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가 늘어도 성당은 빈다. '청춘'의 수혈이 시급하다.” 조선일보가 지난 11월 15일자에 인터뷰 기사로 보도한 정의채(鄭義采, 88) 몬시뇰(명예 고위 성직자)의 말이다. 이 기사는 ‘한국 가톨릭의 지성(知性)’으로 일컬어지는 정의채 몬시뇰과 ‘한국 천주교의 길’을 논하는 대담을 수록한 것이었다
정 몬시뇰의 대담은 지난 1945년 15만이었던 한국 천주교 신자의 수가 지금은 500만으로 늘어난 폭풍성장의 배경과 함께, 한국사회가 “가톨릭 통해 '정신적 개국(開國)'을 이뤘지만 요즘 미사 참여율 20%밖에 안 된다”는 현실 진단, 그리고 이의 극복대안을 위해 ‘젊은이와 지성(知性)에 복음을 집중해야 한다’는 내용을 뼈대로 구성됐다.
이 대담은 천주교 원로인 정의채 몬시뇰이 최근 <인류 공통문화 지각변동 속의 한국>(위즈앤비즈) 제2권을 펴낸 것과 관련해 이루어진 것이다.
아흔을 앞둔 나이에도 여전히 정열에 넘치는 노(老)사제로부터 한국 천주교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에 대해 적극적으로, 그리고 아주 구체적으로 대안을 제시했다.
정 몬시뇰은 한국 천주교는 광복 후 시대적 과제를 이끌어가는 역할을 했으며, 6·25 전쟁으로 한국인이 고통과 실의에 빠졌을 때 외국인 선교사와 한국인 사제들은 그들의 심신(心身)을 구원하며 사랑을 나누었고, 근대화가 한국의 최대 과제였던 1960~70년대는 선진국의 문화와 정신을 받아들이는 데 앞장섰으며, 1980년대 이후에는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사회를 민주화하는 데 적극 나섰고, 교회 내적으로는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를 통해 사제·수도자·평신도가 함께하는 공동체로 변화된 것이 폭풍성장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분석했다.
그의 이 같은 정리에 100% 동의할 수 없지만, 그는 나름의 시각으로 한국 근대화에서 천주교의 기여를 강조한 것이다. 그는 특히 ‘개신교가 물질적으로 한국을 근대화시켰다면 천주교는 그보다 100년 앞서 한국인에게 새 정신을 불어넣었다’고 자부했다. 18세기 말에 최고 수준의 젊은 학자들이 무너져가는 나라를 바꿔보려고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였고, 그것이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 나가 대규모의 순교에 이르렀으며, 굳게 닫혔던 나라의 문을 열게 했고, 세계가 아시아 동쪽 끝의 한국에 관심을 갖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정신적 개국(開國)의 동력’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도 뜻밖에 한국 천주교의 오늘에 대해서는 '외화내빈(外華內貧)'이라며 우려했다. 신자는 늘어나지만 성당은 비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주일미사 참여율이 20% 선까지 떨어졌고, 그나마 젊은이는 별로 없다고 개탄했다. 또한 서구와 달리 사제가 줄지는 않지만 (사제들이) 신자를 지도할 능력을 가졌는지에 대해 솔직하게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젊은이와 지성(知性)에게 외면당하는 종교는 사회로부터 멀어지게 된다”고 단언했다. 정 몬시뇰은 “서구에서는 노동문제가 심각해지던 1891년 교황 레오 13세가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 회칙(回勅·교황이 주교와 신자에게 보내는 서한)을 통해 가톨릭적 해법을 제시했고, 미국 가톨릭의 라이언 몬시뇰은 1930년대 그 정신에 따른 노동법 제정을 주도하여 대공황 극복에 큰 역할을 했다”며 “이제 한국 천주교도 모든 사람이 인간답게 살게 하는 넓은 의미의 사회 복음화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 천주교의 미래를 젊은 신자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는 정 몬시뇰은 “이제 인류는 공생(共生)·공조(共助)·공영(共榮)의 단계에 들어섰고, 후진국들이 올라오는 세계사적 흐름에 우리가 앞장서야 한다”며 “그 가장 좋은 방법은 젊은 신자들로 해외봉사단을 만들어 그 지역들에 우리의 개발 경험을 전하고 우리 색깔의 문화봉사 활동을 펼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미 일부 성당에서는 자발적으로 청년봉사단을 파견하고 있으나, 아래로부터 시작된 이런 움직임이 널리 확산될 수 있도록 천주교 지도부가 관심을 갖고, 정부와 기업도 적극 지원해야 한다”며 “이는 '들숨'으로 한국에 들어온 천주교가 이제 '날숨'으로 세계에 공헌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한국 천주교의 원로 정 몬시뇰의 대담 기사를 읽으며, ‘부자 몸조심’이라는 생각과 ‘부럽다’는 생각이 수 없이 교차했다. 대담을 반복해 읽는 내내 한국불교의 현실과 빗대어 생각하게 되었고, 가톨릭 원로의 탁월한 혜안과 불교계 원로의 서글픈 현실이 교차했다. 하기야 세상 이치가 해가 연이은 산에 비치고, 달이 창에 둥근 것(日出連山 月圓堂戶)이듯 명암쌍쌍(明暗雙雙)인 것이니, 도의 경지에서는 일희일비할 것도 없다고 한다면 달리 할 말도 없지만.
