가 그 동안 철수가 재단을 사유화하면서 모든 것을 제멋대로 하고 구성원들을 함부로 다루는 데에도 저항하지 못하고 그 밑에서 버티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 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대목이 있어서 옮깁니다.
유대인 절멸수용소에서 수감자 대 경비 병력의 비율은 평균 20 : 1에서 35 : 1 사이를 오갔다고 합니다. 이렇게 적은 수의 경비 병력으로 수감자들을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은, 수감자들에 대한 철두철미한 통제 방식덕분이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철수의 교묘한 통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담배 한 개비에 양심을 팔고 동족을 유린했던 이들처럼 철수가 던져주는 작은 열매에 매달리고 있지는 않은지요?
“나치스는 유대인 수감자들을 통제하는 데 폴란드인이나 다른 민족 출신의 수감자를 활용하고, 유대인들 중에서도 나치스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충성할 만한 사람들을 선별해서 그들을 앞잡이로 만들었다. 이들이 바로 그 악명 높은 카포Kpo와 막사의 막사장들이었다. 수용소 밖에 있는 사람들이 볼 때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은 수용소 측이 이들에게 충성의 대가로 제시하는 물질적 보상은 고작 담배 몇 개비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수용소 안의 수감자들에게 담배 한 개비는 수프 한 그릇과 맞바꿀 수 있는 교환 가치가 있는 고액권과도 같았다. 굶주림에 시달리던 그들에게 수프 한 그릇, 빵 한 조각은 양심과 바꿀 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물론 카포와 막사장들에게 부여된 작은 권력도 매우 달콤한 매력 요인이었다. 이들을 효율적으로 활용함으로써 각 수용소 소장과 친위대 대원들은 수용소의 운영과 보급, 일정을 계획하고 감독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었다. (《나치 대학살: 서양 현대사의 블랙박스》/ 최호근 지음/ 푸른역사. 326 & 3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