대담 기사를 읽고 난후 한 달 가까이 ‘젊음과 지성에 투자하라’는 노 신부의 말이 화두처럼 맴돌았다. 이 메시지는 기실 한국 천주교보다 한국 불교에 더 절실한 것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이는 정 몬시뇰의 대담을 장황하게 소개한 이유이기도 하다.
지성, 젊음. 이 두 단어는 작금의 한국불교에서 부지불식간 사라지고 있는 것들이다. 젊은이들이 일대사의 해결을 위해 부처님 도량으로 몰려들고, 한국의 지성들이 그들의 삶과 안목을 향상시키기 위해 다르마에 귀의하는 흐름이 사라진지 이미 오랜 시간이 흘렀고, 앞으로도 달라질 것 같지 않다는 불안감이 엄습해오고 있는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조선의 불교사를 살펴보면 불교를 지탱해 온 힘 역시 극소수 선지식들이었으니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라고 한다면 달리 대꾸할 말도 없겠다. 그러던 중 <불교평론> 2013년 겨울 호를 받아보았다. 목차를 살피던 중 ‘낯설어 신선하기까지’ 한 특집 주제가 눈에 띠었다. ‘현응스님의 열두 편지와 여섯 독자의 에세이’라는 제목의 특별기고가 기자의 눈을 잡아끈 것이다. 어쩌면 스님들 가운데에도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이 모여 토론할 만한 주제를 제시해주고 있는 지성이 있었다는 ‘안도감’이 ‘달려들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 지도 모르겠다.
이 특별 에세이가 <불교평론>에 게재된 인연은 이렇다.
지난 여름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플리스 지역에서 불교 공부를 원하는 한인들이 모여 현응 스님(현 조계종 교육원장)의 ‘사제(師弟)에게 보내는 열두 번의 편지’를 읽고 토론을 했다. 현응 스님의 이 글은 지난 1987년 월간 <해인>에 매월 한 편씩 12개월 동안 발표된 것인데, 스님의 저서 <깨달음과 역사>(불광출판사, 2009)에도 게재된 것이다. 현재는 ‘편지글로 읽는 불교교리’라는 제목으로 월간 <해인> 인터넷 홈페이지에 전문이 올라 있다. 교수나 연구원 등 지식인들로 구성된 이들은 두 달에 걸쳐 매주 토요일 오후 미네소타대학 학생회관의 한 쉼터에 모여 세 시간씩 현응 스님의 편지글을 아홉 차례에 걸쳐 논의했다고 한다. 모든 모임이 끝난 지난 8월 초, 여러 사람의 순수한 노력과 정성으로 이룬 공덕을 에세이로 만들어 <불교평론>의 독자들과 함께 나누어보자는 의견이 나왔고, 그런 인연공덕으로 이번 겨울 호에 소개되기에 이른 것이다.
유선경 미네소타주립대 철학과 교수는 현응 스님의 저서 <깨달음의 역사>에서 ‘깨달음’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주시했다고 밝히고 있다. 유 교수는 ‘돈오’란 존재와 인식의 분리할 수 없는 역동적 구조에 대한 깨달음으로, 깨달음 이전의 세계관이 깨달음 이후 전적으로 다른 세계관으로 전환된다는 해석, 즉 돈오란 ‘혁명적 깨달음’이란 현응 스님의 주창에 크게 공감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의 ‘혁명적’이란 기존의 믿음체계와 가치관이 전적으로 새로운 것으로 교체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유 교수는 현응 스님이 말하는 혁명적 깨달음, 즉 깨달음 이전의 세계관인 본질주의(Essentialism)와 실재론(Realism)에 기초한 믿음체계가 깨달음 이후 전적으로 다른 세계관인 ‘연기(緣起)’ 곧 공(空)을 이해하는 믿음체계로 전환되는 것라는 데 주목하고 있다. 유 교수는 현응 스님의 혁명적 깨달음을 자신의 관점으로 다시금 정리한다. “당신이 이차원에 살고 있다는 하나의 동그라미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고 상상해보자. 불현듯 당신은 자신이 사실은 삼차원의 구(Sphere)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당신의 삼차원의 세계에서 구의 단면인 이차원의 동그라미로 알고 살아오고 있었다고 깨달았다. 이러한 ‘깨달음’은 이제 모든 사물이 이차원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삼차원의 부피가 있는 사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당신 인식의 혁명적 전환으로 존재의 진실이 밝혀지며, 이로써 당신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전면적으로 전환된다.” 유 교수는 자신이 제시한 이런 예가 깨달음이란 우리의 관점을 새로운 차원으로 전환할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현응 스님의 가르침을 쉽게 보여준다고 자부한다.
지성훈 시게이트 기술유한회사 선임엔지니어는 ‘범부들의 깨달음’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지 엔지니어는 대중들에게는 접근하기 어려운 경지로만 다가오곤 하던 깨달음을 현응 스님이 <깨달음의 역사>에서 보다 분명하게 정의하고 한국불교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자세히 조목조목 설명한 점이 반가웠다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는 깨달음은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 혹은 성불할 수 있는 수단과 방편이라고만 이해하던 자신에게, 깨달음의 길이 중생구제를 위한 ‘보살도의 구현’이라고 가르치는 현응 스님의 글은 정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고 고백했다. ‘깨달음=해탈=성불’의 구도에서 ‘깨달음=실천=보살도의 구현’이라는 인식으로 전환으로 인해 ‘상자(Box) 안에서 상자 밖으로’ 나오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백경민(미네소타대 사회학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씨는 한국의 인구 50% 이상이 불교와 기독교 중 하나를 믿고 있는데, 한국사회는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사회가 되지 못하고 있다며 이는 불교와 기독교가 본연의 정신, 즉 자비와 사랑을 구현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불교와 기독교의 근본 가르침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돌아가서 살펴보고, 내가 아닌 우리를 중심에 놓고 어떻게 보살행을 행할 지, 그리고 어떻게 사랑을 실천할 지 돌아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피터 김(미네소타 SKK건축회사 건축사)은 ‘깨달음의 실천’에 주목했다. 피터 김은 한국불교가 서구사회의 면모를 더 잘 이해하고 그 바탕 위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해주기를 바란다며 자신의 주장을 전개했다. 그는 현응 스님의 저서 <깨달음의 역사>를 공부하는 모임을 통해 불교의 기본 개념과 주제에 대해 알게 되었으며, 이 공부모임을 주도한 홍창성 교수의 철학적 설명과 대학원생들의 자유로운 의견이 어떤 값비싼 휴가와도 비교하지 못할 휴식과 기쁨을 느끼게 해 주었다고 만족해했다. 그는 특히 “현응 스님이 펼치는 불교의 기본 가르침과 부처님 말씀의 역동성, 그리고 이에 대한 스님의 철학적 접근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며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설명할 때 탁월하게도 도교의 영향으로부터 불교가 분리되어야 함을 지적했고, 공의 가르침을 설파할 때 변화의 관계성의 참 의미를 명료하게 선별해 주었으며, 주관적 영역과 객관적 대상을 분별하는 데 대한 인식론 차원으 우려도 잊지 않으셨다”며 경의를 표했다. 피터 김은 이어 “한국불교에서는 그러나 이런 불교의 본질이 빛나는 진주가 석회 퇴적물로 감싸이듯 갖추어지게 되었다”고 우려하고 “스티브 잡스의 말, ‘나에게 아이디어는 실행되지 않으면 값어치가 없다. 아이디어는 승수(multiplier)에 불과하다. 실행이야말로 수백만 불의 가치가 있다’는 말처럼 부처님이 발견하신 진주를 갈고 닦아 세상 사람들과 공유 가능한 형태로 만드는 실천에 관한 연구가 얼마나 있었는 지도 궁금하다”고 지적했다.
구기성(아이오와주립대 컴퓨터공학과 박사과정) 씨는 ‘개인적 관점에서의 실천불교’에 관한 견해를 밝혔다. 그는 “현대 실천불교는 개개인의 문제가 발생할 경우 외부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기 전에 자신의 내부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아서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며 “즉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에 대해서 개인이 개선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인식하고 문제 해결에 대한 적극적인 노력을 한다면, 생각이나 상황의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를 크게 악화시킬 가능성은 줄어든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끝으로 이 모임을 이끈 홍창성 교수(미네소타주립대 철학과)는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것에 대해 천착한 한 후 “현응 스님은 윤회를 ‘현대적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불교철학은 직접적인 해결책을 주려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이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조명함으로써 그 문제 자체가 존재할 필요가 없음을 보임으로써 문제를 ‘해체’한다”고 밝혔다. 불교의 시각은 “없는 문제를 있다고 보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에, 이렇게 문제가 문제 아님을 보여주는 ‘문제 해체’의 과정이 바로 불교가 생사윤회의 문제에 해답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한 홍 교수는 다섯명의 선수가 뛰는 어떤 농구팀을 ‘미네소타 드래곤즈’라고 명명한 후 “각 선수의 이름은 색, 수, 상, 행, 식이라고 할 때 이 오온이 모여 상호작용하며 유지시키는 팀으로서의 ‘가상의 나’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는 점을 논의했다. 이 팀은 고정불변하지 않으며 영원히 존재할 수도 없고, 어떤 실체라고 보이는 것이 없어서 이 팀이 진정 실재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다섯 선수가 모여 함께 경기를 진행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셈이라고 설명한 홍 교수는 “‘색’이라는 한 선수는 그 자신이 끊임 없이 변하며 다른 플레이를 보여줄 뿐 아니라 이 선수가 팀을 그만 두고 밖에서 다른 선수가 들어와 대신 뛰기도 하는 것처럼 수상행식 또한 각각이 끊임 없이 변하고 교체되기도 하면서 다섯 사이의 상호작용 방식도 항상 변한다”고 설명했다. 불교에서는 이렇게 끊임 없이 변화하는 요소들의 가변적인 상호작용과 같은 것이 삶이라고 가르치며, 그러므로 고정불변의 본질을 가진 ‘나’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미국의 지식인 불자들이 한 한국 승려의 편지와 저술을 놓고 벌인 이 뜨거운 토론과 의견 개진은 한국불교계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흥미롭고 신선한 것이었다. 이들 가운데에는 홍창성 교수처럼 장년층도 있지만, 대학원생 구기성 씨처럼 젊은 지성들이 많았다. 이들이 특별 기고한 에세이를 읽으면서 이런 흐름이 저 미국이 아닌 한국에서도 불길처럼 일어나야 한다는 아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학자들이 모여 여는 학술세미나나 심포지엄 같은 것 말고, 정말로 현장에서, 일상에서 일하고 공부하는 불자들이 모여서 불교를 논하고, 교리를 해석하며, 이의 실천을 고민하는 모임. 이런 모임이 늘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현응 스님처럼 이들에게 문제의식을 제공할 수 있는 지성을 갖춘 수행자가 많아져야 하고, 기복과 기도에 치우쳐진 신행에서 벗어나 불교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재가의 지성화 및 신행방식의 혁신도 반드시 뒤따라야 할 것이다. 감동만 있다면 아프리카행도 마다 않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한국불교의 체질 변화는 물론이고.